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ek9: 라스파 - 나하르데비 - 바발다르
Laspa (3264m) - Nahar Devi (2736m) - Babaldar (2420m)
지리산 종주
이번 트레킹 참가자는 13인이다. 그 중 60대가 6인으로 주최자인 거작가님을 제외하면 50%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트레킹만 하더라도 총 일정이 17일 걸리는 장기 여행이라 일반 직장인이 동참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시간 여유가 있는 은퇴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물론 시간과 경비가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체력과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체력과 지구력은 꾸준한 산행이 아니면 길러지지 않는다. 여기 와서 보니 역시 예상대로 내가 제일 체력이 약하다. 동참자들은 모두 국내외 산행과 국토순례길 걷기에 이력이 난 분들이다.
나는 국내 산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2017년 네팔 랑탕 강자라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새로 구입한 등산화를 길들일겸 한라산을 올랐다. 그보다 7~8년 전 겨울에 영실코스로 올라가 돈내코로 내려온 적이 있어 이번에는 성판악 코스로 백록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하염없이 올라갔다가 하염없이 내려오는 한라산 산행은 나와 맞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려서부터 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 입학 후 산악부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가 그냥 조용히 영어공부나 하려고 타임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단체기합을 받고 있는 산악부 신입대원들을 보고 만정이 떨어져 그쪽으로는 생각을 아예 접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군사교육인 교련시간이 있었고 대학 일학년 때는 강제로 11일간 군부대 사단에 들어가 병영집체교육까지 받아야 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그때 받은 군사 교육은 신병교육 그대로여서 2차세계대전 때 미군이 썼던 무거운 M1 소총을 들고 각개전투로 박박 기었다. 그런 일제 군국주의 행태가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행해졌던 야만의 시대였다.
나의 산행다운 산행은 20대 중반인 1982년 여름 지리산 종주였다.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친구 5명이 지리산 화엄사에서 시작하여 4박 5일 걸려 중산리로 내려왔다. 지금 노고단으로 바로 가는 찻길인 성삼재길은 완공 전이라(1988년 완공) 지리산 종주는 항상 화엄사 위 깔딱고개를 넘어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고난의 등반으로 시작되었다. 스틱이라는 장비가 있는지 몰랐고 사용하는 사람을 보지도 못했다.
첫날 노고단에서 야영할 때 50대 초반의 노고단 산장지기 함태식 선생(1928~2013)이 젊은 학생들이 대부분인 등산객들을 지도하고 관리하느라 호통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함태식 선생은 1928년 지리산 아래 전라남도 구례읍 봉남리에서 태어나 1971년 노고단 산장지기로 지리산 지킴이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방치상태였던 무인산장에서 쾌적하고 조용한 산장문화 정착에 진력을 쏟았고, 엄격한 질서를 요구하여 얻은 별명이 노고단의 호랑이였다. 국립공원공단 산장 현대화 방침에 따라 함태식 선생은 16년 노고단 산장 생활을 하산선언문으로 마무리하고, 1988년 피아골산장으로 내려왔다. 그로부터 24년 지리산 지킴이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9년 하산했다. (국립공원공단 역사아카이브)
종주를 무사히 마치고 5일 후 당시 참여하고 있었던 있던 야학의 교사들과 함께 다시 화엄사에서 시작하여 이번에는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친구들과 먼저 간 것은 이 팀을 안내하기 위한 사전 답사였다. 보름만에 두 번 종주하고 나니 두 번 째 백무동 하산길에 무릎이 아파 고생을 했다(그 영향이었는지 10여 년 후 건강검진에서 퇴행성 관절염 진단을 받았다).
그 해는 유난히 태풍이 많이 불어 두 번 다 운행 중 몇 번 비를 맞았다. 당시 지리산에 대피소가 몇 개 없어(노고단산장, 세석산장, 장터목산장이 기억나고 수용인원도 적었다) 야영에 필요한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갔다.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무게지만(석유버너만 해도 엄청 무거웠다) 그때만 해도 젊은 청춘이었으니...
