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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정하고”, 유사 신앙에서 구원하소서!(왕상 12:25-33)
1. 오늘의 말씀 : 왕상 12:25-33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면 주의 길은 즐거운 길입니다. 내가 앞서가면 환난과 곤고 만이 가득한 사망의 길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더디 깨닫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로 말미암아 된 일을 육신의 생각과 해법으로 대처하니 무익한 괴로움이 나를 덮치나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주여,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을 알게 하소서. 하여 즐거이 주를 따르게 하소서.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니옵니까? 파도처럼 쉼 없이 밀려오는 염려를 감사함으로 주께 맡기나이다.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소서. 말씀 앞으로 가오니, 내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이시여, 말씀을 조명하사 우둔한 자로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다윗과 맺은 언약대로 말씀을 떠나 범죄한 솔로몬에게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의 형벌이 임하였다. 그것은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는 것이었다. 한때 솔로몬에게 중용되었던 여로보암이 10지파를 다스리게 되었다.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다스렸다. 르호보암은 이스라엘의 통합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스마야 선지자를 통해 저지당했다(12:24). 이스라엘은 분열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11:31-32).
왕상 12:25-33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사적(事績)이다. 여로보암은 22년간(BC. 930-909년) 북왕국의 왕으로 재위하였다(14:20). 그는 북왕국의 거점 도시인 세겜을 요새화하였고, 부느엘을 새로 건설하였다(25절). 이 같은 여로보암의 치적은 한 구절로 끝난다. 나머지 26-33절은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에 관한 언급이다. 이것은 열왕기서의 저자의 관점에서 왕이 어떤 치적을 남겼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은 북왕국의 유서 깊은 도시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 난 후 그곳을 요새화하였다.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도시이며 북왕국의 동서를 가로질러 지켜 줄 수 있고, 므낫세의 언덕들로부터 벳산에 이르는 길을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나중에 수도가 디르사로 옮겨지고(14:17), 다시 사마리아로 옮겨졌지만(16:24), 그 도시들은 세겜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로보암은 세겜을 요새화한 후 부느엘을 건축하였다. 이 도시는 길르앗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얍복 강변이었다. 이곳은 야곱이 천사와 밤새 씨름한 후 명명한 곳이다(창 32:22-31). 부느엘은 길르앗에서 다메섹으로 이어지는 무역상들이 사용하는 길에 있었다. 여로보암은 아마도 북동쪽이나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적들로부터 길르앗을 보호하고자 부느엘을 요새화한 것으로 보인다.
26-33절은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을 언급한다.
여로보암은 세겜을 요새화하고 부느엘을 건설하여 내치의 안정을 기하고 외치를 든든히 하였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나라가 다시 다윗 가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26절). 그에게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올라갔다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옛 주인인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그들이 자기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로서 들 수 있는 생각이지만, 그가 10지파를 다스리게 된 하나님의 말씀과 역행하는 육신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그의 나라는 오직 다윗이 한 대로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을 지킬 때 견고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11:37-38). 그러므로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왕국의 운명은 백성들의 행동이나 르호보암의 강성함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처음 그에게 주어졌던 말씀을 망각하고 육신의 생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문제는 그에게 일어난 육신의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진 데 있다. 여로보암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상 2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너희에게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계신다”(28절).
그리고 여로보암은 북왕국 백성에게 이제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너무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금송아지 하나는 이스라엘의 최북단 ‘단’에 두고 다른 하나는 북왕국의 최남단 ‘벧엘’에 두었다(29절). 이것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으로 간주하며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이스라엘 안에서 죄가 되었다. 백성들은 저 멀리 단까지 가서 거기에 있는 그 한 송아지를 섬겼다(30절).
여로보암은 또 여러 높은 곳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다(31절). 율법에서는 아론의 혈통에서 난 자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출 28:1). ‘일반 백성’은 원어적으로 ‘백성들의 끝으로부터’이다. 그 뜻은 ‘백성들의 모든 계층으로부터’이다(NEB).
또한, 여로보암은 유다에서 행하는 절기와 비슷하게 하여, 8월 15일을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세운 제단에서 그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제사를 드렸고, 그가 만든 벧엘의 산당에서 제사를 집행할 제사장들도 임명하였다(32절). 왕은 자기 마음대로 정한 8월 15일에 벧엘에 세운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다(33절).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를 이렇게 제정하고, 자기도 그 제단에 분향하려고 올라갔다(33절).
