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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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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와 인간
2. 종교의 의의(意義)
3. 종교의 발달과정
4. 종교의 유형(類型)
(1) 유신교(有神敎, 神本位 宗敎)/ (2) 무신교[인간본위 종교]/ (3) 불교의 입장
5. 종교의 기능
6. 종교의 구성 요소
7. 올바른 종교 선택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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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와 인간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특징으로 학자들은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이성적 인간’이라 하기도 하고, 다른 동물과 달리 연장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공작하는 인간’이라 하기도 하며, ‘웃는 인간 혹은 상징을 사용하는 인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류학자 마레트(1866~1943)에 따르면 진정으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은 종교적 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종족 중에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없는 종족은 없고, 반면에 동물 중에 종교적 신념이나 제의(祭儀)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동물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이 차라리 더욱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종교적이다. 물론 교회나 절에 나가지 않음으로 종교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교회나 절에 나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당면한 '궁극적 물음'을 물어 보거나 삶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자세가 깊은 의미의 종교적 자세라고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이지 않을 수 없고, 시대가 바뀐다고 이런 종교적 자세가 줄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근에 와서 더욱 강하고 깊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는 인간이 인간인 이상 인간의 삶에 없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그토록 소중한 요소로 깊이 자리 잡은 종교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종교를 읽음으로 거기에 투영된 인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루어온 정치․ 경제․ 문학․ 역사․ 예술․ 철학 등에 대해서 종교적인 요소를 감안하지 않은 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종교적 문맹(文盲)은 어쩔 수 없이 문화적․역사적․인류학적 문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역사적으로 이룩해 온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이 분야의 이해뿐 아니라 인간 이해 자체의 전제 조건인 셈입니다. 종교를 알아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지성인으로서 가져야 할인문학적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습니다.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라고 규정했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종교적 동물입니다. 그만큼 종교는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고대의 동굴 벽화 또는 매장지 등을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그 당시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던 종교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중세에는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이 종교에 의해 결정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때는 도덕, 윤리뿐만 아니라 인간 개인의 심리, 사회적 관습, 전통, 또는 정치, 경제현상까지도 종교를 전제로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만나게 되고, 여러 장소에 종교 시설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어느 문화권이나 국가 체계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역사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늘 종교와 함께해 왔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의 삶에는 늘 종교가 함께 할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써 오직 종교만이 채워 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반드시 묻게 되는 궁극적인 물음에 대해 오직 종교만이 적극적인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숱한 문제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간이라면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결국 어디로 가는가? 사후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종교에서는 ‘궁극적 문제’라고 하거니와 이 문제들에 대해 종교는 나름대로 답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세상이란 창조신이 만든 것이라고 답하고, 불교는‘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지음(一切唯心造)’이라고 하듯이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마음으로 봅니다.
이처럼 종교는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물음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해답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사실 똑같이 궁극적인 물음을 묻고 있는 것으로 철학이라는 영역이 있지만 철학은 분명 물음만을 던졌을 뿐, 적극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데는 선뜻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자신이 묻고 있는 문제가 정확하고 의미 있고 효율적인 물음인지를 되묻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종교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뚜렷한 답변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가장 일반적으로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종교에서 제공받게 됩니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삶과 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종교의 의의(意義)
우리는 흔히 종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절이나 교회를 종교적 건물이라 하고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종교를 믿는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상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종교란 말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종교를 정의하자면 매우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를 신과 인간의 관계로 정의하는 유일신론(唯一神論)이 있는가 하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도 있으며, 종교를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아편이라고 혹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종교의 가르침 속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도 있고 종교적 가치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온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는 사람에 따라서 견해를 달리하며 거기에다 동․서양의 종교관이 크게 가르기 때문에 종교를 정의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고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몇 가지 정의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종교(宗敎)의 종(宗)자를 풀이하여 보면 갓머리 변(宀)에 보일시(示)입니다. 갓은 사람의 가장 꼭대기인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란 가장 꼭대기(宀)의 도리를 보여주는(示) 가르침(敎), 다시 말해서‘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이 종교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신(神)이 개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동양의 종교(불교, 유교 등)에는 신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종교는 반드시 신을 전제로 합니다.