무거운 텐트에 등산화는 허름한 운동화. 제대로 된 국산장비도 나오지 않을 때였다. 유일한 등산 잡지 월간 <산>에는 항상 로우 알파인(Lowe Alpaine) 배낭과 국내 에델바이스 사(현 밀레사)에서 나오는 양모 등산스웨터, 양말 광고가 실려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으로서는 쉽게 사기 힘든 고가 제품이었고 무엇보다고 등산을 자주 할 일이 없으니 굳이 전문 등산장비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고상돈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에베레스트에 오른 해가 1977년이었다. 1982년만 해도 등산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히말라야 등반 뿐 아니라 국내 산도 먹고살기 바쁜 일반인들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산>도 사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서 필요한 부분을 복사해서 보았다. 어떤 때는 아예 한 권을 통째로 복사했다. 도서관이라 그랬는지 복사비가 책값보다 쌌다. '개념도'라는 말을 거기서 알았고 잡지에 나오는 산악사진은 대부분 김근원 선생이 찍은 사진이어서 지금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70세가 넘은 김근원 선생이 인터뷰에서 "이젠 무릎이 아파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지리산에 오를 수 없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산을 사랑한 한 시대의 거장이 퇴장하는 순간이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산>에서 본 내용 중 기억이 나는 기사 하나. 기자가 노고단 함태식 선생에게 꼭 갖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함 선생 왈, "고어텍스 옷 상하 한 벌 좍 뽑아 입고 싶습니다."
그 시절 처음 한국에 고어텍스가 소개되었다. 지금도 고급 기능성 의류라 비싸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1900달러였던 1982년도에 고어텍스 등산복은 웬만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가격이었다.
1980년대 지리산을 종주하는 등산객들이 텐트와 식량과 주방기구를 짊어지고 가다보니 야영지마다 쓰레기가 엄청났다. 노고단이나 세석평전 같은 대피소가 있는 곳을 제외하면 화장실도 없어 각자 알아서 '자연과의 대화'를 해야 했다.
두 번 종주를 마치고 난 후 더 이상 지리산에 오고싶은 생각이 없어질 정도로 야영지 주변이 지저분했다. 아래 사진은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있는 국립공원 50년사 책에 나온 사진으로 내가 갔던 1982년 세석평전의 모습이 딱 저랬다.
세월이 흐르니 지금은 고생보다는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두 번째 세석평전에서 야영할 때 태풍을 만나 고생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리산은 그 후 2000년 여름부터 하동 칠불사 살 때 바로 위에 있는 토끼봉으로 올라가 노고단을 다녀 온 것이 다였다. 그 이전에는 조계산이 주무대여서 조계산을 몇 번 오르긴 했어도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일부러 국내 산 등반을 한적은 없다.
나의 첫 히말라야 트레킹, 그리고...
1983년 졸업하고 그해 여름 아예 산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어느덧 40년!). 그리고 산에 살고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틈나는 대로 뒷산을 오르내리며 다리 근육을 단련했다. 늘 마음에 품고 있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기 위해서였다. 오랜 준비를 마치고 2000년 가을 마침내 꿈에 그리던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다.
그 때 장비구입을 한 서울 회현지하상가 산수산장 사장님의 권유로 구입한 독일 등산화 마인들(Miendl) 중등산화는 거금 32만 원을 주었지만 잘 한 결정이었고 지금까지 마인들 등산화는 나의 인생 등산화로 함께하고 있다.
같이 살던 해인사 원서스님의 추천으로 '창가방'이라는 장비점에서 레키스틱, 로우 알파인 폴리스 티 등 필요한 장비를 추가로 구입했다. 창가방이 히말라야 산 중 하나라는 사실은 훨씬 뒤에 알았다. 그리고 그 창가방이 인도 난다데비 산군 북쪽에 있는 6천 미터급 산으로 등반 난이도가 아주 높은 암벽 산이라는 사실은 최근에 알았다.
백양사 일도스님은 고맙게도 자기의 코오롱 고아텍스 자켓을 선물로 주었다. 나의 첫 히말라야 트레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0년 9월 25일 오후 4시 5분. 몇몇 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방콕행 대한항공 KE651편에 몸을 실었다. 히말라야의 품을 찾아가는 것이다. 동행자는 올 여름부터 칠불사 선원에서 같이 살고 있는 덕문스님.
사실은 봄에 가려고 했다. 지난 겨울 내내 번역했던 <티베트 사자의 서>완역을 기념하여 트레킹도 하고 또 네팔의 티베트 절과 <티베트 사자의 서>의 첫 번역지인 시킴의 룸텍사원을 참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번역 작업이 늦어져서 갈 시기를 놓쳤다. 여름안거가 가까웠기 때문에 부득이 가을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같이 살고 있는 영탄스님과 함께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갈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역시 같이 살고있는 본사 후배 덕문스님이 같이 가기로 했다.