유다 백성들은 율법이 정한 절기대로 7월 15일에 초막절을 지냈다(레 23:34). 그러나 여로보암은 율법이 정한 절기와 ‘비슷하게 하여’ 8월 15일로 절기를 정해 지키게 하였다. 이렇듯 여로보암은 제단도, 제사장도, 절기도 비슷하게 하는 ‘유사 신앙’을 제정하였다.
여로보암은 정치적 판단으로 유사 신앙을 제정하였으나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 엄중한 죄악이었다. 북왕국은 BC. 721년 앗수르에 멸망하기까지 210년간 유사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북왕국의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그들이 치적이 어떠하든 동일하였다. 그것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또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였다(15:26, 34; 16:31; 22:52; 왕하 3:3; 13:2; 14:24; 15:9, 18, 24, 28). 심지어 바알 신앙을 진멸한 예후조차도 여로보암의 길로 가는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왕하 10:28-29).
사실 여로보암은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그런 끔찍한 죄는 짓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어겨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기게 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을 막고 벧엘과 단의 제단에서 예배하게 하였다. 게다가 절기와 제사장을 임의대로 정하였다. 백성들은 예루살렘까지 가는 번거로움을 해소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지 못하여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로보암이 제정한 유사 신앙에 굴복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신실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레위 사람들과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을 지킨 여러 지파 사람들이다. 바로 이 사람들로 인해 남왕국 유다는 초기 3년 동안 강성하게 되었다.
“레위 사람들이 목장과 소유지를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온 것은,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고, 따로 제사장들을 세워서, 여러 산당에서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 가운데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마음을 굳힌 이들이, 주 조상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 그들은 유다 나라를 강하게 하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왕권을 확고하게 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삼 년 동안뿐이었다. 르호보암이 다윗과 솔로몬의 본을 받아 산 것이 삼 년 동안이었기 때문이다”(대하 11:14-17).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셨다(요 3:13). 그는 만물 위에서 만물 아래로 오셨다(요 3:31). 그는 만물 위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역사적 계시자로 세상에 오셨다(요 1:18).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 3:15).
영생은 현재 누리는 생명이며(요 17:3), 죽음 이후 더욱 풍성히 누리며(고후 5:8; 빌 1:2),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마지막 날) 완성되는 생명이다(요 6:40). 현재 누리는 영생은 아들이 있는 곳에 아들과 함께 있어 창세전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여 그에게 주신 영광을 보는 것이다(요 17:24). 여기서 ‘아들이 있는 곳’은 ‘아버지 집’이다(요 14:2-3). 아들이 승천하신 후 보내신 성령은 영생 얻은 우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음을 알게 한다(요 14:20).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후 하나님은 오직 그곳에 자기 이름을 두셨다(왕상 9:3). 북왕국 백성이라도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 길을 막았고 유사 신앙을 조장하였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주어진 모형이며 그림자이다. 이제 아들이 오신 후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곳은 ‘아들 안’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참된 예배는 지상의 특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아들이 있는 곳(아들 안), 곧 아버지 집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요 4:21-24).
신약 시대의 유사 신앙은 아버지의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신앙의 제도와 전통을 총괄한다. 초대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 아들과 서로 사귐을 갖는 영생의 공동체였다(요일 1:1-4).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제도권에서 후퇴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신약 시대의 여로보암같이 유사 신앙을 제정한 자이다. 그는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건물을 짓고 기독교 예배를 일주일에 한 번 제의 형식으로 드리게 하였다. 이로써 신자는 매일 생명의 교제를 통해 ‘아버지 집’에 이르기보다, 제도권 교회가 제시하는 유사 신앙에 순응하며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시대 때 유사 신앙의 유혹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린 이들이 있었듯이, 신약 시대에도 유사 신앙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생명의 교제를 통해 아버지 집에 이르러 참된 예배를 드린 이들이었다. 일례로 성 바실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 반발하여 제도권 교회에서 이탈하여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그가 갑바도기아의 괴뢰메 동굴에 세운 수도원은 서방 교회의 최초의 수도원이다.
