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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10: 바발다르 - 릴람 - 문시야리
Babaldar (2420m) - Leelam (1875m) - Munsyari (2200m)
마지막 일정
트레킹 마지막 날. 다행히 13명의 팀원들 모두 별일 없이 운행중이다. 마지막 일정은 크게 어렵지 않다. 만싱톱까지 300m만 오르면 릴람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이다. 고산병으로 고생하거나 다친 사람도 없다. 노자님만 이틀 전부터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내려오는 중이다.
오래전 지리산 종주 때 받은 충격으로 무릎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나는 트레킹 때마다 항상 무릎보호대를 준비한다. 일종의 보험이다. 다행히 아직 트레킹 중에 한 번도 착용한 적이 없다. 며칠 전 평소 선두 그룹에 가던 노자님이 다리를 절며 후방으로 쳐진다. 무릎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무릎보호대가 있냐고 물어보니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래도 나중에 필요하면 말하시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잠스트(Zamst)라는 제품으로 성능이 좋다고 알려진 제품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얼마 후 밀람빙하에서 내려오면서 노자님이 빌려달라고 했다. 가지고 온 것은 통으로 된 것이라 효과가 덜하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무릎보호대는 만일을 대비해서 지참하는 것이 좋다. 트레킹 중에 반드시 넘게 되는 5천 미터급 고개는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중력을 거슬러 오르기 때문에 힘이 든다. 그러나 쉬엄쉬엄 오르기 때문에 무릎에는 부담이 적다. 고개 정상을 지나 내리막길은 쉬운 편이지만 중력의 '지나친' 도움으로 오르막과 다르게 정신없이 내려오니 무릎 관절에 충격이 가해진다.
무릎보호대는 무릎 주변의 근육을 지탱해주고 관절이 안정적으로 움직이도록 하여 기동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계단을 내려오거나 내리막길을 걷는 등 무릎 부담이 큰 동작에서 효과가 있다. 하중을 분산시켜 주는 등산 스틱은 무조건 필수품이다.
단체 트레킹에서 누군가 아프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네팔은 트레일에 롯지나 마을이 가깝고 길이 좋아 차나 말, 아니면 비상시 헬기를 부를수 있지만 인도나 파키스탄에서는 대부분 그럴 수 없는 오지여서 팀 전체 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빠른 처리를 하지 못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항상 조심해야 한다.
8시 10분 출발. 한 번 지났던 길이라 낯이 익으니 오르막이라도 반갑다. 모두들 힘이 나는지 잘 걸어 만싱톱까지는 불과 4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돌리고 하산. 얼마 후 내려가는 길에 로밍하고 온 분들의 카톡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그 소리는 이제 히말라야 오지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번에 올 때 온라인쇼핑몰에서 이심(e-sim)을 사서 설치했다. 물리적인 유심칩이 필요없이 이메일로 온 큐알(QR)코드를 스캔하여 휴대폰에 설치하면 되니 간단하다. 전에는 물리적 유심을 택배로 받아 휴대폰에 갈아 끼웠는데 이제는 더 편리해졌다.
하지만 트레킹 중에 데이터가 터지지 않았다. 문시야리에서도 왔다갔다 해서 나렌드라의 휴대폰 핫스팟을 몇 번 이용했다. 작년 파키스탄에서도 가이드 에싼의 핫스팟을 이용한 적이 있다. 나중에 간 산닥푸에서는 롯지에서도 연결이 거의 되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 트레킹 때는 유심이든 로밍이든 거의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난다데비 탐험과 등반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가는 하산길. 이제 트레킹을 마친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비록 난다데비 내부 지성소를 가는 길은 막혀 동쪽 베이스캠프 쪽으로만 돌아 보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2004년 네팔 랑탕 트레킹을 하면서 알게된 산악인이자 탐험가인 틸만이 87년 전 세계 최초로 올라갔던 난다데비를 직접 보았으니 충분히 만족한다.
난다데비는 히말라야의 다른 산과 다른 독특한 산으로 난다데비라는 여신의 이름이 바로 산 이름이라는 점이다. 난다데비는 힌두교 최고신 시바의 아내 파르바티의 다른 이름이다. 히말라야 고봉 중에 이렇게 산 이름이 곧 특정 여신의 이름인 산은 없다. 난데데비는 그만큼 우타라칸드 지역에서 최고로 숭상받는 산이다.
