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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하나님
말씀/열왕기하 18-20장
요절/열왕기하 19:19
원래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여호와를 굳게 의지한 히스기야’였습니다. 이렇게 제목을 붙일 만큼 히스기야는 대단한 왕입니다. 그는 삭막한 왕들로 이어지던 역사 속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인물입니다. 쓰레기더미에서 핀 장미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대단한 히스기야 왕보다 뭔가 2% 부족한 그를 감당해주시는 하나님을 더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히스기야의 하나님’으로 바꿨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 그 대단한 믿음으로 우리에게 도전과 감동을 주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다윗조차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한계와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단하지 않은 자들이 대단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바라보아야 할 대단한 신앙의 모델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뭔가 부족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히스기야의 하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과연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I. 대단한 히스기야(18장)
서로 다투기는 했지만, 그래도 북이스라엘이 있을 때, 남유다는 든든했습니다. 마치 서로 다투며 크는 형제, 자매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유다만 남았습니다. 여전히 앗수르제국은 강하고, 방패막이 되어주던 북이스라엘은 사라졌습니다. 이 위기에서 유다의 13대왕인 히스기야는 어떤 정책을 펼까요? 3절에 보면, 그는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조상 다윗이 한 모든 것을 그대로 본받아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작부터 다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은 왕은 있었습니다. 성전을 수리한 요아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같이’라는 인정을 받은 왕은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 그가 왜 이런 극찬의 칭찬을 받는 것일까요? 4절에 보면, 그는 이제껏 누구도 손을 못 댄 산당을 제거했습니다. 주상을 제거하며 아세라 목상을 찍었습니다.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바알의 주상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관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 이래 어떤 왕도 그런 관행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과감히 그런 관행을 없앴습니다. 특히 그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제까지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었다고 했습니다.
본래 놋뱀은 하나님이 보내신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광야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민21:9). 당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눈으로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 병에서 나았습니다. 따라서 놋뱀을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제시된 것이었습니다. 놋 뱀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그 놋뱀에 무슨 치료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은 섬겨왔습니다. 500년을 섬겨왔습니다. 즉 놋뱀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기념하고 감사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월이 지나자, 어느 새 하나님이 아닌, 놋뱀 자체를 기념하고 그 앞에서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베푸신 치유의 은혜를 기억하는 도구가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의 상징물인 십자가가 무슨 대단한 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져서 신성시 했던 것과 같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놋뱀을 부수고, ‘느후스단’ 즉 ‘놋 조각’이라고 했습니다. 놋 뱀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놋 조각에 불과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히스기야는 정말 무엇을 경외하고 예배해야 하는지, 이를테면 신앙의 본질을 알고 있습니다. 본질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실력자입니다.
이런 히스기야는 당연하게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들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다고 했습니다(6).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은 ‘내 마음에 합한자’라는 것이었습니다(행13:22). 그런데 그 인정을 히스기야 왕이 받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하면 A+입니다. 이런 히스기야를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습니다(7). 히스기야 왕은 진정한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무엇을 하든지 다 성공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빵빵하게 밀어주시니, 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정치적 모험입니다. 대 제국 앗수르가 확 누르고 있습니다. 그나마 완충지 역활을 해 주던 북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즉 이제 남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을 다이렉트로 받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앗수르를 배반하고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고 모험입니다. 앗수르가 큰 호랑이라면, 유다는 강아지 신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히스기야는 쫄지 않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는 사사시대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블레셋을 쳐서 점령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시는 블레셋이 역사의 무대에서 힘을 못 쓰게 박살을 냈습니다. 이런 가운데 북이스라엘은 히스기야 왕 6년에 앗수르에게 완전히 정복되었습니다. 이제 유다만 남았습니다. 투탁거리며 지냈을지라도 형제가 있을 때, 서로 의지가 됩니다. 미운 형이 떠난 외로운 동생 신세가 된 유다는 더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앗수르는 또 다른 먹이감인 유다를 마침내 집어먹고자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쳐서 점령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을 나아가, 하나님을 굳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히스기야도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산헤립에게 사람을 보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납작 엎드렸습니다. 이에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약 23700kg)와 금 30달란트(약 2370kg)의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힘이 약한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이 요구하는 은과 금을 보내고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습니다. 