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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의 생애
칼 구스타프 융은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케스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의사와 종교인이 많았으며 바젤에서 명망 있는 집안에 속했다. 융의 할아버지는 의사였으며 바젤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바젤 지역의 개신교 목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파울 아힐레스 융)는 스위스 개신교 교회의 목사였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머니(에밀리 프라이스베르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융의 아버지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정서장애와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으며,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융이 태어나기 전 어려서 죽은 형이 두 명 있었고,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여동생은 그가 9살 무렵 태어나 융은 대부분 혼자서 놀았다. 융은 새로 태어난 동생에 대해서도 무관심 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자주 머물러, 융은 어려서부터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융은 나이가 어머니보다 20살이나 많은 큰 어머니와 하녀가 주로 보살폈다.
융은 어린 시절 검은 옷차림의 근엄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상당 기간을 보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어린 소년에게 두려움을 품게 했다. 융은 어린 시절 특히 밤을 무서워했다. 그것은 자신의 외로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을 지하 세계의 귀신들이 나오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목사로서 교회에서 집례를 할 때 항상 검은 색의 가운을 입었다. 그는 아버지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의 연상적 상징은 밤 – 검은 색 – 아버지 - 기독교였다.
융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일생동안 이런 성격은 유지된다. 융은 어두운 가정 분위기를 더는 참을 수 없게 되면 다락방으로 도피하곤 했다. 자신이 나무로 만든 난쟁이 인형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여러 가지 의식 놀이에 몰두하였다. 다락방에는 난쟁이 인형과 비밀 조약서, 세밀화 두루마리가 숨겨져 있었다. 융은 난쟁이 인형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마음 속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융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꿈과 경험과 감정이 있었다.
융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였고, 심령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두 가지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특이한 꿈과 환상을 체험하면서 점차 품게 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인생 행보를 결정한 요인이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로 목사인 부친과 갈등을 빚었다. 부친에게 종교에 대한 질문은 금기였다. “믿어라. 그리고 신앙을 가져라.”라는 말은 융이 종교에 대한 어떤 개념에 대해 물을 때면 언제나 되돌아오는 대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융이 종교에 대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길 원했다. 종교는 융의 마음속에 혼란을 일으키는 주제였고, 아버지와의 진실한 대화를 막는 장애물이었다. 결국 청년 융은 기독교를 떠난다.
융은 1887년 바젤의 후마니스티셰스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다. 김나지움 시절,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학교생활 중 쓰러졌고 그로 인해 약 반년 간 학교를 쉬게 되었다. 아버지가 융의 미래를 걱정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자신의 신경증을 극복하게 된다. 싫어하는 라틴어 공부를 하다 몇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부함으로써 극복하였다.
1895년 바젤대학 자연과학부에 입학하여 해부학, 생물학 등 의학공부에 필요한 과정을 배웠다. 1896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되면서 어머니의 관심을 받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자신이 돈벌이와 학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3학년이 되자, 외과와 내과 중 어느 쪽을 전공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전공 선택을 단념하였다. 전공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더 받아야 하는데,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융의 직업 선택은 다음 해 여름방학 때 몇 가지 신비한 경험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융의 생애에서 꿈, 환상, 초심리학적인 현상들은 항상 큰 역할을 해왔다. 특히 융이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더했다. 융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무의식 현상들에 유의하고 있었으며, 특히 꿈으로 나타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각별했다.
첫 번째 신비한 경험은 어느 날 융이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그는 갑자기 총소리 같은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옆방으로 달려가 보니, 어머니가 커다란 식탁에서 3 피트쯤 떨어진 곳에 앉아 계셨다. 그 식탁은 이어 댄 곳도 없는 튼튼한 것이었는데도 가장자리에서 가운데까지 쪼개져 있었다. 오래 된 호두나무로 된 그 식탁이 온도나 습도 때문에 쪼개질 리는 만무했다. 융은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 경험은 어느 날 밤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빵 바구니에 넣어두었던 커다란 칼이 산산조각이 났다. 융은 그 조각을 들고 가서 칼 장수에게 보였다. 칼 장수는 칼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 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 쇠 자체에도 문제가 없고, 누군가 일부러 조각을 내기 전에야 이렇게 되기 어렵지요.”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아내가 불치병에 걸렸을 때 융은 그 파편들을 금고에서 꺼내어 본래 형태대로 맞추어 보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융은 매주 토요일 친척집에서 열리는 강신(降神)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신비한 현상들에 흥미를 느꼈으며, 박사학위 논문 작성을 위해 친척집의 강신 모임에서 영매 역할을 하는 열다섯 살 소녀의 행동을 면밀히 연구했다.
이러한 신비한 현상들은 융의 관심을 심리학과 정신병리학 쪽으로 돌려놓았다. 대학으로 돌아온 그 해 가을 졸업시험 준비를 위해 크라프트-에빙(Krafft-Ebing)의 정신의학 교과서를 읽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신의학은 아직 개척 중인 분야였으며, 의과대학의 정규 과목으로 편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책의 첫 장을 읽으면서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정신의학이야말로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2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관심과 생각, 그리고 야심에 부합하는 영역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1900년 12월 의대를 졸업한 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블로일러 교수(1857∼1939)를 보조하는 보조의사이자 연구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활발하게 정신의학을 연구하였다.