종교를 영어로는 릴리젼(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 레리가르(Religare)에서 온 말로, 레리가르는 다시(再)라는 뜻을 가진 레(Re)와 결합하다, 관계를 맺다의 뜻을 가진 리가르(ligare)의 결합어로서, 다시 결합하다, 다시 관계를 맺다, 재결합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 신학자 락텐투스(Ractentus)가 종교(Religong)를 ‘신과 인간을 결합하는 유대’라고 정의하였는데, 이후 서양에서는 종교를 ‘신과 인간의 관계’라고 이해하였으며, 이는 유일신교의 특징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동․서양의 종교의 의미가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에, 근세에 와서 서구의 종교학자들은 동ㆍ서양 종교의 의미를 다 수용할 수 있는 종교의 의미를 찾게 되었고, 그리하여 종교를 ‘신성(神聖) 또는 신불(神佛)을 지향하는 행위’라고 정의 하였으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폴 틸리히(1886~1965)는 종교를 ‘궁극 관심’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궁극 관심을 셋으로 나누어 재물ㆍ권세ㆍ명예 같은 ‘준준 궁극적인 것’에 관한 궁극관심은 가종교(假宗敎)라고 하고, 민족주의ㆍ사회주의ㆍ공산주의 같은 정치 이념이라든가 사상 체계나 교리 등 ‘준 궁극적인 것’에 대한 궁극 관심을 사종교(似宗敎, 종교라고 이름하기에 가까운 종교)라 하고 ‘진정으로 궁극적인 것’에 대한 궁극 관심을 갖는 것‘을 종교 자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으로 궁극적인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삶과 죽음(生死)의 문제에 관한 문제일 것이며,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도 바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현대의 종교의 의미는 불교에서 추구하는 문제에 상당히 접근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종교하면 신을 생각하고 신을 믿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서구문화의 영향이며 이는 하루 빨리 불식되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종교의 발달과정
우리는 흔히 절대자인 신이 있어서, 이 우주가 창조되고, 그 속에 우리 또한 하나의 피조물로서 삶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 입장에 서는 한, 이것은 일단 수긍되는 설명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역사 지식은, 인간들이 원시로부터 끊임없이 신을 창조해 왔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그 문화의 여명기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다신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원시인들은 그 과학적 무지로 인해서,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모두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늘, 해와 달, 높은 산, 큰 바위, 망망한 대해 고목, 사나운 짐승, 천둥, 번개 등 어느 것 하나 공포의 대상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원시인들은 그러한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을 모두 신으로 생각하고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인지(人智)가 점점 발달하자 사람들은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 속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늘에는 천신(태양신), 땅에는 지신, 산에는 산신, 나무에는 목신, 바다에 해신, 천둥에는 뇌성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령신앙(精靈信仰, Animism)입니다. 3천년 전의 인도인은 소위 『리그베다(Rg Veda)』라는 종교 문헌을 가지고 있었거니와, 여기에 나타난 신은 무려 2,333신이나 됩니다. 고대 중국인들도 그랬고, 이집트, 희랍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다신신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들 상호간의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힘이 약한 신은 점점 도태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신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일신(唯一神)입니다. 그리고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신이 소수신화(小數神化)하여 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신의 역할과 위력은 커져서 마침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으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신이 노하면 인간에게 재앙과 고통을 안겨준다고 생각하고,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조상신 특히 시조신을 숭배하였는데, 그들은 영혼불멸을 믿어 죽은 조상의 영혼들이 후손들을 보호하여 준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인 동ㆍ식물을 숭배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토템신앙(Totemism)이며, 또 무당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주문과 제사에 의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소원을 성취해 준다고 믿었는데, 이를 샤마니즘(Shamanism)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조상신 숭배, 토탬신앙, 샤마니즘의 잔재는 아직도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우리의 제사의식은 고대인들의 조상숭배 사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마을 동구마다 당나무가 있고 정초에 마을의 대표들이 당목에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의 무사ㆍ태평을 비는 것은 토템신앙의 영향이며,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가 지은 죄를 신부님께 고하면, 신부님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죄가 사해 진다는 것입니다. 