틸만이 등정에 성공하고 마르톨리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난다데비를 등정하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말하자 마을사람들은 난다데비 여신을 만났느냐고 물었다. 당시 상황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우리가 인간 거주지로의 귀환 첫날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나는 마을 중앙의 낮은 돌담 아래에 앉아 바람을 피하며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영국 마을에서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지면 사람들이 모이듯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에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의 서쪽 국가에 대한 지식은 나르스파티의 목초지에서 멈췄으며, 그 이상은 소문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 지역 서쪽의 얼음으로 덮인 장벽을 넘어온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 만일 내가 그곳을 날아갔다면 그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조시마트에서 왔고, 그 길로 난다데비를 등정했다고 설명하자 그들은 깊이 감동하며 산 위에서의 경험에 대해 끝없는 호기심을 보였다. 여러 차례 그들은 산 정상에서 여신을 보았는지 물었고, 우리가 눈밖에 보지 못했다고 고백해야 했을 때 그들은 믿지 않았으며, 끝까지 우리가 여신이 거주하는 집을 보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다데비 초기 탐사와 초등
영국의 등반가들이 난다데비 등정을 위해 지성소로 가는 통로를 찾는데 50년 간의 힘든 탐험이 필요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리쉬 협곡이다. 그곳은 출구가 좁고 깊은 협곡이어서 출입이 매우 어렵다. 다른 루트는 어려운 고개들을 넘어야 하는데 그 중 가장 낮은 고개가 5,180m다. 휴 러틀리지(Hugh Ruttledge)는 1930년대에 세 번 등반을 시도했으니 매번 실패했다.
그는 타임즈지(The Times)에 보낸 편지에서 "난다데비는 그녀의 헌신자들에게 자신의 기술과 인내력을 뛰어 넘는 입문시험을 실시하고 있으며, 단지 난다데비 지성소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북극에 도달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썼다.
1934년 영국 탐험가 에릭 쉽턴과 틸만은 세르파 동료인 앙 타르카이, 파상, 쿠상과 함께 마침내 리시 협곡을 통해 지성소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1936년 영-미 합동원정대의 난다데비 등정 성공은 1950년 안나푸르나(8,091m) 등정에 성공하기까지 인간이 오른 가장 높은 산이었다. 등정에는 또 이전의 높은 고도에서 시도했던 것보다 더 가파르고 지속되는 지형이 포함되었다.
원정대는 정상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는 콕스콤 릿지(Coxcomb Ridge)라고도 알려진 남쪽 능선을 타고 올랐다. 정상에는 틸만과 노엘 오델이 올랐다. 원래 찰스 휴스턴이 오를 예정이었지만 심각한 식중독으로 틸만으로 교체되었다.
유명한 산악인이자 산악 작가인 카터(H. Adams Carter)도 원정대에 있었는데, 원정대 규모는 작고 가벼운 장비로 유명했다. 등반가는 단 7명 뿐이었으며 고정로프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6,200m 이상에서 셰르파들의 지원도 없었다. 등정에 참여하지 않은 에릭 쉽튼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뛰어난 등산 업적"이라고 말했다.
그 후 1957년과 1961년 인도원정대의 시도는 실패했다. 난다데비의 두 번째 등정은 1964년 콕스콤 루트를 따라 오른 꾸마르(N. Kumar)가 이끄는 인도팀에 의해 달성되었다.
후속 등반
어려운 새 노선인 북서부 부벽으로의 등정은 1976년 13명으로 구성된 미국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국인 존 로스켈리, 짐 스테이터스, 루이스 라이차르트 3인이 9월 1일 등정에 성공했다. 원정대는 라이차트, 카터(1936년 등반) 및 1963년 에베레스트의 웨스트 릿지를 등반한 언소울드(Willi Unsoeld)가 공동으로 이끌었다.
난다데비 이름을 따서 지은 언소울드 딸인 난다데비 언소울드는 이 원정에서 죽었다. 그녀는 어프로치 2일 째부터 발생한 설사와 홍반 그리고 서혜부 탈장으로 고통을 받았고 거의 5일 동안 7,200미터에 있었다.
1980년에 인도 육군 공병대팀은 실패했다.
