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정제두 이후, 첫째 강화학에는 새로이 우리 역사와 언어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치밀한 연구경향이 나타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이시원의 〈국조문헌 國朝文獻〉, 이건창의 〈당의통략 黨議通略〉은 오늘날에도 매우 자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서이며 이광사의 〈오음정서 五音正序〉, 유희의 〈언문지 言文志〉 등은 우리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오늘날 한국학의 기원을 여기에 둘 수도 있다. 또 이광사는 원교체(圓嶠體 : 원교는 이광사의 호)라는 매우 조선적인 서체(書體)를 창안했다. 이것은 중국적인 것에 심취한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秋史體)와 대조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둘째로 강화학 내에서는 노장(老莊)사상 및 불교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충익은 〈초원담로 椒園談老〉라는 저술을 지었으며 신작에게도 노자(老子)에 대한 연구서가 있었다. 노자와 장자(莊子)에 대한 연구는 강화학파에 앞서 같은 소론계인 박세당(朴世堂)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으며 강화학파는 이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충익은 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진언집 眞言集〉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강화학파의 불교와 노장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이것을 통해 유교적 한계 또는 중세적 지배체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셋째로 강화학파에서는 19세기초에 이르러 유교 경학(經學) 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경향 및 정약용의 학문을 흡수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신작은 〈시차고 詩次故〉·〈역차고 易次故〉·〈서차고 書次故〉라는 저술을 지었다. 이것은 산일(散佚)된 유교 경전 주석을 체계적으로 집일(集佚)한 것으로 대체로 한대(漢代) 경학의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강화학이 단지 양명학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작은 정약용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했으며 이 인연을 계기로 이상학이 정약용의 학문에 대한 연구를 한다. 뒤에 이건방은 〈경세유표〉에 서문을 쓰고 정인보가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를 간행한 것 등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정약용의 학문은 많은 부분이 강화학파에게 수용되어 이들을 통해 근대의 우리에게 전해졌으며 강화학 자체도 정약용의 학문과 결합하는 가운데 민중적 성격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결합된 학문이 바로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사상적 토대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