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처 : 미상
신용승선생님의 워드에서 바로 길어올린 따끈한 글입니다.
행간과 오타를 고쳤습니다.
이땅에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있는가?
요즘 항간에서 보수가 옳으냐 진보가 옳으냐 하면서 말도 많습니다.
이념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날짐승의 날개가 어느 쪽이 더 좋은가 하는
우문과 같습니다. 역사상 한 나라가 50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입장에서
생각 해 보면 고루한 유학자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보수주의자 들은 전통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지켜야 할 내용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보수주의자들은 뿌리 없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보수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뿌리 없음이며
전통적 보수주의와의 단절입니다.
개나 도나 다 보수주의자라고 목청을 돋우는 이 부박한 시대에 우리는 전통 보수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장엄하게 살아져갔는지 돌아봅시다.
이건창(李建昌) 그는 동학교도들이 난을 일으키자 짐승을 사냥하듯 이들을
소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5살에 글을 지은 신동은 조선 전기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있고
후기에는 명미당 이건창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건창은 소문난 신동이었습니다.
그는 15살에 어린 나이에 과거에 올라 20대에는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암행어사로 또는 민난을 수습하는 안찰사로 이건창은 보통 고을 원님이 아니라 지금의
도지사 격인 관찰사를 2명이나 파직시킨 강골强骨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고종이 지방관을 임명할 때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을 보낸다.' 고 엄포를
놓았다고 합니다.
동학 농민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을 난을 일으키게 까지 한
학정을 더 매섭게 비난한 사람이 이건창 입니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고려와 조선을 통해 아홉 삶의 문장가를 뽑았을 때
그 마지막을 장식한 이가 바로 이건창 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조선 후기 사상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은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 당시
아우와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시원은 강화도령이었던 철종이 임금이 된 뒤 강화에 어진이가 살고 있다던 옛 소문을
듣고 등용하여 잠시 이조판서를 지낸바 있었습니다.
프랑스군대가 강화에 상륙하자 가족들은 그에게 울면서 피난 갈 것을 청하였습니다.
78살의 노령에 이질이 걸려 몇 달째 자리보전을 하고 계시던 이시원은 피난이
무슨 말이냐며 관원들은 다 도망을 가 순사한 자가 하나도 없는데 향대부(鄕大夫)마저
도망을 가면 후세에 사가들이 무어라 하겠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는 들것에 실려 조상의 산소를 돌아보고 동생과 함께 약을 먹고 태연히 담소하다가
3통의 유서를 남겼습니다.
한 통은 손자 이건창에게 다른 한 통은 일가 식솔들에게 그리고 약 기운이 퍼져 채
끝내지도 못한 마지막 한 통은 막내아우에게.
15살 어린 이건창은 이 장엄한 예식을 목격하며 자랐습니다.
그렇다고 이건창이 할아버지의 자결에 발목을 잡혀 위정척사파(爲政斥邪派)나
수구파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중국사정에 정통했고 개화당의 인물들과도
깊이 교류했습니다.
이건창은 개화당의 사상적 지주었던 姜瑋(강위)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강위와 함께
바깥 세상을 돌아보기를 원 했으나 강위가 나이 들고 병약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개화파는 갑신정변 때나 갑오경쟁 때 나 학식과 덕망이 높고 바깥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이건창과 손을 잡고 일 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그 협력을 거절했습니다.
이건창이 정녕 못 견뎌한 것은 개화 그 자체가 아니라 개화파의 부박함이었습니다.
김옥균(金玉均)의 경솔함이나 어제의 신하였던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시민이 되어 돌아와
임금 앞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뿌리 없는 태도를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건창은 아닌 밤중에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대가 기습해 들러와 서울에 요소와 궁궐의
안팎을 점령한 것이 무엇이 그렇게 경사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라의 체모를
뜯어고친다고 하니 이것이 욕이 아니고 무엇이냐 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고종이 높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그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거듭되는 사직소에 고종이 벼슬을 살테냐 귀양을 갈 테냐 양자 택일하라 하자
그는 태연히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뒤 날 돌아오자 않은 밀사가 된 이상설(李相卨)선생이 신 새벽 남대문 밖에 주안상을
차려놓고 귀양길을 떠나는 이건창 선생에게 큰절을 올렸답니다.
이건창 선생과 그 벗들은 단발령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 이유는 내 목은 잘라도 내 상투는 못 자른다던 위정척사파의
거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건창 선생의 6촌 동생으로 위당 정인보(鄭寅普)를 키운
이건방(李建芳)은 애당초 상투를 자르고 안 자르고 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이건방의 벗 김택영(金澤榮)이 중국 망명 중에 청나라 사람들처럼 변발을 하고 지낸 것을
보면 이건방의 말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보수주의자 이건창선생이 1898년 47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보고싶어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다던 벗이 바로 800리 밖 전라도 구례의 산 꼴 촌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입니다.
매천야록을 남긴 역사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인 황현선생도 동학난을 이르킨 무리들을
깡그리 잡아 죽여야 한다던 보수주의자였습니다.