1981년에는 인도군 낙하산 연대의 원정대가 이어졌으며, 이들는 두 봉우리 등정을 동시에 시도했다. 원정대는 등정 시도 전 사르손 파탈의 고지대에 난다데비 언소울드의 추모비를 세웠다. 등정은 성공했으나 모든 등정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1993년, 인도 공병대 40명으로 이루어진 팀에 특별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원정의 목표는 생태 조사를 수행하고, 이전 원정에서 남겨진 쓰레기를 청소하고, 정상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 팀에는 인도 야생동물연구소, 살림 알리 자연사 및 자연사센터, 세계자연기금, 히말라야 환경 및 개발을 위한 고빈다 발라브 판트 연구소의 야생 동물과학자 및 생태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원정대는 종합적으로 생태를 조사하고 포터와 헬리콥터로 1톤 이상의 쓰레기를 수거했다. 또한 아민 나야크, 아난드 스와루프, 샤르마, 디다르 싱 및 바트 5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보존
1974 년에 외국인 등반가, 트레커 및 지역 주민들에게 지성소를 재개 한 후, 깨지기 쉬운 생태계는 곧 화목 벌목, 쓰레기 및 가축방목이 일어났다. 심각한 환경 문제는 1977년 초에 나타났으며 지성소는 1983년에 다시 문을 닫았다.
현재 난다데비는 1982년 인도정부가 선언한 난다데비 생물권 보존(난다데비 국립공원 포함)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1988년, 난다데비 국립공원은 "인류의 공통 유산에 대한 탁월한 문화적 또는 자연적 중요성을 가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체 지성소와 주 정상 및 인근 봉우리에 대한 내부 접근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동봉인 수난다데비는 동쪽에서 계속 열려 있으며 표준 남쪽 능선 루트로 이어진다.
2001년 난다데비선언에 반영된 지역 사회의 지속적인 캠페인 이후, 난다데비의 핵심 구역이 2003년에 제한적인 생태 관광 활동을 위해 열렸다. 2006년, 캠페인은 4개국 여성 트레커들을 초대해 국립공원에서의 첫 트레킹을 했다. 이어서 문화 생존 및 지속 가능한 생계를 위한 캠페인은 이제 난다데비 국립공원 트레킹으로 디자인 되었다.
난다데비 국립공원의 생물 문화 다양성에 대한 해석 센터가 공원의 관문인 라타(Lata) 마을에서 개발 중이다. 난다데비 국립공원 트레킹은 니티-말라리(Niti-Malari) 고속도로의 조시마트(Joshimath) 마을 상류 25km 떨어진 라타(Lata) 마을에서 시작된다. 5월에서 10월 사이에 최대 500명의 트레커가 핵심 구역에서 다란시(Dharansi)까지 입장 할 수 있다.
CIA 난다데비 플루토늄 미션(Plutonium Mission)
난다데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시대를 맞아 이상한 방문자들을 맞게 된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CIA는 인도 정보국(IB)과 협력하여 난다데비 정상에 원자력 원격 측정 릴레이 청취 장치를 배치하려고 시도했다. 이름하여 난다데비 플루토늄 미션( Nanda Devi Plutonium Mission).
1965년에는 펜타곤(미국방성)과 CIA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우려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고 미국은 중국의 어떠한 위협에 대응할 정보 자료가 없었다. 중국은 비밀스러운 시설에서 핵실험을 진행했다.
두 해 전에 미국 공군 장교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펜타곤에게 힘든 셰르파들을 고용하여 정상에 원격 감지 기지를 설치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문제가 있었다. 에베레스트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으므로 에베레스트에 설치할 수는 없었다.
미국은 인도 당국과 협의한 후, 인도 영토 내에 있는 난다 데비 정상에 원격 감지 기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1965년 10월, CIA와 인도 정보국은 이 작전을 시작했다. 구성원들은 8~10피트 높이의 안테나, 두 개의 송수신기 세트, 플루토늄으로 작동하는 방사성 열전소 발전기 및 그의 일곱 개의 플루토늄 캡슐을 설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팀이 캠프 4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가 몰아쳤다. 팀 리더 맨모한 싱 콜리는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 장치를 바위 틈새에 걸쳐 고정시키고 기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6년 봄, 인도 탐사대가 장치와 플루토늄 캡슐을 회수하기 위해 캠프 4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탐사대는 발전기와 캡슐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 장치를 회수하기 위해 미국 산악인 팀이 모집되었다. 팀원 중 한 명인 데이브 딩먼은 중성자 탐지기로 난다데비 지역을 스캔했지만 플루토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 장치와 캡슐이 산사태로 인해 아래로 옮겨졌다고 결론지었다.
1967년에는 CIA는 난다코트(Nanda Kot) 정상 근처에 핵 추진 신호 장치를 설치했다. 이 장치는 몇 달 동안 작동했으며, 당시 중국이 장거리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광활한 미지의 세계: 미국의 첫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책의 저자 브로튼 코번은 인도 정보국이 봄에 탐사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비밀리에 그곳으로 올라갔고, 아마도 그것을 연구하고 플루토늄을 수집하기 위해 그 장치를 회수했다고 주장한다.
