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말씀/열왕기하 5:1-19
요절/열왕기하 5:8
여러분은 삶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여러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정답을 말씀드리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 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 시대, 선지자 엘리사는 어떤 삶의 목표와 방향 가운데 살았을까요? 엘리사는 말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롭게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장, 나비 효과(1-7)
오늘의 이야기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람은 현재 시리아의 옛 이름으로써, 이스라엘의 서북쪽에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은 서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군대장관은 오늘날 국방부장관이나 총사령관입니다. 늘 주변의 나라들과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군대장관은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크고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의 신임을 받고, 또 아람을 잘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나아만은 전에 아람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군대장관으로써 전쟁에 나가 큰 승리를 이끌어 나라를 구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람의 이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누구요? 아람은 어떤 나라입니까? 나아만은 이방인이요, 아람은 이방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아만을 도우셔서 아람을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방나라,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도우십니다. 이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나아만은 큰 용사로 인정을 받고, 아람 왕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천형, 즉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는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나병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도 절대로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는 불치의 병입니다. 그가 왕에게 인정을 받기 전에 나병환자였다면 군대장관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군대장관이 된 다음에 나병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도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권력도 있고, 재산도 있는데, 안 해 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 안 밖의 최고의 의료진으로부터 집중적인 치료도 받아 보았을 것입니다. 또 림몬의 신전에 엄청난 금액의 시주를 하면서 빌고 또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나라를 구한 구국의 장군 나아만이 이런 몹쓸 병에 걸렸으니, 아람 왕도, 나아만 장군도 얼마나 안타깝고 힘들었겠습니까? 나아만이 중요한 사람인만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아람을 구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썼지만 해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힘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생겼습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 잡아왔습니다. 그 어린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를 수종을 드는 하녀가 되었습니다. 그 어린 소녀가 어느 날 여주인에게 말합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더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나병환자인 나아만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어린 소녀가 여주인에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아만에게, 또 아람 왕국에 아주 중요한 고급 정보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여주인이 어린 소녀에게 아주 잘해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되었든 이 어린 소녀에게는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는 나병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잡아온 나라이지만, 상처와 아픔을 넘어서서 나아만의 나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여종은 어린 소녀이지만, 또 먼 나라에 잡혀갔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나 내면성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죠? 그녀는 기껏해야 포로로 끌려온 여종의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듣보잡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 쉬웠습니다. 게다가 한 나라의 군대장관이 다른 나라도 아닌 적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여주인은 어린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에서 온 어린 소녀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나아만도 어린 소녀의 말이라고 또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도 그의 주인인 왕에게 가서 이 어린 소녀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자 아람왕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글까지 써주면서 가서 어린 소녀가 말한 선지자를 만나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은 십 달란트(340킬로)와 금 육천 개(68킬로)와 의복 열 벌을 갖고 가도록 했습니다.
아람 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온 나아만은 왕이 보낸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이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겸손하게 이스라엘 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스라엘 왕에게는늘 아람 때문에 힘들었는데,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이스라엘 왕은 너무 괴로워서 옷을 찢으며 탄식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이것은 아람 왕이 시비를 걸려는 수작이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은 어린 소녀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왕도 당연히 알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왕에게 도움을 청하면, 왕은 다시 선지자에게 도움을 청해 나아만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이라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긴 것입니까? 어린 소녀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그 선지자를 이스라엘 왕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이스라엘 왕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람 왕의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탄식하고 절망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냐? 어떻게 나에게 나병을 고치라고 하느냐?” 그러면서 이것은 분명히 시비를 걸려고 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나병이라도 나을 수 있다는 어린 소녀의 믿음이 나아만 아내에게서 나아만으로 전달되었고, 또 나아만에서 아람 왕으로 전달되어 이들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왕을 절망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아람에 잡혀간 어린 소녀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일명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비록 그가 어린 소녀일지라도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하고 새로운 일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해주면서 덕을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왕은 그 믿음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가 왕일지라도 절망하고 탄식합니다. 잔뜩 선물을 싸갖고 와서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데, 오히려 시비를 걸려고 한다며 오해하고 원망합니다. 자기 판단, 자기 생각, 자기 세계에 갇혀서 의도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힘들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이 왕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는 것도 오해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힘들어 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어린 소녀와 같이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를테면 믿음의 나비효과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 영향이 어떤 일을 이룰지, 얼마나 파장을 이룰지, 나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믿음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그를 움직이게 합니다. 새 역사의 파장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믿음의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장,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14)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이 옷을 찢었다면, 옆에 있는 신하들은 당장 벌벌 떱니다. 온 나라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러다가 아람과 전쟁 나는 것 아니야? 한편 엘리사도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먼저 왕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왜 엘리사는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이 문제에 개입하고자 할까요? 그가 말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나아만 장군 잘 보시오, 나 선지자 엘리사 있기 있소.”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풀어쓰면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과 백성은 모두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우상숭배에 빠져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심을 나아만을 통해 알게 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방인인 나아만과 아람 왕에게까지 하나님을 전하고자 합니다. 