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서울 부모님께 가는 차 안에서 선형이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 동안 공부가 정말 싫었거든요. 그 이유를 지금 생각해보면 영어 과외 선생님 때문이었어요. 그 선생님은 미국 영화를 보면 영어 리스닝 실력이 좋아지고 책을 많이 읽으면 나중에 논술에 도움이 된다고 자주 말했어요. 그런 말을 계속 듣다보니 나도 모르게 영화 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점점 더 싫어지더라고요. 그전에는 영화 보기, 책 읽기를 굉장히 좋아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선생님을 만난 후로는 영화도 책도 꼭 공부처럼 생각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영화도 싫고 책도 싫고 공부는 더 싫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성적이 점점 더 떨어지는 거예요. 요즘 차츰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어요. 다행이지요.”
아이에게 또 하나 배웠다. 공부는 물론 만사에 내재적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내재적 동기란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거다. 내재적 동기의 반대는 외재적 동기인데, 그 활동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것으로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똑 같은 활동이라도 사람에 따라 내재적 동기일 수도 있고 외재적 동기일 수도 있다. 등산을 예로 들자면, 산이 좋아서 주말을 학수고대하는 사람도 있고, 매번 힘들고 괴롭지만 건강을 위해 억지로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으며, 혹 오가는 동안 산악회 버스에서의 야릇한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선형이는 그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영화도 독서도 그 자체로 즐거운 활동으로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영화 관람과 독서는 선형이의 내재적 동기에 의해 수행되었던 거다. 그런데 과외 선생을 만난 이후 모든 게 수단으로 변해갔다. 내재적 동기에 의한 순수한 즐거움은 사라지고 오직 성적을 올리기 위한 방편, 즉 외재적 동기에 위한 활동만 남았다.
선형이 내면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았나?
어느 동네에 큰 부자가 저택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옆 공터에 늘 많은 아이들이 몰려 놀아서 매우 시끄러웠단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싫었던 그 부자는 어느 날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나는 너희들이 쾌활하게 어울려 노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구나. 명랑한 목소리도 듣기 좋고. 너희들에게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은 게 늘 미안했어. 그래서 오늘부터 여기 와서 노는 사람에게 하루에 만원씩 주기로 결심했단다. 줄 서서 한 명씩 돈을 받아라. 제발 부탁하건데 내일도, 모래도 한 명도 빠짐없이 매일 여기 와서 재미있게 놀아다오.”
그렇게 한 동안 매일 아이들에게 만원 씩 주다가 부자는 어느 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얘들아, 그 동안 매일 와서 열심히 놀아주어 정말 고맙다. 한 가지 미안한 일이 있는데 사정이 생겨서 너희들 노는 값을 좀 깎아야겠다. 앞으로 하루 만원은 어려울 것 같고 천원으로 내려야겠다. 미안하다. 이해해다오.”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모든 아이들이 논의 개구리 떼처럼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단다.
“그렇게는 못 놀아드립니다. 노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하루 만원도 적절한 가격이 아니지만 저희들이 봐드렸던 겁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천 원으로 깎다니요? 그 가격으로는 놀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얘들아, 다른 곳으로 가자. 여기는 다시 오지 말자.”
그 아저씨 정말 똑똑하지?
선형이는 이런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그 과외 선생님은 자기 자식들도 그렇게 키우더라고요. 그 집 애들은 너무 불쌍해. 정말 재미없게 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