임현담님의 책 <가르왈 히말라야 2> 에도 이 일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65년 미국의 CIA가 파견한 14명의 산악인이 난다데비 정상을 향해 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심한 눈보라로 인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온 장비를 바위 사이에 남겨 두었다.
힐러리 경과 함께 초모랑마, 즉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텐징 노르가이의 일대기를 서술한 <텐징 노르가이>에 일부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1964년 10월 중국은 시장성의 롭 노르 핵실험장에서 최초의 원폭실험에 성공했다. 린든 존슨은 소련 상공에 떠 있는 미국 보유의 인공위성 몇 기로 중국의 핵무기 계획을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그에 따라 CIA는 인도와 티베트 국경 산맥에 원자력 시설을 설치하여 롭 노르 핵실험을 감시한다는 성공할 것 같지 않은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가장 높고, 중국에 접근하기에 정치적으로 가장 편리한 봉우리로 난다데비를 선택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난다데비 정상에 125파운드의 스파이 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등반대였다.
14명의 등산가가 선발되어 훈련을 받았고, 그 중 9명이 최종적으로 네 가지 임무를 지니고 인도에서 작전을 펼쳤다. 미국의 CIA에 해당하는 인도 중앙 조사국(CBI)이 후원을 받은 인도 등산가 네 사람이 미국팀과 합류했다. 이들은 1968년에 난다데비로 원정해서 과업을 완수했다.
여기까지 보면 이들의 작업은 착실하게 수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1965년 첫 원정에서 플루토늄 238을 채운 SNAP 원자력 발전기가 난다데비 정상 능선 600미터 아래에 놓였으나, 결국 1966년 눈사태로 매몰되었다. 뒤 이은 원정들에서의 회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발전기는 그곳에 남아 점차 부식되면서 히말라야 이 지역에서 발원하는 강의 하류에 사는 수백만 명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었다.
1967년 두 번째 원정에서 도청장치가 난다코트 근처에 설치되어 눈과 얼음에 파묻힐 때까지 1년 이상 작동했다. 결국 이러한 임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우주에서 중국의 핵에너지 증강을 지켜보기 위한 새 첩보위성이 떠맡게 되었다.
등산계에서는 텐징 노르가이가 이 작업에 참여했느냐,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고, 직접 참여했거나 아니면 자문을 통해서라도 관여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한 상태다.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의 전장 혹은 전선의 개념으 로 본 결과다. 성산 난다데비까지 불똥이 튀었다. 원자력으로 가동되는 발전기는 아직 회수하지 못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난다데비에서 분실된 핵 캡슐의 존재로 인해 홍수와 얼음 형성이 증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2021년 난다데비 빙하가 터져 대홍수가 일어나 200여 명 이상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일어났다.
2021년 난다데비 빙하 홍수
2020년 봄에 가기로 한 난다데비 트레킹은 그해 1월 전세계에 코로나가 발생하여 무기 연기 되었다. 처음에는 5월 쯤이면 진정되지 않을까 하는 낙곽전적인 희망을 가졌으나 전염병은 점점 전 세계에서 확산되어 해를 넘겼다.
그러던 중 2021년 난다데비에서 큰 빙하가 떨어져 발생한 빙하 홍수가 발생했다. 차몰리(Chamoli)재해라고도 알려진 우타라칸드 홍수는 2021년 2월 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난다데비 국립공원 내부 지성소 서쪽 난다군티 쪽에서 발생했다.
홍수는 론티 봉우리에서 떨어져 나온 큰 암석과 얼음 눈사태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차몰리 지역, 특히 리쉬강가 강, 다울리강가 강, 그리고 차례로 갠지스 강의 주요 상류인 알라크난다에서 홍수를 일으켰다. 이 참사로 200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는데 대부분은 타포반 댐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한달 후 네팔리타임스(nepalitimes)는 난다데비 빙하 홍수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도했다.
난다데비 봉우리 암석 붕괴와 해안선 근처의 퇴적물을 보여주는 큐브사트(CubeSat) 위성 이미지. 홍수가 다운스트림 22km 지점에 위치한 타포반 수력 발전 프로젝트 사이트에 도달하기 직전의 IST 10:30에 찍혔다. 점선으로 표시된 검은색 선은 강 계곡의 인접한 비탈면에 퇴적된 퇴적물을 보여주며,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은 암석 붕괴를 나타낸다. 이미지: ICIMOD
인도 히말라야의 차몰리 지구에서 대형 급류가 발생한 후 한 달 이상이 지난 지금, 과학자들은 이 사고의 원인이 기후 변화에 의한 빙하 호수 폭발만이 아니라 암석면의 결함이었다고 말한다. 초기 보도에는 2월 7일 리쉬강가를 따라 내려가며 4개의 수력 발전소를 파괴하고 2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물과 퇴적물의 홍수가 빙하 호수 폭발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고 추측되었다.