그래도 부족해서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싹 다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 호랑이 앞에 강아지 신세가 되어서 온갖 수치를 당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위기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담담하고 굳세었던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침공이란 상황 앞에서 쪼라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은과 금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아주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가 보낸 은과 금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히스기야에게 많은 돈을 받고도, 자신의 부하 다르란과 랍사리스와 랍사게에게 많은 병력을 주어 예루살렘을 치게 했습니다. 대체로 돈을 받으면 치려던 나라도 치지 않는 것이 당시 국제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산헤립은 돈은 돈대로 받아내고도, 히스기야를 치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처음으로 국제적인 관례가 깨진 것입니다. 당시 절대 강대국인 앗수르가 무력을 앞세워 신뢰를 저리는 짓을 하고 있으니, 그 누구도 중재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 왜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돈을 받아도, 유다를 침공했을까요? 당시 앗수르는 반역한 나라의 왕을 앗수르 사람으로 바꾸는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에 두로의 왕도 이미 교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왕도 앗수르 사람으로 갈아치우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히스기야는 돈은 돈대로 쓰고도 돈을 상납하기 전과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앗수르의 장군들이 히스기야 왕을 부릅니다. 차마 왕이 갈수는 없어서 대신들을 보냈는데, 랍사게가 히스기야 왕에게 전하라면서 말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쥐뿔도 없으면서 도대체 뭘 믿고 까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굽을 의지하는 것을 조롱합니다. 애굽은 이미 산헤립에게 엘테케라는 블레셋 북부 지역에서 참패를 당하고 본국으로 도망간 상태입니다. 또 22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산당과 제단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하라고 하였는데, 그렇다고 뭐 잘 된 것이 있느냐? 앗수르의 병사 한 명이라도 이길 수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쳐서 멸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즉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이 땅을 쳐서 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다름 아닌 히스기야가 종교 개혁 한다고 단행한 산당 제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위하여 산당을 제거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가 제거한 산당들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앗수르 사람들을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랍사게의 말이 맞는 말인가요? 아니면 일종의 심리전일까요? 당시 앗수르는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마다, 침략당하는 나라의 신들이 자기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앗수르 자신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종종 했습니다. 한마디로 히스기야의 신앙을 흔들면서 조롱하고 겁을 주는 것입니다.
랍사게의 이 말을 들은 유다의 대신들은 유다 말이 아닌 아람 말로 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랍사게의 말을 백성들이 듣게 되면 낙심하고 분열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왜 분열이 일어납니까? 랍사게의 말에 의하면, 히스기야가 종교개혁한다고 산당을 없애는 뻘 짓을 했기 때문에, 지금 남유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유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지도자 리스크입니다. “히스기야란 왕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고도의 심리전을 펴고 있던 랍사게는 오히려 일어나 유다 말로 더 크게 외쳤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면 포도와 무화과나무를 먹고 자기의 우물을 마실 것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항복을 하면, 다른 곳으로 끌려 갈 때까지라도 이 땅의 소산은 먹게 허락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보다 더 좋은 곳에 데려가 잘 살게 해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정책은 한 지역의 반역을 제압하면 그 지역 사람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서 국제결혼을 시켜서 정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반역을 최소화하고자 했습니다. 또 그는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당시에는 지역마다 신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주변 나라를 다 정복하였으니, 주변나라의 신들을 다 정복했다고 할 만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어떤 땅입니까? 잡신들의 땅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백성들이 사는 땅입니다. 그런 땅에 와서 그가 말합니다.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유다의 신 여호와도 자기 백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 말을 맞는 말 갖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데 열국을 정복하는 강대국이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더욱이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유다 역시 멸망 직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금 전, 랍사게는 여호와께서 보내셔서,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호와도 앗수르 왕 앞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여호와께서 보내셔서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하러 왔다는 말은 심리전을 펴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이제는 앗수르와 유다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랍사게는 세 치혀를 놀려, 자기가 지금 누구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줄을 알지 못한 채, 앗수르의 군사력만 믿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너무나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이 잠잠하고 한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왕이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의 때에 백성들은 왕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유다는 또 히스기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장,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구원하신 하나님(19장)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랍사게가 한 말을 전해 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의 탄식이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제까지 다른 왕들과 달리 그는 절망의 순간에, 위기의 때에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 지금의 상황을 말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오늘은 환란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랍사게가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이사야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갔으니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그가 성전에 들어가 이렇게 저렇게 기도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물론 기도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열왕서 저자는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어가 기도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더구나 그가 이사야에게 부탁하는 것을 보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 ‘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해도 부족할 판인데,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뭔가 좀 아쉽습니다. 