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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오]

[김남일의 책읽기] ‘전쟁의 슬픔’

| 기사입력 2000-06-04 

베트남 호치민시에는 팜응라오라는 배낭족거리가 있다．처음 그곳에 들렀을 때 꾀죄죄한 소년 상인들이 들고다니는 목판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책이 영문 해적판 ‘전쟁의 슬픔’이었다．베트남 작가가 쓴 소설이 번역됐다는 호기심도 작용했겠지만,어쨌거나 반쯤은 겉멋으로 샀으니 한동안 배낭 무게만 늘릴 수밖에．그러다가 겨우 읽게 되었을 때,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머리속으로 막연히 그리고 있던 사회주의 베트남의 문학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작가가 혹시 보트피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그는 베트남전쟁 당시 월맹군 ‘영광의 제27 청년여단’소속으로 처음 500여 명이었던 부대원 가운데 사이공 함락때까지 살아남은 마지막 열 명 중 한 사람이었다．이런 경력을 지닌 작가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썼을까, 궁금해하던 기억이 새롭다．

‘전쟁의 슬픔’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키엔의 ‘흔들리는 의식’에 기대어 전개된다．그는 자신이 참가한 이른바 민족해방전쟁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그렇기는 커녕 그는 환각제에 의지해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동료,이성을 잃고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는 지휘관,월맹군에게 윤간을 당해 ‘영혼이 없는 시선’을 지니게 된 애인 프엉에 대해서 말한다．그리고 그 모든 증언 또한 몽롱한 의식의 흐름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소설의 메시지 또한 단순하다．제목처럼 ‘전쟁의 슬픔’ 그것이다．거기엔 세계 최강대국을 상대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해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자리잡을 구석은 없다．있다면,전쟁이라는 거대한 해일 앞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마는 개인의 비참한 실존만이 있을 뿐이다．아니, 소설은 ‘조국해방’만큼이나 중요한,그 비참한 실존에 대해서 강력하게 발언을 하는 것이다．

정확히 25년 전,전쟁은 끝났다．키엔은 살아남았고,바로 오늘 그를 이 세상에 내보낸 작가 바오닌이 우리 곁에 왔다．그는 한때 자신의 적국이었던 나라,그 파병의 대가로 고속도로를 세운 나라,그리하여 지금은 첨단 산업자본주의의 풍요를 구가하는 나라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영원히,그는 공간을 가로질러 과거의 깊은 바닥에 이르도록 고동치는 섬광들을 찬양할 것이며,생애 첫번째 전쟁의 섬광과 첫 모험의 미광과 어린 시절 깊은 기억 속에 튀어오르는 첫사랑의 빛을 찬양할 것이다’

이쯤에서 ‘전쟁의 슬픔’을 쓴 작가 바오닌의 의식은 영화 ‘박하사탕’을 만든 감독 이창동의 의식과 정확히 동심원을 이룬다．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원을 넘어,그들은 똑같이 말한다．‘첫사랑으로 돌아가라!’ 왜냐하면… 그것 밖에는 달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남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