그러나 재해 전후의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난다데비(7,816m) 산군의 론티 빙하에는 호수가 없었고, 빙하상 연못이 얼어붙은 겨울에 재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자들은 2월 7일 오전 10시 30분에 론티 피크(Ronti Peak) 표면의 폭 500m 부분이 해발 5,500m 높이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 빙하에 엄청난 힘으로 떨어졌다고 결론지었다. 약 2,200만 입방미터에 달하는 낙석의 운동 에너지는 2016년 이전 눈사태로 인한 얼음 퇴적물도 녹였다.
2021년 난다데비 빙하 홍수 발생지역을 구글어스에서 찾아보았다. 빙하 홍수는 난다데비 원정대가 출발하는 조시마트 쪽으로 내려가던 중 타포반 댐 건설현장에서 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다.
릴람에서 문시야리로
12시 20분 트레킹 시작점이자 마침점인 릴람에 도착했다. 찻길 공사를 하기 전에는 만싱톱 고개를 넘지 않고 고리 강가 강을 따라 나 있는 계곡길을 이용했다. 그때는 문시야리에서 트레킹을 시작하여 릴람까지 하루 일정이었다.
10일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난다데비 이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잘 마쳤다. 짐을 정리해서 차에 싣고 문시야리를 향해 12시 50분 출발. 가는 도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만일 원래 일정대로였다면 지금쯤 어제 점심을 먹었던 보구디야르 지나면서 비를 만나 우중 산행을 했을 것이고 가뜩이나 습한 바발다르에서 캠프 설치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이번 트레킹은 정말 날씨운이 좋았다. 이전에 갔던 영상을 보면 난다데비를 제대로 본 팀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주로 봄이나 여름에 간 탓도 있지만 요즘에는 가을도 안심하지 못한다. 2003년 4월 하순에 출발했던 임현담님 팀도 강하르에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설을 만나 난다데비를 보지 못했고 하산길에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밤새 눈이 퍼붓는다. 눈이 사각거리며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내일 아침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져 좋겠다는 초저녁 생각은 차차 걱정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머니 난다데비의 심상치 않은 샥티다.
결국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텐트가 주저앉으면서 한밤중에 서둘러 대피하게 된다. 어두운 밤에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도리어 위안이 된다. 이런 경험들, 텐트 하나 들고 떠났다가 아무 사건 없이 산놀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일보다, 가끔 겪어내는 시련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아름다운 경험으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아니라 '피한다는 생각조차 일으키지 않고 내내 즐겨라'가 산꾼들의 신조다. 또한 '오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여라'는 까르마의 흔적을 지우려는 구도자들의 내규다. 받아들이면 대상에 관한 긴장은 줄어들며 그렇게 내게 일어난 현상은 우주의 힘의 일부임을 안다.
어두운 텐트 안에서 입에 손전등을 물고 슬리핑백을 다시 꾸리고, 짐들을 다시 배낭 안에 넣으면서 멀지 않은 돌집으로 대피준비를 한다. 이렇게 폭설을 당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몫은 물론이고, 신의 몫이 더해졌으니 당연 히난다데비 샥티의 힘이 관여되었다.
며칠 전 마팡(Mapang)을 지날 무렵 많은 나비들이 커다란 눈송이처럼 휘날리며 날아다녔다. 계곡 곳곳에 피어난 엉겅퀴 과 식물에 달디 단 꿀이 듬뿍 있었을까.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는지 하얀 나비들 덕분에 계곡은 하얀 떨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침에 온 세상은 은빛으로 변했다. 사방은 높낮이로만 차이가 날 뿐 공 평하게 한 가지 색으로 두꺼운 옷을 입었다. 순백, 순은의 세상이 지난밤의 급박했던 폭설을 잊게 만든다. 대피하는 동안 그대로 방치했던 텐트들은 이미 무너져 두터운 눈 밑으로 숨었다. 히말라야에서 비단 바라보는 봉우리뿐 아니라 사방이 모두 은색일 때는 어떤 신비에 젖어든다.
아침식사를 마치자 계곡을 채우기 시작한 구름으로 다시 궂어지기 시작 한다. 몬순이 올 계절이 아닌데 이렇게 구름이 무성하며 계곡이 어둑해진다. 현지 사람들은 난다비의 안개는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고, 구름은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커튼을 친 것이라고 한다. 정말 어머니가 여름옷을 갈아입기 위해 부산한 것일까.