5년 전부터 트레킹을 준비했다. 송광사 교무로 있을 때 매주 목요일에는 조계산 등반을 하며 다리 힘을 길렀다. 지난 여름 지리산 칠불사 운상원에 살면서도 틈틈이 토끼봉을 올랐다. 사실은 선원에 있으면 하루 10시간의 좌선으로 다리가 많이 아프기 때문에 다리를 푸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한 철(석달)을 버티기 힘든다. 다리운동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트레킹은 단기산행과 달리 열흘 이상 걸어야 하는 장기산행이기 때문에 평소 관절이 약한 나로서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반살림 때(석 달 정진 기간의 반이 되는 때) 토끼봉으로 해서 묘향대와 반야봉을 거쳐 노고단까지 9시간의 산행에서도 다리에 크게 무리가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이 생겼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에서도 가장 힘이 든다는 일주(circuit) 코스를 선택했다. 이 코스는 안나푸르나 산군을 한바퀴 도는데 18∼20일 걸리는 장거리 코스다.
다른 곳 보다 특히 안나푸르나를 가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안나푸르나 (8091m)는 네팔 히말라야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산군으로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란 의미이며 인류 최초로 등정된 봉우리라 하여 'Premier 8000'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세계 10위의 고봉 안나푸르나는 서쪽의 깔리 간다키 강과 동쪽의 마르샹디 강에 둘러싸인 수많은 연봉을 거느리고 있는 안나푸르나 산군의 최고봉이다. 안나푸르나 2봉, 3봉, 4봉, 남봉 등의 위성봉과 닐기리, 틸리초, 강가푸르나, 마차푸차레 등 아름다 운 7천미터급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트레킹 하면 안나푸르나를 떠올릴 만큼 안나푸르나는 트레커들의 메카라고 한다. 트레킹 코스도 상대적으로 많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베이스 도시인 포카라에 대한 매력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포카라는 인도여행자들의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여행에 지치면 인도국경과 가까운 네팔의 룸비니를 들러 참배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북동쪽으로 8시간 가면 도착하는 곳이 바로 포카라다. 안나푸르나 산군의 장엄한 모습이 아름다운 페와 호수와 어울려 이 도시의 북쪽을 감싸고 있다.
그 중에서도 네팔사람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산 마차푸차레는 이등변 삼각형처럼 우뚝 솟아 있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산은 6997m로 히말라야 산맥에서는 낮은 편에 속하지만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아직도 전인미답의 산으로 남아 있다.
비행기 안은 동남아시아로 여행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계절이 가을인지라 신혼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많다. 네팔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이 사람들도 모두 네팔로 돌아가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콕의 돈무앙 공항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었다. 나와 덕문스님 그리고 사업차 갑자기 카트만두를 가게되었다는 30대 초반의 젊은 벤처기업 사장.
방콕에 19시 45분 도착하여 바로 20시 30분에 떠나는 네팔 로얄항공으로 갈아타야 한다. 출발의 스케줄은 그렇게 잡았다. 방콕에서 불과 45분만에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것이다. 항공권은 D여행사를 통해 로얄네팔 항공권을 구입했다. 그래도 서울에서 방콕까지는 대한항공을 타고 간다. 2000년 9월의 가격은 왕복 67만 8000원.
오후 7시 50분 방콕 돈무앙 공항 도착. 서울에서 방콕까지 5시간 30분 걸렸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국장으로 가는 중간에 로얄네팔 직원이 우리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있다. 국제선을 타면서 그런 광경을 자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놓치지 않았다. 여행사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초행이었다면 놓쳤을 지도 모른다. 더구나 카트만두행 비행기의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승객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한참 따라가니 카트만두행 탑승구가 나왔다. 탑승자는 서양인 일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탑승수속을 하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를 안내해준 그 직원 왈 짐은 내일 찾아야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짐을 찾기 위해 내일 다시 카트만두 공항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했지만 우선은 카트만두에 도착하는 것이 급선무라 될대로 대라 하는 심정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젊은 사장은 세면도구까지 모두 짐 속에 넣었다고 빈손을 내보이며 울상이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친구가 다시 왔다. 짐을 무사히 옮겼다는 것이다. 우리는 만세를 부르며 땡큐를 연발했다. 그 많은 수화물 중에서 카트만두행 짐을 이렇게 빨리 찾아 옮겨주는 것이 고마웠다. 사실 그렇게 처리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나라가 나라인 만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비행기 안은 여행자들로 만원이었다. 한국인은 우리밖에 없었다. 비행기는 우리 국내선 정도의 크기인데 내부가 우중충한 것이 아주 낡아 보였다. 덕문스님 의자는 등받이가 고장이나 앞뒤로 삐거덕거렸다. 기내에 표시된 글씨가 중국어와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중국에서 중고품을 사서 쓰는 듯하다(알고보니 임대라고 한다). 스튜어디스는 사리를 걸친 인도풍의 아줌마였다.
