어떤 비평가는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지 않으면 문학이 아니거나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하고
반대로 시대의 아픔과 같은 관념을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예술작품이 아니고
하나의 진술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한다.
여기 이에 대한 김춘수 시인의 견해를 <풀/김수영> 한 편에 대한 비평적 감상을 통해 들어본다.
<풀/김수영>
풀이 눞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이 눞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
다시 누었다//
풀이 눞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라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에서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에서 정서의 ‘객관적 상관물’은 아주 적절하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결국은 이미지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이 시는 형상화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인이 메시지를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경우, 이미지는 시에서 위축되고 랜섬의 말을 빌리면 ‘과학적 기록’이 된다. 즉 진술이 된다. 시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까 메시지만 선명하게 전달되면 된다면 청마적인 시 인식이 되고 만다. 이런 시인의 눈에는 정서의 객관적 상관물, 즉 이미지는 사치며 유희가 되니까 되도록 피해야 할 물건들이다. 이런 시라면 시가 아니고 잠언이라 할 수 있다.
<풀/김수영>은 상징시이지 상징주의 시는 아니다. 풀은 민중 또는 개인을 비유하고 있다.
이미지 기술에는 서술적descriptive인 것과 비유적metaphorical이 있다. 서술적 임지란 배후에 관념을 거느리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외부 정경묘사나 심리묘사를 말한다. 비유적 임지란 배후에 관념을 거느리고 있는 이미지를 말한다. 서술적 이미지는 관념이 없으니까 어떤 것의 수단이 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즉 이미지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으니 이미지가 순수하다. 그러나 비유적 이미지는 배후에 관념을 거느리고 있으니 이미지가 불순해진다. 이미지즘 계열, 즉 피지컬한 계열의 시는 서술적 이미지를 쓰게 되는 것이 그의 물질성에 어울린다. 그러나 <풀>과 같이 관념을 말하려는 의도로 쓴 시는 이미지가 비유적일 수밖에 없다.
비유와 관념을 외연extension과 내포intension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결합이 <풀>에서 아주 원만하게 잘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시가 관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 관념을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은 외연과 내포의 긴장tension이 아주 잘 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과 예술성이 상호보완관계에 있다.
김수영은 1920년대 제임스 조이스나 T. S. 엘리엇의 모더니즘 보다는 그 후의 1930년대 W. H. 오든과 스테판 헤럴드 스펜서와 같은 뉴컨트리파에 더 쏠려 있어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지나치게 시사문제에 개입하여 메시지가 과도하게 노출되면 단지 시의 형태를 빌린 산문(진술)에 지나지 않고, 예술작품이라 할 수 없다.
첫댓글 청마적 인식이란 청마 유치환의 시를 말합니다.
청마의 시는 객관적 상관물 없이 관념적인 언어를 그대로 표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언어들을 그대로 드러내니 자연 비유법이 필요없게 됩니다.
아라스토텔레스는 예술(시. 문학)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모방을 하자면 자연 비유가 필요하고 이때 예술이 탄생한다면 객관적 상관물이 없으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수필도 같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