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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구원의 화살
말씀/열왕기하 11-13장
요절/열왕기하 13:17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의 역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한 사학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혹자는 역사를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즉,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나를 비춰볼 수 있다.’라는 표현합니다. 열왕기서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춰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이야기가 막연히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열왕기하 이야기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비춰줄까요? 오늘 역사의 거울은 무엇을 말할까요?
1장, 유다여왕, 아달랴(11장)
성난 사자와 같은 예후에 의해 아합 왕조는 싹쓸이를 당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왕의 일가친척들이 있었습니다. 아합의 딸로 유다에 시집 왔던 아달랴는 예후에 의해 가족들이 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분노하고 맞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또 남은 가족들이라도 보호하고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정서입니다. 그런데 아달랴는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오히려 자기의 친 손자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모든 왕족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여왕이 등장한 것입니다.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달랴는 이제까지, 태후의 노릇을 하며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직접 여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고자 합니다. 대단한 권력욕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여호세바가 조카인 아하시야 왕의 아들 요아스를 유모의 침실에 숨겨서 아달랴로부터 죽지 않게 했습니다(2). 그리고는 요아스를 여호와의 성전에 6년 동안 숨겨서 키웠습니다. 여호세바는 요아스의 고모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였습니다. 한편 그동안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성전하고 왕궁이 아주 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과 왕궁은 서로 붙어 있는 건물입니다. 즉 다윗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문 하나 사이를 두고 서로 붙어 있습니다. 더욱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6년 동안 왕궁 곁의 성전에서 요아스를 숨겨서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왕이나 그의 측근들이 6년 동안 성전을 그동안 전혀 찾지 않은 것입니다. 성전은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도 섬기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의 웃픈 현실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되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사람들에게 요아스를 보여주고, 안식일에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계획을 짰습니다. 군사들의 호위가운데 여호야다가 그에게 왕관을 씌우고 율법책을 주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달랴는 ‘반역이다.’ 외쳤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임을 당하므로 여왕의 7년 통치는 끝이 났습니다. 이후에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에게 여호와의 언약을 맺어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또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했습니다. 이로서 이들이 언약백성이라는 것을 회복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여호와는 그들의 주인되심을 확인하는 예식을 행한 것입니다. 왜 이런 언약 갱신의 예식이 필요했을까요? 이는 아달랴 통치 기간,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온 백성이 바알의 산당으로 가서 그 산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바알의 제사장도 죽였습니다. 또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그동안 방치되었던 여호와의 성전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요아스를 왕좌에 앉히니,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온하였습니다. 이때가 요아스의 나이가 7세였습니다. 그럼 누가 실세입니까? 제사장 여호야다가 실세입니다. 아무튼 몇 사람의 희생적인 보호속에 아달랴의 칼에 죽을 운명이었던 요아스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계통을 잇게 되었습니다. 비정상화의 정상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일을 주도한 제사장 여호야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한쪽은 너무나 정치적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장이 왕을 세우고 반역을 꾀한 것이니 너무나 정치적이다 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7살짜리 왕을 세우고 자기가 실권을 잡고자 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또 한쪽은 비록 그런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정상화의 정상화를 이룬 개혁자라고 합니다. 심지어 여호야다를 말하며 종교인의 정치개입의 정당성을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그에 대한 어떤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일을 했는가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 이렇게 대통령을 몰아내고 영적 개혁을 한방에 이룰 수 있다면 해볼 만 합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를 모델로 종교지도자들의 정치개입을 말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지금 유다는 엎치락 뒤치락 하며 큰 홍역을 치루는 가운데, 그래도 난파하지 않고 굴러가고 있습니다.