황현선생은 시골선비라 차별을 받아 과거에 떨어지고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부모님의
원을 풀었으나 도무지 벼슬길에 나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깨비 나라 미친놈들 속에 들어가 미친 도깨비가 되라 하느냐며 황현선생은
초야에 묻혔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황현은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李建昇)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습니다. 운경(雲卿은 황현의자)은 아직도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소,
나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구차하게 살아 있을 따름이외다. 라고 편지를 띄우고
이건승은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약을 먹고 자살하려 하였으나 식구들이 눈치를 채고
약사발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때 정원하는 약그릇을 빼앗기자 칼로 자결하려고 날이 선 칼을 잡고 가족들과 승강이를
하다가 한 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기정 사실로 된 1909年 황현선생은 이미 땅속에 누운 이건창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 천리길을 걸어 그의 무덤을 찾아 시를 읊습니다.
그대 홀로 누운 것 서러워 마소 살아서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던가
(無庸悲獨臥 在日己離群)
이 시를 벗에 무덤에 남기고 고향에 돌아온 황현선생에게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을 때 조선후기 최대의 문장가요, 원칙주의자요, 보수주의자인 황현선생은
아편을 준비했습니다.
그 밤 황현선생은 마지막 절명시(絶命詩)를 짓습니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
(秋燈按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몇 해전 첫 손자를 보았을 때 갓난 어린 아이에게 글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축원 해 주셨던 황현선생 이었습니다.
벼슬을 살지 아니 하시고 평생을 포의(布衣)로 사신 황현선생 이었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또 황은(皇恩)이 망극해서도 아니며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500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 날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통탄 할 일이
아니겠느냐며 치사량의 아편을 먹었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지만
오늘 참으로 어찌 할 수 없어 목숨을 끊는다고 절명시(絶命詩에 썼습니다.
그런 황현선생이 약 기운이 퍼져갈 때 동생에게 웃으며 고백합니다.
죽는 것도 쉽지 않아 내가 약을 마시려다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어
내가 그처럼 어리석었다네 보수주의자 이건창은 병으로 황현은 음독으로 각 각
시대와의 불화를 마무리하자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동지 정원하와 홍승헌(洪承憲)은
멀리 만주로 망명의 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씩 시신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대의 명문가의 후예들인 보수주의자들이 신문학을 배우는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자금을 대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정작 자신들의 몸을 누일 관 하나 살 돈도 없어 가난한 동포들이 한푼 두 푼
모아 마련해 준 관에 몸을 누이고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도저히 가슴이 아파 단숨에 읽을 수 없는 민영규(閔榮珪)선생의 강화학파
최후의 광경이란 글이 보여주는 보수주의자들의 장엄한 최후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선조들 중에는 또 다른 황현선생과 같은 원칙주의이며 보수주의자들이
수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기꺼히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민족의 숭앙을 받은 보수주의자가 살아 졌을까요
일본 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우파 즉 보수주의자들은 자기민족을 위해 자기 개인의
모든 이익을 서슴없이 버리는 예를 많이 봅니다.
로일전쟁 당시 일본이 어려운 승리를 했지만 무수한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은 일본의 국민들은 흥분해서 부두로
모여 들었습니다.
로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라 오는 육군 총사령관 노기대장(乃木大將)에게
우리들의 자식을 살려내라는 항의를 하기 위해서
그런데 배에서 내리는 노기대장의 어깨의 전사한 3형제에 아들의 유골이 들려 있는 것을
본 일본의 어머니들은 서로 부둥켜 않고 울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 벤플리드 장군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로 전사했으며
중국인민공화국 주석 毛澤東의 아들도 남의 나라전쟁에서 전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기득권을 누리던 소위 보수라는 사람들의 자식은
얼마나 전쟁터로 나갔습니까?
지금도 어느 조사 통계에 의하면 국회의원에 48%가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번 대선 당시 모 당 입후보자의 두 자식은 다 병역면제를 불법으로 받았다
아니다 로 씨끌버끌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한 보수주의자가 두 자식을 불법 병역면제 시켰습니다.
이것이 어찌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의 이익은 다 챙기고 국가가 불행한 운명에 놓이면 봇짐 쌓아 도망치는 보수주의자들
진정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수도 서울을 단 3일만에 인민군에게 내주고 우리 국군이
의정부에서 밀고오라 가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녹음방송(그당시 국민은 녹음기가 무엇인지 모름)을 틀어 놓고 대전으로
야밤 도주 했습니다. 그들은 한강다리를 끊고 국민을 적지에 내 버린 채 도망쳤다가
돌아와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습니다.
1997년 말 외환 위기를 당했을 때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면서
(이대로)를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냉전과 민족대립을 넘어 화해로 가는 마당에 이들은 또 이대로를 외치며
길을 막는데 열을 올립니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지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닙니다.
군사 독재시절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유린당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은 오히려 진보 주의자들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에 앞서 보수세력이 수구세력과 스스로 결별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나라를 외세에 빼앗기고 나서 오직 나만 잘 살면 조국도, 민족도, 역사도,
생각지 않고 내 기득권을 지키기만 하는 수구만 남은 현실이 서글퍼집니다.
그러니 박정희가 저격당하고 그 많은 보수주의자중에 스스로 자기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는 전통 을 국민 앞에 단 한사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 아 그리운 보수주의자요 진정 목숨을 걸고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는
이 땅에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