무당이나 사제 모두 신에게 소원을 빌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무당의 굿은 미신이고, 사제의 미사는 성스러운 종교의식이라고 한다면, 이는 분명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유일신을 믿고 있는 유태인들도 원래 다신교를 믿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는 십계명의 첫 번째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서 두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유대인들이 여호와만이 아니라 여러 신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원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믿고 있던 ''야훼'라는 부족신이었는데,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 민족을 구출하면서 민족의 힘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상[종교]의통일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야훼신을 그들의 민족신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왕 때 팔레스타인과 주변 여러 종족을 정복하여 왕국의 통일을 성취하여 그 아들 솔로몬왕 때에는 부와 힘의 절정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자 내란이 일어나 나라는 이스라엘왕국, 유대왕국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당하고, 앗시리아 왕국의 인구 분산 정책에 따라 민족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시 기원전 586년 유대왕국이 신바비로니아에 정복되어, 유대인 1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 바빌론에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을 ‘유대인의 바빌론 포로’ 혹은 ‘수인(囚人)기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로 있을 동안 자기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울었도다.”(시편 137:1)의 심정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야훼신이 자기 민족만을 보호하는 신이라고 믿던 민족신으로서의 신관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나타난 아모스ㆍ호세아ㆍ이사야 2세와 같은 예언자들은 야훼는 히브리인의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창조주이며 모든 역사와 인류의 심판자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성서학자는 "정의가 보편적이어야 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로운 하나님이라는 개념에서 새로운 일신교가 탄생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부족신이든 야훼신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외국인의 하느님 즉 ‘온 인류의 하나님’으로 신의 개념이 바뀌어 졌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 성격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신은 곧잘 노하는 신이요, 질투하는 신이었으며,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심술궂은 신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의하면,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 외아들 이삭을 번제에 올리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아들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나, 그가 아들을 묶어 불태우려고 할 때의 광경을 생각할 때, 그는 신앙 때문에 자식을 죽이려고 한 것과 다름없는 체험을 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에도 그 어떤 합리적 설명을 가할지는 몰라도 모르나, 그것이 신약에 나타나는 사랑의 신이 될 수 없음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호와의 성격도 예수 대(代)에 오자 크게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잃은 양을 찾는 신이 되고, 탕자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변모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학의 역사는, 시대의 진보와 발맞추어 신의 개념에 수정을 가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떠나 역사적으로 관찰할 때 인간은 부단히 신을 창조해 왔다고 할 만합니다.
세계 모든 종교가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지만 불교는 석가모니가 6년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비로소 이 세상에 탄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는 다른 종교와 그 출발점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4. 종교의 유형(類型)
(1) 유신교(有神敎)
유신교는 다시 다신교(多神敎)와 일신교(一神敎)로 구분 되는데, 다신교로는 인도인들이 믿고 있는 힌두교와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신교(神敎)가 있으며, 일신교로는 조로아스터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 등이 있습니다. 그중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는 한 뿌리에서 나온 종교입니다. 그러나 세 종교의 역사는 반목과 갈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일차적 원인은 신학적 이견(異見) 때문입니다.
① 기독교와 유대교의 다른 점
기독교는 유대교에 그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두 종교는 많은 부분에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천당에 대한 해석이 다릅니다. 유대교에서의 천당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갈 수 있는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이 지구에서의 이상적 삶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기독교에서의 천당은 이곳에서의 삶이 아닌 또 하나의 삶, 두 번째의 삶이 갈 수 있는 곳으로 지구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가리킵니다.