2장, 유다 왕 요아스(12장)
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다윗 왕조를 재건하였습니다. 또 언약 백성의 위치도 회복하였습니다. 2절에 보면,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4-16절은 요아스 왕이 시행한 성전보수에 대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지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당연히 건물이 낡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달랴 군림기간, 바알신전은 많은 지원을 받았지만, 성전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더 나아가 역대하 24:7절을 보면, 아달랴의 아들들이 바알을 위해 성전을 약탈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성전은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했습니다. 요아스 왕은 사람들이 은으로 드리는 성전세와 감사헌금을 가지고 성전의 파손된 곳을 수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지 23년이 되도록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성전은 여전히 황폐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계속 돈은 들어가는데 일이 되지 않습니다. 돈이 어디로 갔을까요? 돈이 어디론가 세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성전은 황폐하고, 헌금만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제사장들이 성전은 보수하지 않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심지어 개혁을 주도했던 여호야다도 한통속이었습니다. 이에 요아스 왕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합니다. 지금까지는 제사장들이 회계에게 돈을 타다가 성전을 보수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제부터는 보수 비용을 제사장들을 거치지 않고 곧장 회계로부터 공사를 맡은 감독관들과 기술자들에게 넘어가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성도들에게 개인적으로 모금하는 것을 멈추고 궤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두어 성도들이 직접 궤에 돈을 넣게 했습니다. 궤가 차면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함께 궤를 열어 계산하게 하였고, 그 돈은 감독관을 통해서 일꾼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즉 모아진 돈은 성전운영비로도 쓰지 못하게 하고 오직 성전을 보수하는 일군들에게 직접 재료비와 인건비로만 쓰도록 했습니다. 15절에 보면, 이 돈을 받아 일꾼들에게 주는 사람들과 회계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이들을 감독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성실히 일하였기 때문입니다. 직접 재료비를 지불하고, 인건비를 지불해 주니 부정이 틈을 탈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제사장들에게 가도록 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황폐했던 성전은 말끔히 보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요아스 왕이 성전을 잘 보수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즉 요아스의 치적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그런 면도 있지만, 이것은 그 시대의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에 대해 고발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열심히 헌금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고 관리해야 할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맡은 일들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습니다. From pure spring water flows. 비슷한 영어 속담이 The fish stinks from head!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는 말입니다. 즉 유다의 문제는 백성들의 문제라기 보다는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너무 심각한 지도자들의 부패를 이야기하면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전을 말끔하게 보수한다고 신앙이 회복될까요? 17절을 보면,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했습니다. 유다로서는 위기입니다. 그런데 이때 요아스는 그의 조상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습니다. 있는 금 없는 금 다 싸그리 글 거 모아서 하사엘에게 갖다 받친 것입니다. 그러자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떠나갔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에 나라가 어려울 때,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 아람이 쳐들어오고 유다가 위기에 처했으니,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기도한대로, 바로 지금 성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아스 왕은 하나님께 구해서가 아니라, 성전의 예물을 다 적군에 갖다 바쳐서위기를 벗어납니다. 전쟁을 하다가 패해서 빼앗긴 것도 아니고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지만 도움을 얻지 못해서 빼앗긴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고 성전에서 기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성전의 것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바친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말끔하게 보수했던 왕이 한 일입니다. 성전의 무너진 담을 보수하고, 도랑을 보수하고, 페인트 칠도 새로 하고, 멋있는 가구도 갖다 놓고, 조명도 새롭게 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했는데, 그 마음이 하나도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나도 한 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며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황폐화된 성전을 보수하는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 요아스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참혹한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4:25,26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요아스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스가랴를 쳐 죽이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막나갑니다. 이후 그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자기 신하들의 반역으로 죽고 말았습니다(20,21). 결국 요아스의 죽음이 아달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요아스는 아달랴에 의해 죽을 뻔한 자였으나 극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6년이나 숨겨져서 자랐고 마침내는 왕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기적들은 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처음에는 요아스도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성전을 보수하며, 나름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그의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우리는 한 때 나도 정말 열심히 했다는 말을 합니다. 또 나는 이러 이러한 일을 했다는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소위 ‘왕년에’입니다. 왕년에라도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왕년은 왕년의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왕년만이 아니라 금년입니다. 지금입니다. 사람의 행위, 사람의 노력, 사람의 결과를 내세우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은 내가 무엇을 했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요아스 왕이 아무리 왕년에 대단 했을지라도, 이렇게 위기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은 그 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북이스라엘은 엉망이고 남유다는 그래도 정통성을 지켰기에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피장파장입니다. 서로 누가 더 못하나 못난이 경쟁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남유다를 남겨 놓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 내가 아직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내가 왕년에 열심을 갖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힘주셔서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3장, 구원의 화살(13장)
유다에서 요아스가 통치하는 동안에 북이스라엘에서는 ‘불의 전차’였던 예후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습니다. 예후는 온갖 우상을 이스라엘에 끌어들인 아합 집안을 심판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4). 그는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이렇게 이스라엘 왕들은 끈질기게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는가? 하는 질문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로보암의 죄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것을 만든 것은 남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게 되면 자신의 정치적인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고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시작된 우상숭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 욕심을 지키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중심이니 나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끌어다가도 나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를 끌어다가도 나를 지켜야 합니다. 성경을 끌어다가도 나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여로보암의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셔서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손에 넘기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아람왕이 갖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왕을 이스라엘의 훈련관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 훈련관들인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합니다. 그러자 여호아하스 왕이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남유다의 요아스는 아람 왕이 쳐들어오자,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금을 끌 거모아서 갖다 받쳤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북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왕은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이를 보면, 한번 잘 했다고 영원히 잘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못했다고, 영원히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이것은 참 신통한 일입니다. 허구한 날 우상숭배만 하고 못된 짓만 하다가 급하니까 ‘아이고 하나님!’ 하며 바알이나 다른 우상들에게 가지 않고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들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박해 받음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징계하시지만 간구할 때, 또 곧 바로 들어주십니다. 즉 징계의 목적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다고 했습니다. 편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서 사는 것이 가장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섬겨야겠다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6절에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맞을 때는 ‘아이고 하나님!’ 하다가 살만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죄인의 무서운 관성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아람 왕을 통해 여호아하스 백성을 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예 여호아하스의 군대숫자를 기병 50명, 병거 열대, 보병 만명만을 남기고 다 아람군대가 쓸어버렸습니다. 흔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실패한 다음에 뭔가 깨닫고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는 또 다른 실패의 연속이 될 뿐입니다. 우리도 자기 욕심 때문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 중심으로 세상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한 대 맞으면 이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살만해지면 다시 또 죄를 반복하게 되면 오히려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될 뿐입니다. 우리가 죄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죄의 힘보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는 힘이 더 강하면 죄를 이기게 됩니다.
