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를 위한 열심을 보라
말씀/ 열왕기하 8-10장
요절/ 열왕기하 10:16
북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은 아합이었습니다. 아합 왕조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예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 그 심판을 집행하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예후는 이를 잘했을까요? 예후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8:1절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살려 준 적이 있는 수넴 여인에게 거주지를 옮기도록 권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기근이 이 땅에 칠 년 동안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말대로 칠 년 동안 블레셋 땅으로 피신했다가 기근이 끝나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향에 돌아와 보니 기막힌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여인이 떠나며 남겨 두었던 집과 전토가 어느새 왕의 소유로 귀속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전제 군주 사회에서 왕이 한 번 꿀꺽 삼킨 땅을 도로 내놓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왕은 집과 전토를 전부 되돌려 주었을 뿐 아니라 요구하지도 않았던 그 땅의 소출까지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어떻게 여인은 왕으로부터 이런 큰 호의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이는 여인이 도착하기 직전에 마침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왕에게 엘리사가 한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린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막힌 타이밍이지 않습니까? 이로 인해 여인의 청원을 듣기도 전에 왕의 마음이 이미 다 녹아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수넴 여인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가까이 하고 선대한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귀하게 여기시고 여인을 환란 중에서 평강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한편 엘리사가 아람의 중심지인 다메섹에 갔을 때 아람왕 벤하닷이 병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사엘에게 이 병에서 자신이 살겠는지 엘리사를 통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이 병에서 반드시 나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고 했습니다. 산다는 것인지 죽는다는 것인지 애매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하사엘에게 장차 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만행을 말하면서 울었습니다. 이것은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오는 엘리사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하사엘은 돌아가서 이불을 물에 적셔 아람 왕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일 때에 유다에서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유다의 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다윗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호람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를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악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습니다. 아합은 바알제사장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함으로 온갖 우상숭배를 이스라엘에 끌어 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온갖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런 아합과 여호사밧이 친하게 지내더니 사돈을 맺었습니다. 왜죠? 이는 남유다가 북 이스라엘 아합 왕가와 혼인을 하면 든든한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 때문입니다. 이런 정략 결혼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아합의 딸과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아합의 집과 같이 행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바알 숭배가 온 유다에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생각해서 유다를 당장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다윗에게 그의 왕조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작정 봐주기만 하실까요?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를 배반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왕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에돔을 쳐서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호람을 버리고 도망치므로 에돔 정벌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에돔은 열왕기하를 기록한 그때까지 계속해서 유다에 반역하고 있습니다. 또 국내적으로는 립나가 반역했습니다. 립나는 유다 서쪽 지역의 중심이고, 블레셋과 경계에 위치한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이 사는 성읍이었습니다(수21:13). 이런 립나가 반역했다는 것은 여호람이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결국 에돔이나 립나의 반역은 여호람이 자초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우상숭배에 빠진 여호람과 유다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장려하여 모든 것을 망쳐놓았던 여호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고 했습니다. 아달랴는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 즉 아합과 이세벨의 딸입니다. 아달랴는 그의 친정 어머니 이세벨처럼 강하고 악한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남유다에 바알을 숭배하도록 선동하였고, 그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 남편인 여호람을 망가지게 했습니다. 이런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는 어떨까요? 27절을 보십시오.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하였습니다. 아햐시야 역시 아합 가문를 이어받은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합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악을 행하였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라’ 하였습니다. 즉 아하시야 역시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 결과 오므리 왕조의 ‘오물’,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를 핍박하는 오물로 남 유다마저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이에 대해 문제의 원인을 결혼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집의 사위가 된 것이 문제의 출발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람, 아하시야 왕까지 대를 이어 결혼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면 결혼, 정말 중요합니다. 그럼 이렇게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유다까지 망하게 하고 있는 아합 왕조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요람과 같이 아람 왕국과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요람이 부상을 당해 일단 이스르엘로 돌아왔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본문 속에 수넴 여인은 망할 듯 망할 듯 하면서도 망하지 않고 결국 평안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유다 왕조는 잘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 되고 결국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원인은 단순합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가까이 했기 때문이고 유다 왕조는 하나님의 원수인 아합 가문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가 우리 삶에 평안이 임하느냐 아니면 평안이 떠나가는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제 인생도 결정적으로 두 명의 하나님의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목자님과의 만남입니다. 목자님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어떻게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아 내면에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둘째는 믿음의 결혼을 통한 제 동역자와의 만남입니다. 만약 제가 이세벨이나 아달랴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끔찍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의와 빛의 자녀인 우리는 불법과 어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잘못된 만남이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세벨이긴 한데 돈이 많고 얼굴도 예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 왕조가 여기서 틈을 보였다가 온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9:1-13절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징계의 막대기로 쓰실 예후를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입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생도 중 하나를 불러서 기름 병을 갖고 이스라엘 군대가 머물고 있는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길르앗 라몬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아람과의 전쟁 때문에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서 군사령관으로 있는 예후를 골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너를 왕으로 세웠다고 하고 기름을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하지 말고 재빨리 달아나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엘리사가 직접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자를 시키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위험부담 때문이었을까요? 