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까지 갔다가
다 저녁 때 버스 타고 화호리로 갔습니다.
화호리는 여러 이유로 유명합니다. 마치 익산의 춘포면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일제강점기에 많은 왜인 농업이민자들이 들어와 집 짓고 농사 지으며 살다가 떠난 대표적인 곳인 셈이지요.
그들의 거주공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대서 관심이 컸습니다.
禾湖(화호)라는 땅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벼농사를 하는 물 가' 마을. 식민지배자의 군침이 도는 곳이었겠지요.
사진으로 보시죠. 지도에 일본인농장주택이라고만 나오는 곳입니다. 화호리 마을 외곽의 언덕 위에 있습니다.
그 집의 행랑채(?)라 할 초라한 왜식 건물도 아직 그냥 있는데
저택의 입구 문을 이루던 화강암 기둥은 멀쩡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저택은 최근에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지나친 황토몰타르 칠로 원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네요.
높은 계단을 통해서만 저택의 입구로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군요.
'지배국' 사람의 위세를 한껏 자랑한 셈입니다.
아래층은 무슨 용도였는지. 개수공사 때 이 아래층도 싹 고쳤다고 합니다만, 유리문을 밀어보아도 잠겨 있고 내부는 그냥 넓은 홀입니다.
얼른 눈에 띄는 특이한 장면은 바로 화강암 축대입니다. 반듯반듯하게 잘 다듬은 귀한 돌로 축대를 쌓는 호사를 누렸군요.
본국에서는 어떤 지위를 가졌던 자인지 모르나 감히 화강암으로 축대를 쌓는 위세를 부렸다니요. 우리나라에서는 절집이나 궁궐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누릴 수 없는 사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동네 전체가 화강암을 흔하게 축대재료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가야(長屋)라 부르는, 하층민들의 한 칸 방이 연달아 있는 집도 보입니다. 이를테면 농노나 소작인들을 집단으로 기거하게 한 '닭장집' 또는 '쪽방건물'이었던 셈이지요.
이 건물도 도처에 사진으로 소개되곤 하는 건물이군요.
마을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일본식 집. 뜯고 있는지 고치고 있는지 공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왜색이 판쳤던 이 마을에서 꿋꿋이 한옥을 지켜온 이 집이 마음에 듭니다. 역시 우리 정서에는 한옥이지요.
화호리 구경을 마치고 택시를 불러 타고
신태인 내석동의 경로회관 앞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