혹자는 그 말이 그 말이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이 이해가 되십니까? 너무나 다급하기에 너무나 힘든 상황이라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하고자 해도 답답한 가슴만 두드리며 한숨만 나옵니다. 혹시 이런 경험 없으셨습니까? 바로 지금 히스기야가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는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가 나오지 않아, 답답한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종,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기도해 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자기가 답답해서 ‘하나님, 하나님!’ 기도하면 참 좋은데, 기도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좀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히스기야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앗수르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이에 어떻게든 금과 은으로 좀 해결해 보고자 하다가 더 큰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약점이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성적은 올 A+ 였는데, 아직은 2% 부족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부족했는데, 아직은 좀 뭔가 약해 보이는데, 하나님은 이런 그를 다 받아주십니다. 이런 그의 호소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어떻게 네가 직접 기도해야지,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냐?”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나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문제가 생기자 금과 은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았냐? 그런데 해결은 안 되고 오히려 더 큰 일을 터진 것 아니냐? 즉 너가 자초한 일이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해라!”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히스기야의 탄식과 고통과 절망을 받아주시고, 이사야를 통해서 두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7절에 보면, 앗수르 군대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앗수르 왕이 본국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앗수르 대군을 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금방이라도 다 잡아 먹을 듯이 으르렁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한방에 날려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예 다시는 예루살렘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와 대단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고, 뭔가 답답하고, 뭔가 아쉬움이 가득한 그의 호소를 받아주십니다. 그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그를 받아주시고, 그의 답답한 소원 그 이상으로 들어주십니다. 더구나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한 내용을 보면, 앗수르를 어떻게 해 달라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럴만한 믿음도 자신감도 히스기야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호소했을 뿐입니다. ‘힘들다. 수치를 당하고 있다.’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알아 들으시고 그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한방에 다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 뭔가 아쉽고 부족한 우리의 모습에도, 심지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감히 구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응답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 약속을 어떻게 이루실까요? 8,9절을 보면, 랍사게가 돌아가서 앗수르 왕을 만납니다. 그런데 구스 왕 디르하가가 자신들과 싸우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구스는 애굽 밑에 있는 나라입니다. 즉 유다를 도우러 응원군이 온다는 소식입니다. 정말 왔는지 안 왔는지는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올려고 하다가 중간에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구스와 애굽의 연합군이 오면, 앗수르에게 불리하기에 돌아갑니다. 그런데도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보내 협박하고 있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내 조상들이 멸하신 여러 민족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느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와 아와의 왕들이 다 어디 있느냐?” 편지의 내용은 랍사게가 했던 것과 같은 협박입니다. 그런데 이미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은 돌아갈 것이고, 돌아가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다면, 이런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편지를 박박 찢으면서, ‘웃기고 있네, 곧 죽을 놈이 뭘 모르고 까불고 있어’ 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떠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려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여려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산헤립은 하나님을 유다지역의 신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룹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온 세상을 주관하시며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고백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고백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히스기야의 기도만 놓고 보면 정말 대단한 고백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나 앞의 사건을 보면, 이런 그의 기도는 조금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미 약속을 주셨는데, 편지 한 장을 받고, 그 편지를 펴 놓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한 믿음이고, 감동스러운 모습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네 학자금 다 되줄게 라고 했는데, 학자금 고지서를 받아보고서 자식이 엉엉 울고 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이제 와서 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뒷북을 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런 히스기야에게 “너 내가 분명히 약속을 주었는데도 징징 거리냐?” 