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_ 책 '평화랑 뽀뽀해요'(한국-베트남 어린이 문예대회' 수상작 모음)에 있는 두 나라 어린이의 시
[ 베트남 평화기행 이야기 ① ]
2013 베트남 평화기행
2013. 3.1~7 베트남 호치민시, 꽝아이성, 꽝남성
① 다시 베트남으로 떠납니다 (3.1)
베트남에 다시 갑니다.
지난 해 10월에 다녀왔으니 겨우 4개월 지났을 뿐입니다.
눈코 틀 새 없이 바쁜데다 비용도 많이 드는 이 여행에 굳이 나선 까닭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섭니다.
하미학살 위령제에 한국인의 참배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번 평화기행은 서울의 평화박물관과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이 기획하고 준비했습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와 아맙의 구수정 선생이 길잡이가 되십니다.
훌륭한 프로그램, 훌륭한 안내자와 함께 하는 기행.
홀로 떠났던 여행, 홀로 찾아다니던 여행과는 다른 여행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이번 기행에는 일본인들도 함께 한다고 합니다.
일본은 한국에, 한국은 베트남에 큰 과오,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사죄하고 용서하는 일,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뜻 깊은 여행, 알찬 여행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비행기를 타면 7일 새벽에 돌아옵니다.
여건이 되는대로 그곳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2013. 3. 1 인천국제공항에서
사진 2 _ 베트남 평화기행 탐방지 그리고 만날 사람들
[ 베트남 평화기행 일정 ]
3월 1일(금) 1일차 / 호치민시
- 인천→호치민
-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존재의 형식을 묻다 - 시인 반레와의 대담
3월 2일(토) 2일차 / 호치민시
- 전쟁박물관 탐방
- 구찌땅굴 체험
- 한홍구 교수가 들려주는 베트남 전쟁과 평화 이야기
- 평화의 직선을 긋는 추상화가 응웬탄쭉과의 만남
3월 3일(일) 3일차 / 꽝아이성
- 호치민→꽝아이성
- 밀라이박물관 탐방
- 꽝아이의 시인 탄타오와의 만남
3월 4일(월) 4일차 / 꽝아이성, 꽝남성
- 슬픈 자장가의 마을, 빈호아사 한국군 증오비 참배
- 빈호아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 도안응이아, 이제 평화를 노래하고 싶네 – 민간인 학살 생존자와의 만남
- 빈호아사 인민위원회 만찬
- 꽝아이성→꽝남성
- 시간이 멈춘 도시 호이안의 밤거리를 걷다 (자유여행)
3월 5일(화) 5일차 / 꽝남성, 호치민시
- 하미학살 희생자 가족‧친지들의 제례의식 “따이한 제사” 참가
- 하미 학살 45주년 위령제 참배
-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음복연 / 팜티호아 할머니와의 만남
-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와의 만찬
- 퐁니 위령비 방문
- 꽝남성→호치민
3월 6일(수) 6일차 / 호치민
- 남부 여성박물관 탐방
- 자유 일정
- 도이머이 세대의 중견 작가, 부이 콩 칸 화가와의 만남
- 부이 콩 칸 화가와 함께 하는 가정식 만찬
- 호치민→인천
3월 7일(목) 7일차 / 인천
- 호치민→인천
사진 3 _ 지난 해 가을 혼자 하미 마을을 찾아갔을 때 위령비 앞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손벽보를 들다.
윈난-인도차이나 여행(2012. 10.31_47일째)
꽝남성 하미마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위령비
새벽 6시 즈음 꽝남성 호아인에 도착했습니다. 호치민에 서 출발한게 어제 아침 7시니 꼬박 하루가 걸린 셈입니다. 피곤하다 쉴 겨를은 없습니다. 숙소를 잡고 씻고 옷 갈아입고 몇 가지 준비를 하니 8시입니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하미 마을로 갑니다. 새벽부터 내린 비는 좀처럼 그칠 기색이 없습니다. 아마 오늘이 내 여행 중 가장 아프고 슬픈 날이란 걸 하늘도 알았나 봅니다.