마누가 밧줄을 걸었다는 난다데비를 가까이 보기 위해서 해발 6천630 미터의 데오도미아(Deodomia) 봉 아래의 길을 올라야 한다. 서둘러 오르는 언덕이 가파르기 짝이 없다. 잠시 사이 습한 냉기가 계속 뒤편에서 미친듯이 몰려오며 사방은 먹구름이다.
키 작은 관목들이 빗물에 후드득 소리를 낸다 싶었더니 순식간에 빗줄기가 굵어진다. 가야 할 능선 위로 쉬지 않고 번개가 번쩍 번쩍 떨어져 마치 대홍수 전날과 같은 분위기다. 날씨에게 좋은 하늘을 부탁하기에는 여의치 않다. 심상치 않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
번개가 떨어지는 언덕에서는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곳은 구름이 없어 풍경들이 손금처럼 훤히 내려다보인다. 해발 3천420미터의 밀람(Milam) 마을이 을씨년스럽다. 이 마을에서 개울을 건너 덩(Dung)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진행하다가 높은 고개를 몇 개 넘어서면 건장한 사내 가슴처럼 드넓은 티베트 고원이 기다린다.
이곳 트레킹 루트는 냉전이 남긴 흔적이 곳곳에 있다. 한때는 잘 나가던 마을들이 흐르는 시간 안에 폐허로 변했다. 돌지붕은 무너지고 기둥들이 내려앉았다. 그나마 돌담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한 정도다. 티베트와 인도와의 오랜 교역로가 국경 단절로 인해 사라져 한때 수많은 말과 노새들이 거닐었을 법한 길들은 의미를 잃고 이제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냉전에 의한 단절은 혈맥을 끊는 일과 동일하다.
마을 사람들도 살길을 찾아 여름 한 철이면 고랭지 채소와 약품 재료로 쓰는 작물들을 경작한다. 다행히 최근 인도-중국 간의 해빙으로 인해 인도 정부는 이 길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 다시 노랫소리와 말방울 소리가 울려 퍼질까. 폐허의 마을들에서, 끊어진 길 위에서 인간의 욕심을 읽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하산하는 길은 몇 구간에서 끔찍하다. 산사태로 왔던 길은 사라지고 강 위에 다리처럼 놓여 있어 쉽게 건널 수 있었던 설교들은 이미 주저앉았다. 길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험한 언덕길로 지그재그 우회하고, 무너질까 걱정스러운 다리들을 연이어 건넌다.
얼음물 같은 매섭고 차가운 비가 내리는가 하면 산사태를 곧바로 일으킬 수 있는 진흙이 흘러내리는 협로를 통과한다. 발을 잘못 디뎌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끝장인 설사면도 계속 기다린다. 모든 것이 찰나지간의 자리다. (<가르왈 히말라야 2>에서 부분 발췌)
난다데비로 오가는 길은 쉽지 않다. 계곡이 무척 깊고 험하다.
절벽 끝에 간신히 붙어 있는 길을 따라가야 목적지에 간신히 이른다.
급류 역시 조심스럽게 건너야 한다. 죽음이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길에서 한 발 옆으로 내딛으면 곧바로 야마를 따라 이승을 떠나야 하니
인간의 길처럼 산에서의 길, 참으로 위태롭다.
트레킹을 마치다
비를 뚫고 오후 2시 문시야리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열흘 만에 뜨거운 물 샤워를 하니 개운하다. 샤워하면서 그동안 미루었던 빨래를 했다. 저녁 식사는 원래 호텔 아래 있는 나렌드라의 집 앞 공터마(처음 출발 때 장비점검 하던 곳)에 텐트를 치고 쫑파티를 하려고 했지만 폭우로 말미암아 호텔 식당으로 변경했다. 복무를 마친 말과 마부들은 릴람에서 헤어졌고 다섯 명의 스태프들이 남았다.
네팔에서는 캠핑 트레킹을 마치는 날 저녁은 모두 모여 흥겨운 파티를 연다. 그동안 수고한 스태프, 포터들에게 팁을 주고 음식도 잘 준비하라고 가이드에게 따로 현금을 준다. 이른바 음주가무 시간이다.
