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레(Van Le)의 고향은 ‘육지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닌빈(Ninh Binh)이다. 크고작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이 논 위에도 강 위에도 우뚝우뚝 솟아 있는 닌빈은 북부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장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어린 나이에 자원 입대했다. 그가 입대하던 날, 어머니는 동구 밖에 오두마니 서서 그를 배웅했다. 말 한 마디 없었고 그 흔한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아침 밥상엔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흰 쌀밥과 일년에 한 토막 구경하기도 힘든 생선이 통째 올라 있었다. 당시 조국은 세계 최강의 미국과 맞서 싸우고 있었고, 그는 대학
대신 군대를 선택했다. 1966년,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다. “온 산하가 불타고 있었지... 누구나
그랬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그는 예사로이 말한다.
그렇게 집을 나선 반레는 호치민 루트를 타고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대장정에 올랐다. 열이 떠나면 간신히 셋이 도착하는 험한 길이었다. 나머지 3분의 2는 총 한 번 잡아보지도 못한 채 그 길 위에서 스러져 갔다. 대부분은 굶어 죽고, 폭격에 맞아 죽고,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 그 길을 걷고 또 걸어 6개월 만에 남부에 닿은 반레는 곧바로 사이공 전선에 투입돼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1975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 대항해 싸운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와 함께 입대했던 301대대 3백 명의 부대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다섯 명뿐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들을 잃었고 전장에서 꽃 피웠던 사랑도 잃었다.
반레의 본명은 레 치 투이(Le Chi Thuy)다. ‘반레’는 그와 함께 호치민 루트에 올랐고 그와 함께 싸웠던 전우의
이름이다. ‘반레’는 전장에서도 틈만 나면 시를 읽고 시를
쓰는, 그 누구보다도 시를 사랑했고 또 시인이 되고 싶어했던 친구였다.
그러나 ‘반레’ 역시 구정대공세 전투에서 미군의
폭격에 맞아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그러니까 1976년 레 치 투이는 『문예주간』의 시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작가는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이 시를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끝내 시인이 되지 못하고 죽은 친구 ‘반레’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베트남에
시인 반레는 있어도 시인 레 치 투이는 없다. 그는 그후로도 줄곧 그의 친구 ‘반레’의 이름으로 살고 ‘반레’의 이름으로 글을 쓴다.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에 그를 빼면 살아 돌아온 장정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을 사람들은 반레를 반겼지만 그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덤이야…” 살아남아 슬프고 살아남아 부끄러운 반레는 말한다.
“늘 앞장서던 놈, 착한 놈, 똑똑한 놈, 잘난 놈들은 모두 다 죽었어!”. 그래서 덤으로 얹혀진 삶조차 무거운
반레는 제 남은 인생을 다섯을 대신해 죽은 2백95명의 동료들을
기억하는 데 바친다.
1982년부터 국립해방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6년
베트남 영화제에서 영화 <조용한 영광>으로 시나리오와
감독 두 부문에서 황금연꽃상 은상을 수상하고, 2000년에는 <원혼의
유언>으로 최우수감독상인 금상을 수상했다. 그해 영화
<사이공, 1968년 봄>으로 일본 NHK 방송에서 갤럭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레는 늘 ‘시인’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그의 시와 소설의 주제는 오로지 ‘전쟁’이며, 그가 만드는 영화도 대부분이 ‘전쟁 다큐멘터리’다.
반레의
오랜 친구이자 반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존재의 형식>의
작가이기도 한 방현석은 반레의 책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의
발문에 이렇게 썼다. “누구도 그보다 더 여리고 부드러울 수 없다. 그렇지만
또 누구도 그보다 더 강할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유연한 동시에 자기 원칙에 그토록 충실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토록 겸허한 동시에 그토록 완벽하게 당당한 인간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간혹 작가보다 아름다운 작품은 볼 수 있지만 작품만큼 아름다운 영혼,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작가를 만나는 일은 드물다. “작품보다 작가가 아름답다? 그거 욕이지? 당연 시가 더 아름다워야지. 나보다 못난 시를 쓴다면 그건 내 ‘반레’에 대한 모독이지…”. 반레는 농을 던지듯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장대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날,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 반레는 날 빗속에 세워 두고 선뜻 문을 열지 않았다. 대문 창살 사이로 희뿌연 그의 등이 가볍게 들썩이는 게 설핏 보였다. 잠시
후 예의 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여는 그의 두 눈이 벌갰다.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길을 한정 없이 걸었어. 걷다 보면 바로 옆에서 한 놈씩 ‘털썩’ 쓰러져 다신 일어나지 못했지.
그래도 행군을 멈출 순 없었어. 그 차가운 빗속에 버려둔 채 땅에 묻어 주지도 못하고, 향불 하나 켜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이렇게 장대비가 퍼붓는 날이면…” 그의 눈동자가 다시 젖어 들었다. 반레의 글쓰기도 반레의 다큐멘터리 작업도 모두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의식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그에게 신 내림을 받는 듯한 고통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반레가 이미 죽은 수많은 ‘반레’들을
불러내 자신의 세대를 증언하는 이 의식을 멈추지 못할 것임을 안다.
첫댓글 <아맙 서재>에 반레 작가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책소개 올려져 있습니다. <아맙 동영상>에 가시면 베트남 평화의료연대와 반레 선생님의 만남을 통해 그의 육성도 들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맙 공정여행>에서는 아름다운 작가 반레를 직접 만나 그의 진솔한 얘기를 듣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