기독교에 말하는 천당은 하나님의 나라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정신적ㆍ영적 세상을 가리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란 이 세상 아닌 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는 소식이며, 우리도 그곳에 가서 살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둘째, 유대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신의 구현이 아니며, 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 유대교가 『모세오경』의 율법성에 치중한다면 기독교는 그러한 율법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 즉 예수의 탄생, 구세주의 나타남에 바탕을 둡니다. 예수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인간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이 지구상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내려온 신입니다. 그래서 그를 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동정녀(童貞女)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예수가 살아있는 동안 보여준 기적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였음을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로서 믿습니다.
셋째, 유대교는 오로지 유대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임을 전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동등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형제와 같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의 평등사상, 즉 모든 인간이 똑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생각은 기독교의 사랑정신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같이 아버지로 갖고 있는 형제ㆍ자매들의 관계에 있으므로, 남들의 고통과 즐거움을 나의 고통과 즐거움으로 삼아야 하며, 나를 아끼듯이 남을 아껴야 합니다. 이와 같은 희생적인 아낌과 위함의 마음 혹은 행위가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도덕적인 차원이 있고, 그것이 중요하면서도 a다른 세계가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만이 참되고 영원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계 아닌 다른 세계, 영적인 세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우리의 삶은 죽음을 초월하여 영생할 수 있는 천당에 가기 위한 준비이며, 시련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건, 상황, 우리들의 행위는 앞으로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천당에 비추어서만 참된 의미를 갖습니다. 세계적 종교들 가운데에 타계의 존재를 확실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뚜렷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가르침입니다.
② 가톨릭과 개신교의 다른 점
그러면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물론 거기에는 교의상ㆍ제도상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만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가톨릭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최후의 만찬 마지막 기도에서 교회의 신비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듯이, 교회는 성삼위 사랑의 지속적인 현현이며, 교회의 목적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성화시키고 성삼위 사랑의 친교 안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계제도, 즉 교황ㆍ주교ㆍ사제ㆍ평신도를 갖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도 그리스도가 교회에 맡긴 임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기독교 개혁과 더불어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하면서 당시의 교회에 있었던 여러 가지의 폐단과 함께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참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으로 맺어진 신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도 개신교회라는 조직이 있고, 세례와 견진(믿음 안에서 견고해 짐)ㆍ성찬(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을 기념하고 그리스도가 바로 ‘생명이요 부활’임을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증거하는 데 목적이 있음)과 같은 의식은 인정하지만, 교회조직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에 의해서 인간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하나의 조직이나 제도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권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성서 해석에 관하여 의문이 생겼을 때, 그 해석은 각자의 양심에만 맡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가톨릭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완성된 교리를 근간으로 삼았는데, 그 핵심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의지의 자유와 함께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힘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는 이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신의 은총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불가결의 수단인 성사(聖事)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개혁가들은 바울의 서간(書簡)에 입각한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사악한 것이며 선행을 할 수가 없고 사람은 완전히 신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죄의 이론, 인간의 완전한 타락, 의지의 예속성 등에 바탕을 둔 보다 원초적인 기독교로의 귀환을 주장하여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교리나 의식을 반대하였습니다.