처음 쫑파티를 본 때는 2004년 11월 20일, 혼자 가이드와 포터를 대동하고 갔던 헬람부-랑탕 트레킹 첫날이었다. 카트만두에서 순다리잘까지 택시를 타고 트레킹을 시작하여 치소빠니까지 갔다. 보통은 샤브루베시에서 시작하여 컁진곰빠를 갔다가 고사인꾼드-로우레비나라-헬람부로 내려오지만 나는 그때 호주의 이안(Ian)이 쓴 가이드북을 구입하여 보고 그가 간 루트를 따랐다.
그날 저녁 2층에서 잠을 청하는데 아래층에서는 트레킹을 마친 단체팀의 신나게 여흥을 즐기고 있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북에 맞춰 춤과 노래를 부른다. 네팔 히말라야에서는 쫑파티 하는 날은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용서가 된다. '나는 언제 저런 캠핑을 해보나' 하고 부러워했는데 2년 후인 2006년 어퍼 무스탕을 시작으로 네팔에서만 7번 캠핑트레킹을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신나는 쫑파티를 했다.
인도나 피카스탄 쫑파티는 싱겁다. 그냥 팁을 주고 함께 식사하는 정도다. 파키스탄은 음주가 금지되어 있어 가무를 즐기기엔 무리가 있지만(그래도 음료수만으로도 흥겹게 잘 즐긴다), 인도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나게 노는 쫑파티 개념이 없는 듯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1949년 틸만 이후 네팔에서 크게 발전했다. 캠핑 트레킹의 경우도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네팔에서의 캠핑 트레킹은 어떤 여행사를 택하더라도 대동소이하다.
저널리스트이자 트레킹 전문가인 레이놀즈(Kev Reynolds)의 책에는 그 일정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마나슬루가 개방된 1992년 처음 마나슬루를 방문했고 1996년 마나슬루 트레킹 가이드북을 쓰기 위해 다시 방문한 후 <MANASLU, A Trekker's Guide>라는 안내서를 썼다. 마나슬루 트레킹 구간별 설명이 잘 되어 있는 가이드북이다.
그가 쓴 책으로 마나슬루 외에도 그는 캉첸중가,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랑탕 헬라부 & 고사인꾼드 트레킹에 관한 'A Trekker's Guide' 시리즈가 있고, <Walking in the Apls> 등 유럽의 여러 산을 트레킹 하는 안내서도 썼다. 그의 책에 나와 있는 네팔 캠핑 트레킹의 일과는 다음과 같다.
6:00 트레커의 텐트로 한 잔의 차가 배달되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6:15 텐트 입구로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가 도착한다.
7:00 아침식사. 구릉지역에서는 보통 식당텐트가 이미 철수되기 때문에 야외에서 먹고 추운 고산지대에서는 식당텐트에서 바쁘게 먹을 것이다. 아침식사는 보통 뽀리지 또는 시리얼, 계란과 짜파티, 홍차, 커피 또는 핫초코릿 티로 구성된다.
7:30 트레킹 출발.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멋진 때이다. 공기는 시원하고 빛은 순수하고 새들은 지저귄다. 사진 찍기 아주 좋다. 오전 중 당신은 짐을 내려놓고 길가에서 쉬거나 차를 마시는 포터들을 추월한다. 주방팀은 당신을 추월한다. 만일 그들이 당신을 추월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너무 빨리 걸은 것이다. 당신은 점심을 굶을지 모른다!
11:00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춘다. 스태프들은 보통 물이 가까이 있고 경치가 좋은 곳을 선택한다.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뜨거운 과일음료가 담긴 찻잔을 받는다. 쉬는 동안 책을 읽거나 여행기록을 쓰고 경치를 감상한다. 점심은 종종 두 코스의 음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들면, 참치, 감자볶음, 양배추샐러드와 짜파티, 그리고 디저트로 통조림 과일과 각종 차가 따른다.
13:00 다시 트레킹을 한다. 다시 길가에 쉬고 있는 포터들을 추월하고 주방팀과 세르파들에게 추월당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길을 잘못 들었거나 너무 빨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캠프를 지나친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서다는 세르파 한 사람을 당신 앞에 보내 갈림길에서 기다린다.
16:00 캠프에 도착. 몸을 씻고 빨래하고 차와 비스킷을 먹으며 쉰다. 포터들이 마침내 당신의 가방과 침낭과 텐트를 지고 나타난다. 밤에 텐트 안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헤드랜턴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두라.
18:00 저녁식사를 하며 내일의 일정을 설명하고 의논한다. 저녁은 고정된 세 코스의 음식으로 수프, 닭, 밥과 야채, 과일, 홍차, 커피 또는 핫초콜릿 차가 나온다.
20:00 이를 닦고 잔다.