엘리사는 이 소원 가운데 나아만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엘리사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나 이런 사람이야’ 하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어려움에 빠진 이스라엘 왕을 단지 좀 돕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뒤에 나오는 게하시처럼 나아만을 도와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한 가지 목표는 오직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요, 기도제목이요, 삶의 목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그런데 새 번역에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든 ‘그 이름을 전하여’든 사실 의미는 똑 같습니다. 바울의 삶의 방향과 목표는 오직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믿어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자라고, 나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기도의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말하겠습니까? 중요한 순간에 믿음의 결단을 하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신앙이나 삶이 인정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누가 나를 좀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 사는 맛이 나지 않습니까? 존재의미도 느끼고 신앙생활의 보람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사는 자신이 어떤 인정을 받느냐에 집중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전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인정도 중요합니다. 혹자는 자신은 인정을 받아야 밥맛도 나고 살맛도 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기는가?는 삶의 중요한 평가지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날에 휘날리는 눈과 같은 것입니다. 내릴 때는 멋있지만 금방 지저분해지고, 또 녹아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숙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인정 받느냐가 전부가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고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내 신앙의 성장과 성숙의 척도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2023년이 저물어 가고 곧 있으면 2024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변혁의 시기에 우리의 방향과 목표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는 것,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방향과 목표가 내 삶의 방향과 목표로 자라가기를 기도합니다.
엘리사의 말에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을 엘리사에게로 보내었습니다. 나아만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문에 섰습니다. 나아만은 자기가 그래도 아람의 군대 장관이고, 멀리서 찾아왔으니 엘리사가 당연히 문 앞에 뛰어 나와 맞아 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문 앞에 나와 있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사람을 보내 나아만에게 방향을 주었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따라서 이것은 나아만의 온전한 순종만을 요구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잘 순종했을까요?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올 때에 나름 기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엘리사가 나와서 맞아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또 엘리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에 손을 얹어서 문둥병을 고쳐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띡 처방전만 줄 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처방은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나병환자에 대한 정결규례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자기가 비록 나병에 걸렸지만 그래도 대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써, 아람에게 북이스라엘의 엘리사가 사는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를 엘리사가 철저히 무시했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나아만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이를 참지 못해 노하며 물러가며 한마디 합니다. “다메섹강이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낫지 아니하냐 거기서 씻으면 몸이라도 깨끗하게 되지 않겠느냐?”(메) 이런 나아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혹자는 “아직 멀었어, 아직 고생을 덜해서 자존심이 살아 있어, 좀 더 푹푹 썩어야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혹자는 “역시 남자야, 장군 답네, 자존심이 있어야지”라고 말합니다. 아직 고생을 덜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역시 상남자입니까? 어찌되었든 이 상황에서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나아만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는 해결받기 원하면서도, 자기 자존심만큼은 또 지키고 싶어 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문제가 보통 심각한 문제일지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일지라도, 그래도 붙잡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흔히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지키고 싶은 것이 바로 자존심이 있습니다. 나아만이 지금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아만을 종들이 간곡히 만류하며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 말은 지금 아쉽고 답답한 사람은 엘리사가 아니라 나아만이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갑이 아니고 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할 때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문둥병에서 낫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을 주문했어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지 아니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강물에 씻어 깨끗하게 하라는 것인데, 그 간단한 일을 못할게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들이 괜히 나섰다가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아만을 돕는 것을 보면, 나아만은 참 좋은 종들을 두었습니다. 더구나 종들이 나아만을 돕는 것을 보면, 나아만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세워주면서 돕고 있습니다. 종들의 말을 듣고 나서 나아만은 마음이 풀렸습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엘리사가 준 방향대로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4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물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엘리사가 준 방향대로 순종했을 때, 나아만의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그 피부가 어린 아이처럼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낫게 되었습니까? 나아만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나누는 포인트는 ‘나아만의 순종’입니다. 그것도 ‘일곱 번 순종’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나아만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들어갔습니다. 한번 강물로 씻었습니다. 전혀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씻는 동안에도 전혀 문둥병에서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포기합니다. 심지어 여섯 번째까지 들어가서 요단강물로 씻었지만 전혀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순종하여 엘리사가 준 말대로 일곱 번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문둥병에 걸려 진물이 흐르고 문드러져 가던 그의 피부가 어린 아이처럼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완전한 순종이 완전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순종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정말 들어야 할 메시지가 나아만의 순종일까요? 그렇다고 나아만의 순종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곧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순종이야말로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요, 증거입니다. 끝까지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나아만의 신앙이 빛나고 나아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제에 개입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엘리사가 나아만을 치료하고자 하였습니까? 이번 기회에 나아만의 신앙을 훈련해서, 나아만이 순종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순종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까?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지도 않고 방향만 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이 드라마틱한 사건의 무대에서 전혀 무대에 드러나지 않고 오직 목소리로만 출현합니다. 정말 그가 등장시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나아만이 나은 것은 그가 일곱 번 순종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믿고 신뢰하는 자들을 통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과 같은 이방인일지라도, 도저히 나을 수 없는 나병이라도 치료하시며,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백성들이 무시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능력이 사라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십니다.