셋째, 가톨릭에서는 인간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사제에게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하여야 하고, 사제가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빌어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에도 응답해 주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넷째,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을 믿고(영세를 받고) 선행을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선행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며 인간은 신의 은총을 통해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죄 많은 인간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사랑에 의해서 의로워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칼뱅은 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으며, 어떠한 인간행위로도 그것을 변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현세의 생활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선택받은 자에게 올바르게 살아갈 의욕을 심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자기의 뜻을 실현시킬 지상에서의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택받은 자는 현세에서 물러나 조용히 신의 은총을 즐길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완수하기 위한 성도로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 안에 있는 죄악과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성도들은 스스로의 구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세속적인 직업에 근면하게 종사해야 하며, 동시에 일상생활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는 당시 경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중산계층의 호응을 받게 되어 근대적 직업관과 생활윤리의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③ 이슬람교의 교리적 근거
기독교 교리의 뿌리를 유대교에서 찾을 수 있다면,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그 교리적 근거를 발견합니다.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가 궁극적으로 다 같은 바탕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유일절대자(唯一絶對者)로서의 인격적 신을 믿음으로써 시작됩니다. 또한 이슬람교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왕국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는 기독교에 더 가깝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는 배타성ㆍ독선성을 배척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며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마호메트의 가르침,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죽어서 하나님의 왕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의 보편성,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강조하는 점에서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구현, 인류의 구세주로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여러 예언자 가운데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슬람교가 이번에는 기독교보다 유대교에 가깝습니다.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 마디로 말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 같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전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위의 두 종교에서는 참된 계시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계시, 참된 계시는 오로지 예언자 마호메트를 통해서만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호메트는 ‘예언자의 봉인(the seal of prophets)’을 뜻하게 됩니다. 마호메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뜻을 결정적으로 전달하는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마호메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에서는 유대교의 기본적 텍스트인 『모세5경)』이나 기독교의 핵심적 텍스트인 『신약성서(新約聖書)』를 정말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텍스트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소는 보여주지만 그 뜻이 순수한 상태로 전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뜻은 마호메트에게 계시된 『코란(Koran)』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코란이라는 말은 ‘원래의 참된’ 것임을 뜻합니다. 오로지 『코란경』만이 하나님의 원래적 뜻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슬람교도들은 오로지 그들 자신만이 절대적 진리를 전달받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일신교[유일신교}을 믿는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재자(主宰者)이며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신은 절대자이며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종[인간]〕은 주[하나님]를 믿고 따를 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일신교서 말하는 신[창조신]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서 먼저 중세유럽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세유럽은 기독교가 지배했던 신본주의 사회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천지와 인간은 신[ 하나님]이 창조하였으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죽어서 하나님의 곁[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가치관이요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리에 배치되는 여하한 사상이나 학문이 발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세 때 새로운 사상이나 과학적 이론을 주장하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된 사람이 무려 3,000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을 부르짖는 기독교가 얼마나 독선적이며 배타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세사회가 무너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세기 중엽, 기독교인들의 성지라고 하는 예루살렘을 셀주크 투르크족이 차지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자 교황 우르반 2세가 성지회복을 이유로 십자군을 조직하여 1096년부터 1270년까지 근 200년 간 전후 10여 차례에 걸쳐 성지회복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단순히 전쟁의 실패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함께 로마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봉건지주 계급이 몰락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었고, 르네상스ㆍ종교개혁이 일어나는 등 사회 전반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란 말은 원래 재생(再生)을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에 의하여 단절되었던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문화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 짐에 따라 인간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고 새로운 인간관과 자연관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를 ‘인간과 세계의 발견이라고도 하며, 그것은 서양 근대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종교나 신학적 권위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탐구정신은 새로운 사상과 학문, 과학을 낳아 인류역사는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으니, 중세이후 인류역사에 빛을 남긴 사람은 대부분 반(反)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다윈은 진화론을,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을 내세웠는데, 이는 성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당시 기독교적인 인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근세 인류에게 던져준 ‘3대 충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 문제에 대해서 중세 때,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결합해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했으나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팬을 꺾어 버렸고, 이후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갖은 방법과 비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으나 확실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와 근세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신의 존재문제는 논증할 수 없는 것을 철학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렸고,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으며, 20세기 최대의 석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저서 「나는 왜 크리스챤이 아닌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세상 만물들은 다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의 고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침내 제1원인에 도달한다. 이 제1원인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처럼 원인이 없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세계도 원인이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며, 신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하였습니다.