물론 기독교 공인 이후 다수의 지도자와 신자가 유사 신앙에 순응하였다. 그런데도 수면 아래에 맑은 물이 흐르듯, 시대마다 제도권의 유사 신앙에 순응하지 않으며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고, 생명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아들 안’에 거하여 그의 영광을 보는 자들이다. 비록 소수라도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생명의 역사를 지속하며 구원을 완성해가신다.
기독교 진리의 본체는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있다. 그리고 영생 얻은 자는 날마다 아버지 집에 거하는 생명의 교제에 자신을 드리고 아버지 품 안에 거하여 영생의 복락을 누린다. 이는 영생 얻은 성도 각자가 누리는 영생의 복이다.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 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나라 나 올라가 구주의(아버지) 품 안에 늘 안기어 영생의 복 받기 원합니다”(찬송가 433장 1절).
4. 나의 묵상
모든 인생은 세계내에 피투된 존재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역시 제도권 교회의 전통과 유산에 순응한다. 모든 신자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게 되면 참된 신앙에 이르게 된다.
나는 오래도록 기존의 종교성에 순응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 생명을 알기까지 유사 신앙에 순응하였다. 솔로몬 당시 예루살렘에 그 이름을 두셨던 하나님은 신약 시대 ‘아들 안’에 그 이름을 두신다.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자마다 아들 안, 곧 아버지 집에 거하여 영생의 복락을 누린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관건은 복음을 듣고 생명을 누림으로써 유사 신앙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2008년 4월 유사 신앙을 열심히 믿던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 심판의 무덤에서 생명의 말씀이 깨달아졌고,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의 교제를 지속하였다. 2010년 1년간 생명의 교제에 관한 논문을 쓰며, 복음을 통해 아버지 집에 거하는 영생이 참된 신앙임을 확증하였다.
그로부터 수년 후 2016년 6월, 지방회의 지원으로 바울의 전도 여정을 순례하였다. 첫 번 순례지는 튀르키예의 서부에 있는 갑바도기아의 ‘괴뢰메 동굴’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이곳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을 거부한 성 바실리우스가 세운 수도원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전율하였다. 논문을 쓰면서 알게 된 바실리우스의 수도원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괴뢰메 동굴은 바위산에 365개의 동굴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제정한 유사 신앙을 거부하고 바실리우스를 따라 나온 신실한 성도들은 동굴 속에 교회와 집을 짓고 참된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나는 말로만 듣던 생명의 공동체를 직접 보며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수도원은 19세기 말까지 존속되었다고 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고난의 삶을 감수하며 생명의 공동체를 지켜온 선진들의 신앙은 오늘도 생명의 교제에 투혼하는 공동체를 일으키는 힘이 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여로보암은 북왕국 10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왕위는 그가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할 때 존치됩니다.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이를 고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이 사실을 망각합니다. 그는 세겜을 요새화하고 부느엘을 건축하는 등 왕으로서 탁월한 성과를 냅니다. 하지만 그는 육신의 생각에서 나온 두려움으로 유사 신앙을 제정하고 백성들을 오도합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는 북왕국이 멸망하기까지 지속됩니다.
아버지여... 신약시대 유사 신앙은 여로보암의 유사 신앙보다 더 강고합니다.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 안에 만연한 유사 신앙은 콘크리트 장벽 같이 깨어지기 어렵습니다. 믿는 자라도 스스로 신앙의 내용을 선택할 수 없기에 유사 신앙이 전부인 줄 알고 따라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은 이제 아들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우리가 그 안에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역시 복음을 통해 영생을 알고 생명의 교제를 하기까지 유사 신앙에 매몰되었습니다. 유사품의 특징은 어떤 효력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유사 신앙도 그러합니다. 진정한 기쁨, 감사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유사 신앙에서 건지셨습니다. 복음을 통해 생명을 알게 하시고 날마다 주께 가까이 가는 파레시아를 준행하게 하십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어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도 주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6년 성 바실리우스가 세운 수도원, 괴뢰메 동굴 앞에서>
첫댓글 아멘~ 육신의 생각에서 나온 두려움으로 유사 신앙을 제정한 여로보암의 죄는 멸멍하기까지 지속됩니다. 유사 신양을 분별하고 지상의 특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닌 아들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