우리도 신앙간증의 형태로 믿음의 승리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간증 중에 패배이야기가 있나요, 간증은 다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중간에 왕창 깨지고 넘어져도 결론은 승리의 이야기로 갈무리 합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나아만의 일곱 번 순종을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도 간증에 나오는 방법론, 또는 간증에 나오는 그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40일 새벽기도를 했더니, 하루 3시간 기도를 했더니, 금식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도우셨다며 어떤 방식이나 승리의 방정식을 배우고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 순종하면 성공합니까? 간증에 나오는 방식대로 하면 성공합니까? 성공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래도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감사하지만, 자기의 순종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를 참 많이 봅니다. 순종은 하나님과 어떤 딜을 하기 위한 방식이 아닙니다. 즉 순종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적혀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과 이방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방 종교는 철두철미하게 신과 인간의 거래입니다. 인간은 신에게 공물을 바칩니다. 그러면 신은 그 인간을 보호해 주고 복을 내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은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거래를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래는 양쪽이 영광을 나누어 가집니다. 반면 은혜는 홀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 승리의 방정식, 성공의 공식, 축복의 비밀, 이런 것 있지 않습니다. 한때 십일조의 축복이 유행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열배로 되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꽤 유명한 간증이었습니다. 십일조를 간증한 분은 십일조가 최고의 투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십일조를 드렸는데, 별 차이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안 할 것입니까? 그러지 않죠. 신앙에 있어서 어떤 공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뿐입니다. 순종은 귀한 것이지만, 정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정말 집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순간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그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사가 원하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까? 방식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처음에는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잘 안 되었습니다. 반면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을 보니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상을 도입합니다. 병에 걸렸는데, 잘 낫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쪽을 보니, 우상섬기는 사람들은 건강해 보입니다. 그럼 병 낫는 우상을 도입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수단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귀한 것이지만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신앙의 방식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과 목표가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 신앙에 집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장, 이제 아나이다(15-19)
나병이 나은 나아만은 수행원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와서 고백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엘리사가 나아만이 원하는 방식대로 해서 나았다면 이렇게 고백하겠습니까? “엘리사 당신이야 말로 나의 구원자입니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처음부터 나아만은 하나님을 알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목표가 이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아만은 그래도 감사해서 엘리사에게 답례를 하고자 하지만 엘리사는 끝까지 거절합니다. 어려운 형편에 나아만이 주는 예물이면 힘든 형편이 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에만 집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달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합니다. 지금 같으면 나아만에게 성경책을 주었을 것인데, 당시에는 성경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지 않고자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져가고자 합니다. 그의 신관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에는 이 흙이라도 있어야 하나님을 기억하고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겠는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방법은 조금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받은 은혜를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아만은 오직 한 가지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람 왕이 섬기는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경배할 때에, 군대장관인 자신도 당연히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때 자신이 신당에서 몸을 굽히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런 나아만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한편으로는 은혜를 받고 대단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가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어떤 아픔이 있고, 양보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아만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너는 평안히 가라”고 합니다. 나아만에게 그렇게 해도 좋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아만에게 더 이상 요구할 수 없으니 그냥 두는 것일까요? 사실 사람을 도우면서 이럴 때 참 어렵습니다. 너는 은혜를 받았으니 반드시 이런 것들을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했다가는 그나마 있던 신앙마저도 그가 포기하고 떠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딜레마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잡아 뽑을 수는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그가 선택하는 것을 존중하면서 그가 더욱더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기다리는 것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엘리사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나아만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 믿음, 순종, 헌신 이러한 것들에 많이 집중합니다. 다 귀하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이야기는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해줍니다. 나의 믿음이나 나의 순종이 나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실 때, 내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삶의 방향이고 목표가 되는 것, 그것이 건강한 신앙이요, 올바른 신앙입니다. 내 삶의 방향과 목표가 하나님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