몇 해 전 영국 런던에서는 ‘세계과학자 대회’가 열렸는데, 세계에서 저명한 과학자 및 신부ㆍ목사ㆍ신학자들이 다수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이 과학자 대회는 대회를 마친 후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우주과학 시대에는 신(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가 앞으로 존속할 수가 있는가? 불교와 같이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과학자 대회는 이렇게 신은 허위이며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다는 중대선언을 했습니다. 신이란 애시당초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창조한 것입니다. 즉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효녀 심청이나 정절의 여인 성춘향, 정의의 사나이 일지매는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그러한 인물들이 이 사회에 필요했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 졌듯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신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신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2) 무신교[無神敎]
이런 신중심의 종교에 반대되는 노선을 취하는 종교[사상]에 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소위 무신론(無神論)이라는 종교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무신론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대표적인 것은 유물론적 무신론일 것입니다. 이런 사상에 입각해 있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이므로, 우리들은 비교적 그 이론에 생소한 편은 아니거니와,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사상은 고대부터 있었음이 사실이었습니다.
인도의 경우 그 좋은 전형은, 아지타(Agita)가 주장한 유물론일 것입니다. 그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원소만이 진실한 실재며, 독립상주(獨立常住)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는 한, 신 같은 것이 인정될 수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근대의 유물론적 무신론도, 결국은 이런 사고형(思考型)에 속한다고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인격신 대신, 우주 창조의 어떤 원리를 인정하는 입장이 있어 왔습니다. 다신교이던 인도의 재래종교는 우파니샤드(Upanisad)에 오자 만물생성(萬物生成)의 원리로서 브라흐만(brahman)을 생각하였고, 고대 중국인들은 같은 원리로서 천(天)을 인정한 따위가 그것입니다. 인격적 원리에도 생각이 미쳐서, 인도인은 아트만(ātman), 중국인은 성(性)이라는 것을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자아ㆍ영혼의 뜻이던 아트만은,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체(本體)’ ‘만물에 내재(內在)하는 영묘한 힘'을 의미하는 술어가 됨으로써 절대시되고, 드디어 아트만은 브라흐만 자체라는 주장이 강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컨대 현상계의 밑바닥에는 그 잡다한 것을 통일하고 지배하는 유일자(唯一者)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던 것이니, 이 브라흐만(Brahman), 즉 범천(梵天)이라는 신으로서 숭배되기에 이른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같이 인도의 그것이 다신교에서 출발하여 결국은 유일신론으로 돌아간 데 대해, 중국의 천(天)은 길이 천지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남은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천을 인격화한 신앙, 이를테면 도교의 옥황상제(玉皇上帝)숭배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고도한 신앙에까지 승화되지를 못하고. 민속신앙의 영역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었던 점에서, 천을 원리로서 파악하여 그 특유 교학을 전개시켜 간 유교와 대결할 위치에 서 본 적이 없었다고 해야 합니다.
유교에서는 천에서 받은 것이 우리 인간의 성(性)인 바 이 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中庸). 이리하여 천은 도덕의 근거가 될 수 있었으나, 항상 거기에 머물렀을 뿐 인격화되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도의 브라흐만이 처음부터 종교적 요구에서 모색된 결과인데 비해, 중국의 천(天)은 어디까지나 도덕론적 요청에서 생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불교의 입장
표면상으로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불교의 창시자로 기억되지만, 실제로 그는 불교의 창시자이기 이전에 종교개혁자라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힌두교를 개혁한 것이 먼저이고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발생은 그 결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3억이 넘는 자연 신들에게 생사화복을 빌면서 인간의 운명을 그들에게 맡기는 힌두교의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민간신앙을 거부하고, 인간의 운명을 자신 스스로 짊어지는 인간 중심적인 종교를 창시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하니 나 외에 따로 주인은 없네. 그러므로 마땅히 나를 다루어야 하나니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법구경, 380)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신 중심적인 종교들을 배격하고 인간 중심적인 삶을 천명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의인화된 그 수많은 자연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운명의 주체가 신 중심에서 인간으로 전환되었기에 업보를 강조하는 전통 힌두교의 수동적이고 숙명적인 윤회설보다는 인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보다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윤회설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피난처이다. 다른 누가 피난처가 되겠는가?”라고 말했듯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제자들 각자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서 신과 같은 초월적인 대상들에게 조차도 도움을 구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은 우리들 각자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계발해서 우리 스스로 해탈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사용하여 그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자력적인 종교로서의 불교의 진정한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5. 종교의 기능
종교적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종교를 통해서 얻기를 원합니다.
