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계관으로서 은유와 환유
은유는 원래 말하기 기술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는 설득을 위한 도구로써의 능력을 정의한 용어다. 현재에는 수사학을 이런 관점을 넘어 인간 경험의 가장 깊은 차원까지 관통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유할 수밖에 없다면, 수사학은 언어의 본질적 조건임과 동시에 인식론의 한 영역으로 본다.
수사학에 대한 이러한 출발은 니체에 의해 출발하였다. 니체는 진리의 근원을 규명하며 이전까지 소위 진리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을 시도했는데, 이때 진리를 “한 무리의 은유, 환유, 의인화”라 정의하며 인간이 사유하는 진리라는 것 자체가 수사학적 비유의 덩어리일 뿐이라 했다. 서구 형이상학이 오래 동안 축구했던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기원을 상실한 ‘낡은 동전’에 불과할 뿐이라 했다. 진리란 진리에 대해 비유한 담론들을 모아놓은 덩어리라 주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니체는 수사학이 언어의 본질 속에 내포되어 있고, 그것이 진리의 환영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인간이 언어적인 사색을 통해 파악하는 진리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환각을 심어주는 언어적인 환영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언어 기호가 그 근원으로부터 철저하게 멀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수사학이 단순한 언어 도구가 아니라 진리의 본질 영역에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 수사학은 인식론의 문제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을 드러내주는 한 양상으로 파악되었다.
현대 수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곱슨의 수사학을 언급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 수사학은 줄이기 수사학이라 할 수 있다. 전통 수사학은 자신의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 다양하게 나열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수사학은 다양성을 줄여서 가장 근원적인 수사학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찾고자 하는 환원의 방향을 택하고 있다. 이런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슨이다. 그는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이어받아 수사학을 ‘은유와 환유’라는 두 가지의 근원적인 수사학으로 환원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유는 계열체의 축을 따라 형성된 것으로, 유사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수사학이다. 이와 달리 환유는 통합체의 축을 따라 형성되는 것으로, 인접성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 진다. 야곱슨은 이러한 은유와 환유가 각각 시와 산문의 주도적인 수사학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은유가 선택의 축을 따라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뜻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설명하려는 수사학이란 뜻이다. 유사성은 두 사물 사이에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두 사물 사이의 거리를 건너뛰는 전이 운동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동일성이 존재한다.
은유적 관점에서 언어 기호를 바라본다면 하나의 기호는 그 배경이 되는 지시대상과 순리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며, 나아가 물질적인 기호가 영원이나 무한함과 같은 정신적인 관념들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언어 기호가 그 너머 실질 세계와 관계를 맺고 존재함을 인정하는 세계관이며, 이를 확장하면 물질과 정신 사이의 초월적 넘나듦이 가능하다는 세계관이다. 또한 기호나 사물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이나 신을 인정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데리다나 폴 드 만과 같은 해체주의자들은 은유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를 부정하고, 은유가 의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차단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 기호가 진리라는 지시대상과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체계 내의 관계에 의해 유추가 되어 형성되고, 이 유추에 의해 은유가 생성되기 때문에 은유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유추는 사물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유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어 체계가 지니고 있는 매우 긴 연결고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말해 은유조차도 기호 내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연결고리는 이제 해체되어 버리고, 모든 기호는 기호 자체의 체계 내어서만 이해되고 해석된다. 은유과정에서는 이제 하나의 단어로부터 새로운 단어로 대체와 이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대체와 이동의 순환 고리가 계속될수록 은유는 진리로부터 멀어져 점점 더 두꺼운 암시와 추측의 벽이 생기게 되고, 결국은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폴 드 만은 프루스트나 루소 등의 텍스트에 대한 자세히 읽기를 통해 은유의 힘에 대해 새롭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들 낭만주의 교과서들에 나타나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이라는 관념이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때 묘사되는 자연이 사실은 당대의 다른 담론들로부터 기원한 알레고리일 뿐이라고 한다. 즉 언어기호와 실제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려 언어는 더 이상 실제세계를 지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실제로 그렇게 일어나는 합일이 아니라 단지 언어적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도 주장한다.
여기서 환유가 새롭게 부각된다. 전통적인 은유로는 더 이상 언어 기호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환유가 부각된다. 환유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일체화라는 은유적 총체성을 부정한다. 인접성의 원리에 의해 형성되는 환유의 수사학은 우연성과 연속성이라는 기호자체의 속성에 기초함으로써, 의미들 사이의 내적 유사성에 의해 총체성을 지향했던 은유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서게 된다. 환유는 모든 과정들이 기호들 사이의 체계 내적인 과정으로 결정된다. 기호들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지시대상이나 의미와는 관련을 맺지 못한 채 기호 자체 내에서만 맴돌게 된다. 기호들은 이제 본질이나 기원을 지칭하지는 못하고 단지 다른 기호들과의 인접성에 의해 새로운 기호들을 생산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기호의 관점에서 보는 은유와 환유는 이제 단순한 말하기의 기술이 아니라 언어에 대한 본질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기호가 그 너머의 지시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 나누어진 이건 관점을 현대문학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동기를 제공해준다. 서정시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상호 연관시키는 능력, 즉 자와 세계의 동일시이다. 이때 자아는 세계를 자아화시켜 동일성을 달성함으로써 자아와 세계 사이에 서정적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처럼 자아와 세계 사이의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적 세계관을 지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