1903년에는 스위스의 부자 가문 출신인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하였으며,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스위스에서 손꼽히는 시계 제조업자의 딸인 엠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융의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엠마는 훗날 프로이드와 서신을 교환하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할 만큼 지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에, 융에게는 이상적인 배우자 겸 동료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융은 여러 명의 여자와 염문을 뿌렸다. 러시아 출신으로 최초의 여성 정신분석학자였던 사비나 스피렐레인, 동료였던 토니 볼프와도 깊은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융은 1904년 경 정신병환자를 치료하는 데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기존의 ‘자유 연상’ 기법을 개선한 ‘단어 연상’ 기법을 창시하였다. 그는 단어연상법으로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을 통해서 제기한 억압 이론을 입증하고, 그것을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또 1906년에는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해하는 데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존경과 우정에서 시작되어, 사상적 갈등을 거치고, 결국 결별과 반목으로 마무리된 프로이드와 융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현대 지성사에서도 매우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이다. 프로이드와 융의 관계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두 사람을 ‘사제지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프로이드와 만났을 당시에 융은 이미 정신의학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중견 학자였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수많은 환자와 손님이 찾아왔고, 취리히 의과대학에서는 재학생 이외의 일반인 수강생도 많아 강의실이 초만원이었다. 따라서 비록 19년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융은 학자 대 학자라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프로이드와 교우할 수 있었다.
정신분석 운동의 초기에 융은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1900)을 읽고 나서,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온 이 새로운 이론이 자신의 고찰과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흥분했다. 하지만 프로이드의 동조자가 되는 데에는 적잖은 위험이 따랐다. 융이 논문과 저서에서 프로이드의 입장을 지지하자, 주위의 동료들은 자칫 학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충고를 빙자한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융은 이렇게 응수했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편에 서겠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융은 프로이드와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으며, 1907년 2월에 빈으로 찾아가 프로이드를 처음으로 만났다.
“우리는 낮 한 시에 만났다. 그리고 열세 시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로이드의 입장에서 융의 지지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는 융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지닌 장점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 위주의 정신분석 운동에 비(非)유대인인 융이 가담함으로써, 이 운동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줄어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 까닭이었다.
융은 1908년 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제창자가 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행하기로 결정한 기관지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연구연보’의 편자(編者)로 뽑혔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 운동에서 융을 기꺼이 2인자, 또는 황태자로 인정하려는 의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입장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프로이드의 성 이론에 대한 융의 비판이었다. “나는 꿈과 히스테리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프로이드처럼 어린 시절의 성적 외상(트라우마)에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또 프로이드처럼 성을 과도하게 전면에 부각시키지도, 성이 심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1909년에 융과 프로이드는 7주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 여행은 두 사람의 결별을 가속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서 융은 프로이드가 ‘진리보다는 개인의 권위’를 더욱 앞세운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프로이드의 이론이 일종의 도그마와 개인숭배로 변질되었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꼈다. 프로이드 역시 융이 종교나 신비주의 같은 미심쩍은 ‘고대의 잔재’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1910년에 융은 국제 정신분석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양쪽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1913년에 이르러 융과 프로이드는 마침내 결별하게 되었다. 프로이드는 ‘우리의 사적인 관계를 모두 중단하기로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융도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시인했다. 융은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 이후 자신의 심리학(분석심리학)을 수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로 프로이드는 융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피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결별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는 증언이 있다. 융 역시 프로이드의 사상에서 받은 영향을 기꺼이 인정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없었더라면, 나는 (심리학 분야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프로이드와의 결별은 융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13년에 융은 오래 몸담았던 취리히 의과대학에서 사임했고,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시적인 고립에 빠져들었다. 융은 ‘방향상실 상태’인 동시에 ‘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느낌’으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신비 현상을 체험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는 대규모 재앙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유령을 목격하거나 의미심장한 꿈을 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무의식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또 다른 인격의 목소리를 듣고, 만다라를 치료의 도구로 응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융은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을 수행했고, 그 부산물로 여러 권의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기록을 얻게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프로이드를 비롯한 여러 정신의학자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학계에서 퇴출되고 망명을 떠나야 했다. 반면 융은 스위스 국적에 비(非)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며 활동을 펼쳤다. 이후 독일 학계가 노골적인 친(親)나치 입장으로 선회하자, 그 일원인 융도 자연스레 나치 협력자, 또는 반(反)유대주의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비롯된 비난은 지금까지도 융의 이력에 그늘을 드리운다.
융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남긴 것도 사실이며, 독일 학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칫 나치에 악용될 수 있는 빌미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 놓고 융을 반유대주의자나 나치 동조자로 모는 것은 속단이다. 나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1939년에도 융은 프로이드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로이드라는 이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추모사를 발표할 정도로 신의를 지켰다.
융의 이론에 내재된 이중적인 성격은 아마도 그의 관심이 평생 동안 심령과 과학으로 양분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의사인 동시에 신비 체험자였던 그는 과학의 방법만으로는 쉽게 규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 새로운 세계를 규명하려는 후반기의 저서는 종종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융은 종종 과학자를 빙자한 공상가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에 대해서도 융은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해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1961년 6월 6일 저녁, 칼 구스타프 융은 자택에서 색전증으로 사망하였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융의 묘비에 적힌 문구는 언젠가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상기시킨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