스마트는 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 걸까? 사물의 내적인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렇게 과학이 다 해결해 줄 수 없는 물음들을 늘 제기한다. 이는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며, 고통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일까? 종교는 이런 물음들에 대해 깊이 있는 견해를 제시해 주는 영적 체험과 상징을 갖고 있다…. 자연의 색깔과 형태 자체는 부분적으로 인간의 의식이 낳은 산물이다. 자연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자연을 만든다. 종교는 이렇게 의식이 우주 안에서 수행하는 신비스러운 중간적 역할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준다.”
반면 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를 인간적인 산물로 바라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마르크스입니다. 그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종교가 사회의 문제나 모순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달래주기만 하는 거짓된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된 의식으로서 종교는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사회적인 병리현상을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혼동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프로이트는 종교가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 강박 신경증”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즉 종교는 병적인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종교가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일까요? 「완전한 진리」의 저자, 낸시 피어시는 이러한 사실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녀는 종교는 우리의 정신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위한 보약이라고 역설합니다. 또 하나의 감동적인 예는 작고한 데이비드 라슨의 업적인데, 그는 홀로 종교와 건강이란 주제로 의학계를 뒤집어 놓은 인물입니다. 정신의학을 배우던 대학원 시절, 그는 그 분야를 떠나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입장은 천편일률적으로 종교적 믿음이 정신 질환과 연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라슨은 연구를 계속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실제 연구 결과들이 종교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연구 대상자들 가운데 신앙심이 더 깊은 자들은 병든 집단이 아니라 건강한 집단에서 나타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라슨은 독자적으로 연구를 시작해 마침내 국립 보건연구소를 설립했고. 현재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우울증, 자살, 가정의 불안정, 마약 및 알코올 남용, 기타 사회적 병리 면에서 발병 비율이 더 낮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종교적 믿음이 더 나은 신체 건강과도 상관관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암으로부터 고혈압과 심혈관 질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질병과 관련해 더 낮은 발병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속도도 신앙 있는 사람이 더 빠릅니다. 사망률조차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의료 전문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특별히 종교는 다가올 죽음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아주 강력한 그 무엇입니다. 죽음에 관한 종교적인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줄 뿐만 아니라 그 희망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6. 종교의 구성 요소
보통 종교의 구성요소는 종교의 주체와 객체, 주객과의 관계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를 믿는 인간은 주체이고, 종교는 인간에 의하여 믿어지는 것이므로 객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주객이 상호 연관하는 것을 주객과의 관계라 합니다.
(1) 종교의 주체
종교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고, 신을 객체로 보는 것이 원칙입니다. 종교의 주체를 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계시종교(啓示宗敎)를 고조하는 사람들이 종교는 신의 계시에서 생긴 것이므로 인간은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을 뿐이라는 견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인 이상, 종교의 주체는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2) 종교의 객체
종교의 객체는 종교에 따라 다르다. 하늘, 해, 달, 별, 암석, 산천, 풍우, 뇌전(雷電), 초목, 새, 짐승 등 자연물을 신앙하는 것도 있고, 자연 또는 자연현상 속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신으로 숭배하는 다신교적 정령신앙(精靈信仰, Animism)도 있으며, 조상신 특히 시조신을 숭배하는 조상숭배신앙도 있고,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인 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템신앙(Totemism)도 있으며, 무당이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주문과 제사에 의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소원을 성취해 준다고 믿는 샤마니즘(Shamaanism)도 있습니다.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와 같이 유일(唯一)신을 믿는 종교도 있고, 불교와 같이 부처님(佛)ㆍ보살님을 신봉하는 종교도 있으며, 유교와 같이 부모ㆍ조상ㆍ성현군자를 받들어 모시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 해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앙 행태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기독교는 성부[하나님]와 성자[예수님]와 성신[성령]이 한 몸이라는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반하여,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그리스도는 물론 마호메드 자신의 신성(神性)도 인정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일신교 사상입니다.