곧 저녁 식사가 나왔지만 방콕 오는 비행기에서 먹었기 때문에 사양하고 잠을 청했다. 방콕은 서울보다 2시간이 늦고 카트만두는 방콕보 다 1시간 15분이 더 늦다. 그래서 현지시간으로 따지면 2시간 차이지만 실제로는 3시간 15분 비행한다.
낮이라면 오른쪽으로 히말라야 연봉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밤이라 아쉬웠다. 그러나 나중에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에서 방콕으로 올 때는 아침이어서 환상적인 히말라야 산맥을 볼 수 있었다.
기내방송을 통하여 처음으로 나마스떼(안녕하십니까)와 단네밧(감사합니다)을 들었다. 나마스떼는 인도와 같다. 네팔은 인도를 형님 나라로 생각할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두 나라 사람들은 무비자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며 통화 단위도 루삐(약칭 Rs)라는 명칭이다. 인도에서는 안되지만 네팔에서는 인도 루삐를 쓸 수 있다(1 India Rs=1.6 Nepal Rs).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국제선이 취항하기 때문에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뿐 3층 짜리 건물 한 동만 있는 아주 작은 공항이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을 했다. 베트남의 호치민(옛 사이공)시에 있는 탄손누트 공항에 내렸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허허벌판에 조그만 2층 건물 하나 달랑 있었다. 그 때 오랜만에 접한 아늑한 풍경에 감격했다. 서울, L.A, 프랑크푸르트, 간사이 공항 등 현 대화된 대도시의 공항을 보다가 시골집 같은 공항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우리는 지나치게 복잡한 생활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 꼈다.
네팔은 입국장에서 바로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비자 신청을 위해 사람들이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신청양식을 인터넷을 통하여 다운 받아 작성한 터라 바로 심사대로 갔다. 사진까지 알뜰하게 붙였는데 입국장에서 보니 사진을 붙이지 않아도 되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와 환전소에서 50달러만 바꾸고 바로 나왔다. 깜깜한 밤 공항을 나오니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아이도 많다. 밤에 특별한 일이 없으니 그냥 구경온 녀석도 있을 것이고 짐을 들어주고 몇 푼의 팁이라도 얻으려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도 많이 눈에 띠었다.
한 사나이가 접근해왔다. 호텔로 안내하는 호객꾼이다. 택시 기사들도 손님을 태우고 호텔을 가면 커미션을 받기 때문에 호객을 한다. 호객을 하기는 해도 서로 자기의 손님이라는 고집은 하지 않는다. 고개를 흔드는데 또 한 사람이 앞에 나타났다. 우리가 찾던 사람이다. 푼힐 호텔에서 나온 것이다.
여행계획을 짜면서 첫날 때문에 고심을 했다. 출발 당일 카트만두에 도착하려고 하니 밤 10시 30분에 트리부반 공항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공항에서 깜깜한 밤중에 생전 가보지 못한 타멜까지 가서 숙소를 구할 일이 난감했다.
인터넷을 뒤졌다. 마침 visitnepal.com에는 호텔 정보도 있었다. 타멜에 있는 푼힐호텔을 골랐다. 타멜은 카트만두에 있는 배낭 여행자들의 거리다. 방콕에 카오산이 있다면 카트만두에는 타멜이 있다.
푼힐(Poon hill)이란 안나푸르나 산군의 서쪽에 있는 언덕의 이름이다. 말이 언덕이지 해발 3210m나 된다. 이곳에서 일출 때 안나푸르나 산군의 파노라마를 조망하는 것이 유명해서 3박 4일 트레킹 코스이기도 하다.
히말라야 산맥을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른다. 하도 고봉들이 많아 해발 6000m 이하 산들은 산이 아니라 언덕이라 부른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이 사는 곳'.
이름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공항으로 픽업서비스를 해준다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프론트나 객실의 사진도 그럴듯했다. 인터넷을 통해 예약하면 30% 할인도 해준다고 한다.
