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는 시인 황지우의 동생이다. 문학비평을 공부할 때 접한 작품들 중에는 눈에 띄는 여러 편의 시가 있었다. 그중에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매우 신선하고 감동 있게 읽은 시다. 황지우 시인은 한예종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고 이명박 정권의 표적감사에 시달리다 사표를 냈다. 최근에는 보수로 돌아서서 비판을 받고 있긴 하다. 동생 황광우는 한때 유신반대 표현으로 강제징집되었고, 광주 민주항쟁 때 저항운동으로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서울대 철학과에서 철학을 전공한 문필가다.
황광우의 능력은 서울대 철학 전공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독서력에 기반한 탁월한 글쓰기 능력에 있다고 본다. 연세대 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정과리의 말이다. 대학 신입생 제자들이 들어 왔는데 한 학생은 보통의 문학적 글쓰기의 수준을 뛰어 넘는 탁월한 논리와 추리력, 표현의 적절성, 비유와 풍부한 묘사, 주제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구성력으로 교수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학생의 수준은 문학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으며 지적인 에세이를 쓸 수 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를 맞이한 교수는 학생의 실력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배경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를 가르친 선생이 바로 황광우였다고 한다.
내가 퇴직 전 그의 저서 '철학하라(동양편)'는 책을 읽으면서 처음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일반적인 철학서와 달리 깊이와 재미를 함께 갖춘 좋은 책이어서 즐겁게 빠져들어 읽은 책이다. '철학하라'는 어휘는 명사인 철학에다 보조용언 '하다'를 붙여 동사화된 어휘다. 나도 직장 초기에 학교 교지에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국어 선생님이 내가 사용했던 '철학하라' 단어를 두고 어법에 맞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 어휘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사용되는 단어였다. '철학하라'는 어휘는 독일어 philosophieren(필로조피렌)을 번역한 말이니 생소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렇게 번역하는 게 적당했고 지금은 보편화되어 사용되고 있다.
작가가 쓴 철학서는 논리가 탄탄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읽기에 쉽다. 좋은 글이란 어려운 내용을 독자가 쉽게 읽도록 쓴 글을 말한다. 그의 철학서는 '삶의 철학'이랄까 '철학하라'에 가장 적합한 책이다. 최근에 읽은 '철학콘서트1'과 '철학 콘서트2'는 대중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좋은 교양서다. 지금 읽고 있는 '철학콘서트3'은 더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책이다. 황광우의 책을 읽는 동안 불편한 점도 적지 않았다. 일생을 사는 동안 겪은 경험이나 지적 바탕은 각각 다른 신념을 구성하기 때문인가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도 철학을 조금 공부했다고 하는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이처럼 모르고도 아는 척 했단 말인가하는 자책이 피어 오르고 있다. 황광우의 책은 철학서라기보다 인문학 교양서다. 그의 논지는 철학에 기반을 두고 동서양 막론하고 풍부한 예시를 들면서 거칠 것 없이 논증하는 능력 때문에 반론하기 어렵다. 재미 있는 어투에 구성 또한 매우 탄탄하여 주제를 여간해서 벗어나는 일도 없다.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논리는 감동을 준다'고 했으니 바로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글이란 솜씨라기보다 이해라고 생각하고, 기능이라고 하기보다 예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책을 쓰는 데는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안목과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 저자의 안목과 이해력은 그의 짭짤한 인생 행로들과 더불어 풍부한 독서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논리 전개에 힘을 주려면 세상의 경험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편협한 글을 쓰게 되므로 독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도 다량의 독서에만 의존하면 작가는 표절하기 쉽다. 자기 생각인지 타인의 생각인지 혼동하기 쉬운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인생 경험에 더불어 독서한 것들을 자기만의 이해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로 작가의 사회적 재구성이다. 100년에 나올까말까한 위대한 한 인간이 축적되어 있던 당대의 지혜와 경험들을 모으고 다시 깊은 사색의 필터를 통해 추려내고 정선한다. 그렇게 내 놓은 한 권의 책이 다시 세월의 세례를 받고 검증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고전으로 정립된다. 내가 위대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곧 그의 위대한 인생을 '만난다(begegnen)'는 것을 뜻한다.
만남은 어린 왕자가 말한 '길들인다(tame)'는 말과 같다. 수 많은 장미꽃들 중에서 어린 왕자가 물을 주고 기른 꽃은 단 한 송이다. 서정주 시인이 말한 한 송이 국화꽃도 이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위대한 물리학자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은 모두 코페르니쿠스를 만난 후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관을 부정할 수 있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천체관을 섬세하게 입증하고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난 위대한 인물들 사이의 만남은 모두 책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책은 누적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황광우의 '철학콘서트 1, 2, 3'은 누적의 힘이 무엇인지 세세하게 이해시키는 책이다. 읽은 만큼만 세계를 볼 수 있다. 세계를 볼 수 있는 만큼만 쓸 수 있다. 그 외에는 대부분 거짓말이다. 만나지 않고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무지에 더 가깝게 다가서고 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