이 얼마나 멋진 휴가인가!
위 일정 중 아침 세숫물과 점심식사 과정은 오직 네팔 캠핑 트레킹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오면 세숫대도 없고 점심은 차디찬 팩런치로 바뀐다. 네팔은 주방팀으로 4명이 기본이다. 이들은 아침 식사 후 음식재료와 취사도구를 나누어 지고 점심 먹을 장소로 먼저 이동하여 식사를 준비한다.
처음 라다크 잔스카르 트레킹 때 아침식사 후 점심으로 팩런치를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미 네팔 캠핑 트레킹에서 위와 같은 경험을 몇 번 한 상태여서 팩런치 점심은 전혀 예측 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네팔이나 파키스탄은 운행 중 점심 먹을 곳에 물이 없어 음식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도와 파키스탄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오지라는 뜻이다.
네팔은 웬만한 곳은 롯지가 있어 캠핑을 할 코스도 이제 별로 없다. 그래도 혜초여행사 같은 단체 패키지 트레킹의 경우 잠은 롯지에서 자더라도 식사는 주방팀이 따라가서 직접 만들어 준다. 그것도 한식으로. 음식에 민감한 사람은 인도나 파키스탄 트레킹도 그런 패키지를 따라가면 좋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상품 가격이 조금 비싸고 코스도 제한적아라는 점이 단점이다.
스태프들에게 팁을 주고 주방장 난두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었다. 캔맥주도 하나씩 배당되었다. 알고보니 난두는 문시야리 시내에서 자기 식당을 운영중인 요리사 겸 사장이다. 이번에 특별히 나렌드라의 요청으로 우리팀 주방장으로 모셨다. 팀원들이 돌아가며 간단한 소감을 말했고 나렌드라도 감사의 인사말을 했다.
좋은 날씨, 아무런 사고 없이 난다데비를 친견하고 트레킹을 잘 마쳤다. 20년 전 시작된 난다데비의 인연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으니 다른 분들과는 다른 감회를 느낀다. 난다데비 여신에게 감사를....
다시 이곳을 올 일이 있을까?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아마 힘들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비록 접근에 제한이 있지만 난다데비 국립공원 내부로 향하는 트레킹을 가고 싶다. 1934년 틸만과 에릭쉽턴이 발견하고 1936년 영-미 합동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한 난다데비 지성소 가는 길이다. ♣
텐트를 걷고
말님들도 아침 식사 중
8시 10분 마지막 일정 출발
출발 45분 후 만싱톱 도착
고개를 넘으면 이제 쉬운 산허리 내리막길이다. 첫날 고생 엄청했던 길. 이제 웃으며 내려간다.
10시 20분 휴대폰이 터졌다.
아직 갈길이 멀다.
11시, 다바 도착. 점심 먹고 한참 쉬었다. 잠깐 비가 내렸다.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거의 다 왔다. 아래 대기중인 차들이 보인다.
12시 20분 릴람 도착. 먼저 내려간 노자님의 하이파이브 환영.
짐을 차에 옮겨 싣고 12시 50분 출발
문시야리 가는 중 폭우가 쏟아졌다. 하루 단축한 덕분에 다행히 마지막날 우중산행을 피했다.
오후 2시 호텔 도착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
2층 방에서 본 바깥 풍경.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비.
오후 4시 비가 그쳤다. 판차출리에는 눈이 내렸다.
열흘만에 샤워하고 밀린 빨래를 몽땅했다.
오후 5시 판차출리에 황금빛 석양이 물들고
원래 호텔 아래쪽 나렌드라 집 앞 공터에 식당텐트를 치고 쫑파티를 하기로 했으나 폭우로 취소하고 호텔 식당으로 변경. 수고한 스태프들에게 팁을 주는 팀 리더 거작가님.
트레킹을 잘 준비해 준 가이드 나렌드라의 인사말
주방장 난두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 난두 씨는 시내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마지막 만찬. 트레킹을 잘 마쳐서 모두 즐겁다.
2017년 나르-푸-틸리초-메소칸토라 트레킹 마친 후 좀솜에서 쫑파티. 네팔 캠핑 트레킹은 이런 낭만이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없는 풍경이다. 정전이 되어 태양광 전기를 급히 연결했다. 실내가 어두컴컴했지만 여흥을 즐기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Jomson, 2017 Nar-Phu-Tilicho-Mesokanto La Trekking
▶인도 난다데비 이스트 BC 트레킹 문시야리 에이전시◀
India Nanda Devi East BC Trekking Munsiyari Agency
www.himalyantreks.com (CEO Narendra Kum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