(3) 주객(主客)과의 관계
주객과의 관계도 기독교와 같은 신본주의 종교와 불교ㆍ유교ㆍ도교와 같은 인본위 종교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신본위 종교에서는 신(神)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직접 주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즉, 주ㆍ종(主從)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이런 절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경우, 자기 자신이 바로 만유의 주체이며 인간의 행ㆍ불행 또한 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는 자기 책임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4) 교회와 승가(僧家)
종교의 구성 요소의 하나로 교회나 교단, 승가를 들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의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하고 신자들은 교회의 지체(肢體)라 하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하여 반드시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불교의 승가는 출가와 재가로 분리 하지만 어디에 있든지 붓다의 화합정신에 잘 순응하는 사람이면 그를 승가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출가한 독신 비구라도 화합할 줄 모르면 승가라고 할 수 없고, 비록 세상에 사는 거사(居士)라도 화합할 줄 알면 진짜 승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불교승단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유신적 종교가 신과 인간과 교회에서 실행되듯, 불교도 붓다와 법, 승가가 하나의 종교적 사상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7. 올바른 종교 선택의 중요성
지금까지 살펴 본바와 같이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인들은 저마다 자기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가 참된 진리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종교 선택이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를 제대로 알고 선택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친구 따라 절에 가면 불교 신자가 되기 쉽고, 교회에 가면 기독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애초에 조그만 계기로 종교를 선택하게 되지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관ㆍ인생관ㆍ내세관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교의 선택이 참으로 중요하다하겠습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에도 1000원, 2000원 짜리 물건을 살 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4~5만 원 짜리 물건을 쌀 때에는 보다 신중을 기울이며,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등 값 비산 물건을 장만할 때에는 어느 회사 제품이 좋은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고, 주위에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을 구입하고자 할 때에는 더욱더 신중을 기합니다. 왜냐하면 집을 장만하는 일은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집을 장만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올바르게 종교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종교인 중에는 무턱대고 믿는 맹신자(盲信者)가 있는가 하면, 이성을 잃고 믿는 광신자(狂信者)도 많이 있습니다. 종교는 바로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올바른 종교인지 판단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나,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구비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그 종교의 교리가 진리이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구약은 말 할 것도 없고, 신약성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예수가 물위로 걷고, 죽은 지 7일이 지난 사람을 살리고, 빵 한 조각으로 5,000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예수의 신성(神性) 문제ㆍ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ㆍ처녀 잉태설ㆍ육체적 부활설 등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가 잘 지적한 것처럼 “믿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유교의 경우에도 천(天)의 개념이나 우주의 근원, 인간의 본성 등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쳐 사상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 종교의 교리가 보편타당성(普遍妥當性)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인도의 힌두교, 일본의 신도, 우리나라의 단군교 등의 신들은 대게 그 민족만을 위하는 신들이므로, 이러한 종교는 민족[국가]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고, 따라서 보편타당성을 가진 종교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셋째, 그 종교의 교리가 영구불변성(永久不變性)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야훼 하나님은 원래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는 유대민족의 한 부족신이었는데, 모세에 의해 유대 민족신으로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6~8세기에 나난 아모스ㆍ호세아ㆍ이사야 1세ㆍ이사야 2세와 같은 예언자들에 의해‘온 인류의 하나님’으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종교가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증득한 후 탄생한 종교이므로 처음부터 궤(軌)를 달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