내용을 보면, 재빨리 달아나야 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의 방향대로 그의 제자는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군대장관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예후만 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음을 말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이유가 그를 통해 아합을 치심으로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라고 하셨습니다. 또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다 멸절하라고 하셨습니다. 예후는 아합의 집에 임할 심판을 집행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 말을 전한 선지자의 제자는 엘리사의 말대로 재빨리 달아났습니다. 이때 함께 있던 군대장관들은 여호와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예후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는 왕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이 나온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 요람을 배반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배반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합의 집이 여호와를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심판을 집행하고자 하십니다. 왕이 된 예후는 먼저 아람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 이스르엘에 가 있던 요람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달려갔습니다. 마침 유다의 왕 아하시야도 요람을 보러 내려왔습니다. 이스르엘 성에 있던 파수꾼은 성을 향해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람의 말대로 이들을 맞이하러 나간 자를 예후는 뒤로 물러나라고 하였습니다. 보낸 자가 오지 않자 왕은 두 번째 사람을 보냈지만 이 또한 예후를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파수꾼은 병거를 미친 듯이 모든 자가 예후 같다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요람 왕은 아하시야 왕과 함께 병거를 준비해서 나가 나봇의 토지에서 예후를 만났습니다. 예후를 만난 요람은 ‘평안하냐’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별일 없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후는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리요.”하며 돌직구를 날렸습니다. 그러자 상황을 눈치 챈 요람이 급히 병거를 돌려 달아나며 아하시야 왕에게 ‘반역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예후는 이런 요람을 향해 활을 쏘니 화살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여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예후는 요람의 시체를 가져다가 나봇의 밭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람 왕이 죽는 것을 본 유다 왕 아하시야는 놀래서 정신없이 달아났습니다. 예후는 그 뒤를 쫓아가 쳐서 아하시야는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죽었습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가에 서 있었습니다. 예후가 들어오자 이세벨은 ‘무참하게 왕을 죽인 시므리 같은 놈아 그래 어떠냐?’(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후가 창을 올려다 보면서 외쳤습니다. ‘그 위에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그리고 내시들에게 이세벨을 던지라고 하자, 그들은 그대로 이세벨을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이세벨의 피가 담과 말에 튀었고 예후는 그의 시체를 밟았습니다. 한때 온 이스라엘을 휘어잡았던 이세벨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예후가 그대로 왕의 딸이었으니 그를 찾아 장사지내고자 하였지만, 개들이 그의 시체를 먹어버렸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10장은 심판관 예후의 심판을 집행한 내용들입니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이세벨은 죽였지만 아직 아합의 아들 70명이 사마리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후는 그대로 사마라이아로 달려가지 않고 이스르엘 귀족들, 장로들과 아합의 아들들의 교육을 맡고 있는 자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아직 왕의 자손들이 거기에 있으니 그들 중에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왕으로 세우고 그를 위하여 싸우라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자기와 맞서 싸우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렇게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예후의 상당한 압박이었습니다. 예후의 생각대로 편지를 받은 이들은 어떻게 해도 예후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편지를 보내 예후를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예후는 그렇게 하려면 아합의 아들들의 머리를 가지고 이스르엘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왕자 70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의 예후에게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예후는 이를 쌓아놓게 하고 이것이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예후는 왕의 자리를 노리고 반역을 한 반역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한 자로서 자신의 명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후에 예후는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귀족들과 신뢰 받는 자들과 제사장들까지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예후가 일어나 이제 사마리아로 가는 중에 목자가 양털을 깎는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서 자신이 죽인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왕자들은 아합의 아들들입니다. 태후는 이세벨이나, 요람왕의 어머니인 아달랴입니다. 예후는 지금 아합의 아들들부터 유다의 아하시야 왕까지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모르고 오다가 마침 예후를 만난 것입니다. 완전히 죽을 자리에 스스로 찾아 온 것입니다. 예후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알자마자 이들 42명을 다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이후에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 예후는 그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왜 지금 이렇게 하는지를 말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지금 예후가 하는 일은 마치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고려의 왕족들을 숙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후는 그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이것을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그의 열심은 너무 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잔인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아합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관으로서 역할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그 집행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방향에 따라 하고 있습니다. 예후는 이를 통해 아합의 집 때문에 그동안 온갖 우상숭배에 찌들대로 찌든 이스라엘에 대한 영적 혁명을 이루고자 하고 있습니다. 예후는 이를 말하며 여호나답과 함께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나답을 자기 병거에 태우고 사마리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남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합과 이세벨이 끌어들인 바알 선지자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미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한바탕 이들을 제거했지만 바퀴벌레처럼 생존력이 강한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여전히 살아남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예후는 뭇백성을 모은 후에 ‘예후는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후가 집행하는 피의 숙청을 보고 떨고 있던 바알 선지자들은 이게 뭔소리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후는 아예 본격적으로 바알을 섬기고자 큰 제사를 드리겠다고 선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트리지 말고 다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오지 않는 자는 살려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알숭배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다 나와서 이 큰 제사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강력한 스폰서였던 이세벨까지 죽고 숨죽이고 있던 바알잔당들에게 이제 더 큰 세상이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들을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 바퀴벌레 같은 자들에게 커다란 미끼를 던져주어서 다 모이게 한 다음에 한 방에 싹 잡고자 예후가 계략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예후는 아예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고 드디어 공포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 구석구석에 바알 합당제사 포스터가 붙고, 이를 본 바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빠진 자가 없이 다 사마리아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이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니 신당 안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때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예복을 내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다 유니폼을 입힌 것입니다. 이후에 예후는 여호나답과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여기에 있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있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바알신당에 들어간 때에, 예후는 80명을 밖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한 사람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알의 신당에 가득차게 들어갔던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세벨에 의해서 국교와 다를 바 없이 강요되었던 바알 숭배가 뿌리 뽑히게 되었습니다. 또 바알의 신당에 있는 목상들을 불사르고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습니다. ‘바알의 신전이 똥통이라니!’ 최고의 수치를 준 것입니다.