하며 믿음이 없다고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사야를 통해서 약속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하십니다. 심지어 내용이 아주 풍성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왕에게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앗수르 군대를 멸시하고 비웃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머리를 흔들며 조롱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산헤립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나님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가축처럼 코를 꿰고 끌고 가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긴 메시지를 히스기야에게 전해주십니까? 그가 아직도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다고 그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앗수르 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말씀하시면서 히스기야를 안심시키고 계십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징조를 보여주셔서 확신을 시켜주겠다고 하십니다. 29절을 보면,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으로 난 것을 먹되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이제 모든 것이 정상화되어서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이 이 성에 이르지도 못하며 화살을 쏘지 못하며 오던 길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요한 약속을 하실 때에, 자주 쓰는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냥 힘을 안 써도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다해 일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반드시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사실 벌써 끝났을 내용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받고 두려워 떨자, 하나님이 이런 그를 위해서 이렇게 긴 메시지를 보내시고, 또 징조까지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열심’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라고 도장까지 찍어 주시며 그를 안심시키고 도와주고 계십니다. 이 가운데 단 한번도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책망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믿지 못하여 두려워 떠는 그를 야단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그를 이해하시고 품어 주시며 그를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그가 두려워 떨지 않도록 그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구구절절 설명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하나님이요, 곧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명을 쳤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십팔만 오천명을 읽어버리고, 완전히 패잔병이 되어 돌아가서 부하의 칼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대로, 유다는 활 한번 쏘지 않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약속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죄와 죽음에서, 멸망에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세상의 온갖 상황에 눌려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힘들어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실까 염려합니다. 더구나 조금이라도 안 좋은 상황이 생기면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조바심을 냅니다. 부족한 나의 모습 앞에 더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품듯이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긴 메시지를 보내시며 또 다양한 삶의 징조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감싸시며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긴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이고 또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삶들입니다. 히스기야에게 주신 징조는 별 것 아닙니다. 지금은 그냥 살지만 앞으로는 네가 뿌린 씨가 맺는 열매를 먹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징조로 보여주십니다. 즉 내 앞에서 대단한 일들이 펑펑 터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고 날이 바뀌고 또 겨울이 가고 봄날이 오는 이런 당연하게 보이는 삶의 일상들이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징조입니다. 이처럼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도 늘 함께 하시며 때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장, 히스기야의 실패(20장)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포기할 것 같은데, 오히려 히스기야는 이때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지금 히스기야가 39살쯤 됩니다. 아직은 젊습니다. 또 앗수르 위협에서 이제 벗어나서 좀 살만해졌는데 이제 죽는다니 더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해서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네 날에 15년을 더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엄청난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무화과 반죽으로 상처를 낫게 했습니다. 그러면 감사하고 3일을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못 기다리고 히스기야는 해가 십도 뒤로 물러나게 해 달라는 징표를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그의 요구를 다 받아주십니다. 히스기야의 믿음을 도우시고자 천체 질서를 잠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우주 궤도를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이후에 신흥국가로 발돋음하고 있는 바벨론 왕이 편지와 예물을 갖고 히스기야를 문병 왔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그에게 자기 보물고에 있는 모든 것들과 심지어 왕궁과 나라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앗수르까지 물리치고 이 모든 것을 지켜내고 이루었다는 자부심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런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의 몸에서 난 아들들이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실수에 대한 대가는 그만큼 혹독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힘든 시기를 이겼으니 긴장이 풀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 그러다보니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내가 많은 것을 이루었다. 라고 생각할 때, 위기가 다가옵니다.
결론적으로 히스기야는 대단했지만 부족한 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감싸며 도우셨습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곧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