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스의 생애 [Rogers, Carl Ransom, 1902. 1. 8. ∼ 1987. 2. 4.]
칼 로저스는 1902년 1월 8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의 교외 오크 파크에서 5남 1녀 중 4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의 엔지니어였으며 가정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다. 부모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특히 그의 어머니는 스스로 엄격한 근본주의자로 자처하였다.
그의 부모는 자녀들을 매우 아끼고 열심히 돌보았다. 로저스가 12살 때 시카고에서 30마일 떨어진 농장으로 이사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농장에 있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사춘기의 자녀들을 도시의 유혹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로저스의 가정은 술, 춤, 영화 등을 금지했으며, 사회적 관계는 적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였다. 로저스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대체적으로 독립적이었으나 내심으로는 서로 의존하였고, 드러내놓고 즐거워하거나 만족해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종교적, 윤리적 규율이 매우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가정이었다. 그의 부모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겸손한 동시에 우월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어린 로저스로 하여금 친구가 없이 주로 혼자 생각을 하거나 독서를 하게 하는 특이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만들었다.
위스콘신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농업을 전공하였으나 졸업은 역사과로 했다. 대학 시절 로저스는 종교 모임에 참석한 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22년 대학 3학년 때 국제기독학생회 후원으로 국가기독학생연합회에 참석하기 위해 6개월 간 중국에 갔다 오게 되는데 이 일은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신실하고 정직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자신도 그의 부모의 종교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헬렌 엘리어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로저스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람으로 로저스에게 꾸준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그녀의 도움이 로저스에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혼 후 1924년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그 당시 가장 자유스러운 신학교였다. 이 신학교에서 그는 놀랍고도 중요한 경험 - 자기 자신의 생각과 느낌대로 그 결과가 어떠하든 흘러가게 하는 자유로운 세미나 – 을 하는데, 이것이 그의 비지시적 상담의 모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점차 자신의 신념을 키우게 되었고 또한 그 자신의 사고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하였다. 결국 콜롬비아 대학의 사범대학으로 전학하여 임상심리학과 교육심리학을 공부한 뒤 1931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8년 뉴욕 로체스터의 법원과 아동 연구성으로부터 위촉받아 비행 아동과 결손 아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자신을 임상 심리학자로 여기게 되었다. 1939년에서 1940년까지는 로체스터 가이던스 센터의 소장으로 있었으며, 1940년에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42년 ‘상담과 심리치료(Counseling and Psychotherapy)’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상담계에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켜 그의 이론이 ‘비지시적 상담’이라고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에는 카운슬링센터 설립을 위해 시카고 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1947년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 되었고, 1951년에는 그의 유명한 저서 ‘내담자 중심 치료(Client-Centered Therapy)’를 발표하였다. 1957년에는 다시 위스콘신 대학으로 옮겨갔다. 1966년에는 위스콘신 대학을 떠나 캘리포니아의 라호야(La Jolla)에 있는 서부행동과학연구소로 옮겼으며 1968년에는 몇몇의 동료와 함께 라호야에 인간행동연구소(Centers For Studies of Person)를 설립하였다. 1980년대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중심집단치료의 연구와 저술에 바쳤다. 그리고 1987년 2월 4일, 숨을 거두었다.
젊은 시절의 로저스가 철저하게 종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 여행 이전과 여행 당시의 편지와 일기 내용은 분명히 신학적 혼란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강력한 이상주의와 관련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깊은 흠모와 끌림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저스가 일단 기독교 목회를 위한 훈련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다음에는 교회뿐 아니라 기독교에 등을 돌렸다는 사실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치료자로서 그리고 심리학자로서의 경험은 점차,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자신의 창조적 속성을 만족시키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했다. 그런 확신은 로저스 집안 신학의 특징인 원죄 교리의 엄격한 해석 속에 담겨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죄의식을 유발하는 관점과 정면으로 대립되었다. 로저스 부모의 신앙 속에서는 오직 ‘예수의 피’만이 죄의 부정함을 씻어 버리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회개와 개종 없이는 본질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류에게 희망이 있을 수 없었다. 로저스에게 있어 그런 시각은 점차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는데, 그 이유는 치료자로서의 자신의 경험이나 진화론적 지식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내포된 죄지음과 타락에 대한 개념들이 모순적이며 궁극적으로 삶을 부정하는 것이고 인간 영혼에 깊은 상처를 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로저스는 수많은 내담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일어나도록 도왔다. 이 과정을 통하여 드러난, 자신의 영혼에 가해진 깊은 상처를 생각하면서 로저스는 기독교 신앙과 모든 제도화된 종교로부터 아주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