이런 예후에 대한 평가가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예후는 그에게 부여받은 소명 중의 하나였던 아합의 집을 철저히 심판하였습니다. 또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죄인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왜 예후가 아합의 집을 제거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는 일에는 냉담했을까요? 아합의 집을 제거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입입니다. 동시에 예후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이전 왕조의 관련자들이 모조리 제거되면 새 왕조에 반기를 들 구심점이 사라집니다.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도 잡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예후는 사력을 다해 이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반면에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왕권이 약화될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벧엘과 단에 여로보암이 만든 단을 없애버리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마다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남유다로 계속 왕래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난 유다가 더 좋아'하면서 이스라엘을 떠나는 백성들이 생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만 좋고 나한테는 별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큰 위험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예후는 이를 외면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정치적인 이유 속에, 조상을 인도하여 낸 신이라는 명분까지 부여함으로서 백성들에게 깊이 뿌리를 내려왔습니다. 이 때문에 여로보암부터 시작한 금송아지 유상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후가 금송아지 제단까지 제거했다면 그의 후손들이 상당히 장기간 동안 집권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후가 부분적인 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위를 예후 가문에 단 사대까지만 허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 일부 영토를 잘라내시어 아람왕 하사엘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예후는 28년 집권 기간 내내 끊이지 않는 하사엘의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자들을 뿌리 뽑는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인정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개혁이 불완전한 반쪽 자리 개혁에 그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직 온전한 평화를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그의 개혁은 절반이라도 성공한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까요? 하나는 우상을 제거하는 것의 어려움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뿌리가 깊다면 더욱 어렵습니다. 다른 것은 신앙적인 열심을 갖고 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뿌리 깊은 우상은 무엇일까요? 아담 때부터 시작된 인간의 뿌리 깊은 죄는 욕심입니다. 욕심은 소원과 다릅니다. 소원은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지만, 욕심은 욕망입니다. 소원은 건강한 열정을 가져오지만, 욕심은 욕망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는 병든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망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욕심, 탐심, 이기심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자랍니다. 이것은 뿌리가 깊은 만큼 잘 뽑히지 않습니다. 예후가 하나님께 열심을 가졌지만, 자신의 왕권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인 욕심 때문에, 뿌리 깊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만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적인 열심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나의 욕망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둘째, 인간의 한계입니다. 예후의 여호와를 향한 열정, 열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우상을 제거하지 못한 실패한 개혁으로 끝났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예후가 전심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주를 향한 열심은 있었지만 전심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내 안에 뿌리 깊은 욕심, 교만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요? 그야말로 내 안에 하나님만을 섬기는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을까요? 종교개혁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루터나 칼빈입니다. 이들은 완전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장로교니 감리교니 성결교니 하는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도 예후입니다. 그럼 우리도 예후처럼 주를 향한 열심 으로 주를 쫓지만 전심으로는 주를 쫓을 수 없을까요? 그런데 예후에게 없고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이루지 못한, 또 결코 이룰 수 없는 진정한 신앙개혁을 이룰 수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내가 아니라, 또 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진정한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를 위한 열심을 갖고 종교개혁을 절반이라도 이룬 예후를 인정하셨습니다. 그에게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급으로 이스라엘 왕위를 사대를 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후에 대한 열왕기서 저자의 평가는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후가 그래도 완전하게 이룬 것을 높이 평가해 주시고 그에게 상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이룰 수 있을까요? 얼마나 순종할 수 있을까요? 절반이라도 한다면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것을 인정해 주시고 축복하시며 상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나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주의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다 이루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방향이 나의 열정이 주의 말씀을 따른다면 주님은 이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이를 믿고 주의 길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