우리로 따지면 읍면 정도될까요. 디엔정사 인민위원회 가까이 샛길로 들어서니 논과 고구마밭이 보이고 그 가운데에 오늘의 첫 목적지인 하미 마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위령비가 있습니다.
미리 여행기에서 얘기했지요. 누가 학살을 했는지? 바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인들이지요. 1968년 2월 25일 마을에 들이닥친 한국군 부대는 마을 주민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수류탄과 총으로 남김없이 죽입니다. 갓난 아기부터 노인들까지 135명의 민간인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겨우 몇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분향을 하고 삼배를 한 뒤에 한참을 엎드려 있었습니다. 비문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이름을 보고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화나고 또 화났습니다. 막막하고 또 막막했습니다. 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어찌 용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잘못을 인정조차 않는 게 가해자인 한국정부와 한국군인데 말입니다.
저로서는 그저 무릎 끓고 가해자 나라의 시민으로서 사죄하고 또 사죄할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이미 제법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과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학살을 세상에 알리고 공유하고 민간 차원의 사죄와 새로운 평화관계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오게 된 거지요. 나도 참회하고 사죄하며 또 새로운 평화관계를 만들겠다고 영령들에게 다짐했습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팜 티 호아 할머니 댁으로 갑니다.
사진 4 _ 지난 해 가을 혼자 하미 마을을 찾아갔을 때 팜 티 호아 할머니를 만나다.
윈난-인도차이나 여행 (2012. 10.31_여행 47일째)
꽝남성 하미마을 팜 티 호아 할머니
아마 2000~2001년 때였지요. 제주 4.3 때 군경토벌 대의 총격에 턱과 허리를 다친 두 분 할머니를 한두 달에 한 번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한림읍 월령리에 진아영 할머니와 조천읍 대흘리에 양복천 할머니였지요.
내가 한 거라곤 생필품 조금 갖다드리고 말씀 듣고 손잡아드리는 것 밖에 없었지요. 외로운 분들이었기에 이따금 찾는 나를 크게 반기셨지요.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들은 그 비극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하셨습니다. 얼마나 아픔이 크셨을까, 그 한의 크기는 또 얼마나 되실까...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두 분을 뵈며 제주4.3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도 중요하지만 살아계신 분들에 대한 위로와 지원 역시 무척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팜 티 호아 할머니를 찾아가며 문득 진아영, 양복천 할머니가 떠오른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팜 티 호아(85세) 할머니 댁을 찾아가는 길. 이미 아맙의 구수정 선생에게 찾기가 만만치 않을 거란 염려를 들었던 터입니다. 한편으론 또 아맙의 권현우 선생에게 자세한 길 안내문과 사진을 받았기 때문에 든든했습니다. 그리 헤매지 않고 할머니 댁을 찾아냈습니다.
대문 앞에서 할머니 할머니 몇 번 부르니 부엌 같은 곳에서 팜 티 호아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얼른 다가가 한국에서 왔다 말씀드리고 큰 절을 올렸습니다. 처음에 조금 경계하는가 싶더니 내가 계속 "신 로이, 신 로이"(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씀 드리니 경계를 푸시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얼마 안 있어 이웃집 할머니도 오셔서 이야기에 함께 합니다. 물론 나는 두 분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함께 간 오토바이 기사 아저씨가 가끔 아주 짧은 영어로 뭐라고 얘길 해주지만 그나 나나 영어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표정, 몸짓, 음성만으로도 43년 전 그 비극이 충분히 전해져 왔습니다.
팜 티 호아 할머니는 1968년 한국군의 하미 마을 민간인 학살 때 살아난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외지에 나갔던 큰 아드님만 빼곤 다른 가족은 모두 몰살되었지요. 하지만 할머니도 그 때 두 다리를 잃어야 했고, 큰 아드님도 전쟁 후 지뢰 폭발로 두 눈을 잃은 상태입니다. 어쩌면 육체적 상처 보다 정신적 상처가 훨씬 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