14-21절은 엘리사의 마지막을 다루고 있습니다. 14절에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누구입니까? 죽은 아이도 기도해서 살린 능력의 종이요, 대단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기도해서 나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엘리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엘리사도 죽을 병이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었다는 것을 들은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그동안 북이스라엘은 여러 번의 위기를 엘리사의 도움으로 이겨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이스라엘은 군사력이 약해져가고 나라는 쪼그라들고 있습니다. 이 위기에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렸으니 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왕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동쪽 창을 열고 화살을 쏘라고 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동쪽은 지리적으로 아람이 있는 아벡을 가리킵니다. 무엇보다 동쪽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입니다. 이곳을 향하여 화살을 쏘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습니다. 하나는 아람을 향해 칠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전쟁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엘리사는 화살을 쏜 요아스 왕에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요아스 왕은 엘리사에게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칭찬의 말입니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한국의 병거와 마병이요, 라고 말하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나 때문에 이 한국이란 나라가 지켜지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을 지키는 그런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렸으니, 요하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습니다. 그가 엘리사를 의지하는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즉 이스라엘의 구원의 화살은 엘리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즉 엘리사가 또 어떤 능력 있는 사람이 병거가 되고 마병이 되어서 구원해주는 구원의 화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화살이십니다. 이것을 알 때, 엘리사는 비록 자기는 병들어 죽지만, 또 사람은 조금 일하다가 가고 말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얼마든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요하스 왕이 이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화살을 잡아서 땅을 치라고 했습니다(18). 요아스 왕은 화살을 집어서 세 번 땅을 쳤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노하여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 대 여섯 번을 칠 것이니다. 그리하였더라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19) 화살로 땅을 세 번 만 친 것을 엘리사는 심하게 나무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 번이면 삼세판이라고 해서 인정해주는데, 왜 야단칠까요? 그것은 그 마음에 어찌하던지 아람을 치고자 하는 마음,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을 아람에게서 구하고자 하는 믿음과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구원의 화살이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만 믿고, 손가락 빨고 있으면 그 일이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그 구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간절함, 적극적인 열심, 거룩한 소원, 헌신이 있을 때, 그 일이 일어납니다. 신념과 신앙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신념은 하나님이 없이, 내 의지와 열정과 헌신만을 말합니다. 반면 신앙은 신념 플러스 하나님입니다. 내 열정과 의지와 헌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화살이고, 나는 그 구원의 화살을 믿고 최선을 다하고, 온 심령을 쏟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구원의 삶입니다. 즉 항공대 복음역사가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축복해 주시겠지 하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화살을 바닥에 치고 또 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항공대 복음 역사를 위해 기도로 바닥을 치고, 또 원룸에 살고 있는 항공대생과 관계를 맺어 전도할 틈을 얻는 바닥을 쳐야 합니다. 또 직접 항공대 캠퍼스에 나가 전도로 바닥을 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 모든 것을 보시고 축복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마중물을 축복하십니다.
마중물이 무엇입니까? 펌프로 물을 푸는데, 펌프는 물이 잘 나오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펌프 안의 물이 사라져, 손잡이를 위아래도 반복하여도 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펌프 안에 물 한바지를 붓고, 펌프질을 다시 하면 시원하게 물이 잘 나옵니다. 그때 붓는 물을 마중물, 영어로 priming water 라고 합니다. 마중물을 부어야 펌프를 통해서 물을 길어 올리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가진 열정, 진심, 믿음, 헌신을 쏟아 부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화살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멍하게만 있으면 그냥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고자 하시는데, 내가 열정이 없어서, 방향이 없어서 대충 대충 지나가고 있다면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안타까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살로 바닥을 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과 방향, 기도제목을 이루기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온 마음과 열정을 쏟아 붓기를 원하십니다. 수고하고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새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주께 열정을 다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화살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