더블 디럭스가 25달러이니 30% 할인하면 17달러 50센트. 우리 돈으 로 2만원 정도니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홈페이지에 함께 소개된 호텔 중 중간 정도의 가격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하고 확인 메일을 받았다. 그러나 이 호텔은 타멜에 있는 수많은 게스트하우스 중 비싼 편에 속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밤이 이슥하여 타멜 거리의 한쪽에 있는 푼힐호텔 3층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생각보다 허름한 호텔이다. 그냥 게스트하우스라고 했으면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잡하다는 타멜 거리는 조용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겟집들의 간판을 보고 타멜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비로소 네팔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샤워하고 잠을 청했다. 여행의 첫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2000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 카트만두로 출발)
이번 난다데비 트레킹은 나의 24년차 히말라야 트레킹이다. 트레킹 코스로는 18회, 바로 이어지는 산닥푸 트레킹까지 하면 19회 째다. 네팔 14회, 파키스탄 1회, 인도 4회(이번까지)다. 그중 캠핑트레킹은 12번. 이제 어느정도 이력이 났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이 히말라야 트레킹이다.
캠핑도 자주하다보니 이제는 롯지가 편하다. 캠핑 트레킹에서는 주방팀에서 만들어 오는 식음료를 마음껐 이용할 수 있다. 매번 메뉴를 고를 필요도 없고 아침마다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이런 호사가 있을까 싶었다. 밤부터 아침까지 나만의 왕국인 텐트 안에서 왕이 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자주 하다보니 좁은 텐트보다 넓은 공간에 화장실 출입이 편한(딸린 방도 많다) 롯지가 더 편안하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워낙 오지라 어쩔 수 없지만 네팔은 이제 거의 모든 곳에 롯지가 있어 트레킹이 편안한 환경에서 할 수 있다. 단점은 트레커들이 몰리고 찻길이 많이 생겨 호젓한 트레일 분위기는 더 이상 없다는 점.
이제는 오르막이 힘에 부친다(뭐, 24년 전에도 그랬지만). 히말라야 트레킹은 아무리 난이도가 낮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고도를 3천 미터를 이상 올려야 하므로 어느 곳이든 힘든다.
작년 파키스탄 낭가 파르밧 트레킹을 하면서 이제는 슬슬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은퇴는 아니더라도 '명퇴'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릎도 예전같지 않고 체력도 년식이 늘어난만큼 나날이 노화가 진행되는 중이다.
제행은 무상이라, 생로병사 성주괴공은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주 불변의 법칙이니… ♣
오늘도 어김없이 날이 밝았다.
슬슬 철수 준비 중
우리를 위해 수고하는 말을 바라보는 부뜰님
하산 시작
찻길은 편하지만 트레일로는 별로다.
찻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찻집이 나오면 당연히 멈춘다.
이번 트레킹의 명물인 직소폭포. 겨울에는 떨어진 물이 얼어 빙하가 된다.
단체사진 찍기에 딱인 곳
이런 지름길이 오히려 반갑다.
다시 찻길로 내려와
공사중인 현장을 만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시야리에서 밀람까지 찻길이 완공될 것이다.
계속 전진
나하르데비에서 휴식
마헨드라, 난두, 고팔
이런 바위를 깨서 길을 만드는 공사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다시 지름길 찬스. 고도가 점점 낮아진다.
멀리 보이는 보그디야르
마을 앞 다리를 건너
보구디야르 도착. 점심을 먹었다.
현재시간 / 부르푸에서 보구디야르까지 이거리
허공님과 선암님
점심 식사 후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 찻집이 보인다.
찻집 여주인과 딸내미
찻집 앞에서 휴식 중 지나가는 우리 말
이제부터는 산허리 숲길
한참 내려가니 현수교가 나왔다.
강바닥이라 고도가 제일 낮다
그리고 다시 오르막. 말도 힘들어 한다.
오르막 앞에서 잠시 숨쉬기 운동 중
오르막에서 땀을 흘린 후 야영지 조금 아래에 있는 다바에서 휴식.
창 두 병 구입. 해안님과 가이드 나렌드라.
9일만에 바발다르 컴백
저지대라 습하고 비도 조금 내렸지만
트레킹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저녁식사는 팀원들이 가져온 '비장의 음식재료'를 모아 장미님이 실력을 발휘해 맛있는 반찬을 만들었다. 모처럼 고추장과 김치 맛을 보니 반갑다. 창 한 컵은 그냥 거들뿐. (선암님 사진)
▶인도 난다데비 이스트 BC 트레킹 문시야리 에이전시◀
India Nanda Devi East BC Trekking Munsiyari Agency
www.himalyantreks.com (CEO Narendra Kum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