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나는 성서에 마음을 기울이고, 성서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맞부딪친 사실은 이러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고, 어린아이에게는 환히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었습니다. 입구는 초보자가 보기에 낮지만 그 속은 높아서 더 깊이 탐구하는 자에게는 산과 같은 어려움으로 신비에 싸여 있는 그런 사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머리를 굽히고 겸손하게 그 뒤를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하는 나의 이 말들이 그때 성서를 읽었을 때는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마르쿠스, 트리우스, 키케로의 장중함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오만함은 성서의 겸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의 예민함도 그 안쪽 깊은 속을 모두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성서야말로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처럼 구성되어, 그 의미는 어린이와 함께 성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린 초심자가 되기를 멸시하였고, 교만으로 가득 차서 나 자신을 성숙한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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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겸손한 마음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며 성령의 깨우침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성경은 어린 아이에게는 쉬운 책이다. 하지만 깊은 이해를 통해 얻는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통해서 진리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할 때 가능하다. 인간에 대한 성경의 최총 목적은, 우선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과의 어떻게 관계를 맺어 왔는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자연•만물•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온전히 변화하는 삶에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 약속의 본질을 밝히시고 궁극적으로 그약속을 완전히 성취함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데 있다. 성경을 읽는 독자는 성경을 대하는 방식이 건강한지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품고 있는 역사, 약속, 관계 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한 부분만 뚫어지게 보아서도 안 되고 물 흐르듯 훑어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성경에는 특정 부분들이 서로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부분만 읽다보면 편견을 면할 길이 없고 분량 채우기식 통독은 피상성을 면할 길이 없다. 또 성경 말씀이 인간 전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함께 주관적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전자에만 빠지는 경우 신앙은 잃고 신학만 남는 경우가 많고, 후자에만 빠지면 주관주의적 이단에 빠질 염려가 있다. 또한 파스칼의 말대로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고, 반면에 지나치게 정신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모두 한국 사회에서 성경 독자나 해석자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들이다.
성경은 이해나 성찰만 요구하는 책이 아니다. 이해만 요구했다면 철학서에 불과했을 것이고 성찰만 요구했다면 평온을 줄만한 수양서에 불과했을 것이다. 성경은 온전한 변화, 곧 생명의 속성이 변화되는 거듭남과, 그것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변화, 곧 거룩하고 경건하게 되어 나아가게 하는 변화(성화)까지 요구한다. 성화과정에는 신에 대한 관계 뿐 아니라 인간 관계도 소중히 여길 것을 요구한다. 물질과의 관계는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한 것은 바로 이 관계의 우선 순위를 이해하고 실천한 사례가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관계의 순서를 잘못 선택해서 실패한 사례로 보여진다.
성경에 대한 참된 이해는 실천에 종속되어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보듯 성경은 참된 실천이 참된 이해임을 가르쳐 준다. 고린도전서에서나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의 중요성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은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야고보서에는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실천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성경은 열매로 그 뿌리를 안다고 가르친다. 결국 어둠의 열매는 시기와 분쟁, 타락과 사망이지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한다. 인간의 철학으로 말한다면 오캄이 세운 면도날의 원리와 같다. 곧 오캄의 면도날은, 진리에 대한 복잡한 논의가 있을 때일수록 단순하게 접근해야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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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진의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이렇게 진리에 대해 말하는 나는 얼마나 진리에서 머나먼 곳에서 헤매고 있는지? 그것은 여전히 육체가 지닌 불건전한 욕망 때문이다. 욕망은 삶의 활력에 필요하지만 자주 진리를 가려 어둡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