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만났습니다, 인교 암거.
(위, 아래 사진 : 쓰레기가 떠밀려 내려와 걸린 곳이 암거의 입구. 그 아래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고.)
글자도 잘 보입니다.
과연 '大有源(대유원)'이라 썼고, 글쓴 이의 이름은 '李軫鎬'(이진호).
오랜만에 만나는 조선사람의 이름은 반갑기도 하고, 여러 느낌이 교차합니다.
글씨는, 특히 마지막 '源'자는, 일본 에도(江戶)시대에 유행하던 글씨체를 흉내낸 듯.
굵은 붓을 거의 떼지 않고 이어서 쓰는 꼬불꼬불한 서법이 특징입니다.
언제 완공되었다는 표시는 없군요.
암거의 벽은 새로 만들어 넓고 튼튼해졌고 옛 맛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글씨를 쓴 돌판은 버리지 않고 다시 붙여 둔 것이 고맙습니다.
- 호남선 선로 건너가기 -
수로 옆의 정자나무에서 잠깐 쉽니다.
이런 정자나무의 존재를 보더라도 이 수로는 처음부터 인공으로 개설한 경로가 아니라
원래 있던 자연하천을 개조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인교암거의 입구 쪽.
이제 출구쪽으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하지만 가로막고 있는 ITX 호남선 철길 때문에 그냥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
지도를 보니 철길을 따라 남쪽으로 250미터 내려가서 철길 아랫길로 빠져나가서 다시 올라와야 합니다. 또 왕복 5백미터를 더 걸어야 하는군요.
철길 따라 걷습니다. 높은 벽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철길 옆 마을은 '남교마을'.
인교와 남교, 둘 모두 '교(다리 橋)'자가 붙은 이름입니다.
이곳은 동진강 직강공사 이전에는 구불구불 흐르던 동진강 둑방을 따라 형성되어 있던 마을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다리 교자가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위 사진 : 철롯길 옆 마을이라 역시 침목의 용도가 다양하다. 대문 기둥으로 썼다.)
철길 아래로 통과하자마자 만나는 마을은, 신기하게도, 집들이 한 줄로만 쭉 직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모두 열 가구 정도나 될까요.
이것 역시 강의 둑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는 추측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봐야죠.
철롯길을 따라 다시 거꾸로 돌아와
인교암거의 반대쪽 즉 출구로 나왔습니다.
(위 사진 : 이 구조물 안에서 물길을 몇 가닥으로 나누어 보내는 일을 한다.)
(위 사진 : 힘차게 솟아 오르는 물. 휘호를 새긴 돌판.)
(위 사진 : 물을 퍼올려 수위와 압력을 높이는 것은 농어촌공사 양수장의 역할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을까.)
(마침 지나가는 호남선 열차.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입구와 출구 모두에 온전히 남아있는 돌판을 모처럼만에 만나는 셈입니다.
출구쪽 돌판에는 '用之不竭(용지불갈)'이라 새겼습니다.
"(물을) 쓰되 다하지 아니한다"라는 뜻이겠네요.
글쓴 이의 이름은...
생활문화센터에서 보았던 '송본성'을 조선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宋'씨 성을 기대하며 보았더니,
송은 송이로되 솔 松, 본은 본이로되 근본 本.
즉 왜인의 성씨인 '마쯔모또'였습니다.
이름이라 할 마지막 글자는 마모가 심하여 도저히 읽을 수 없었습니다.
생활문화센터의 사진 설명대로 '송본성'이 맞다면 성 자는 정성 誠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마쯔모또 마꼬또'가 그의 이름이었겠네요.
어느 정도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은 출구를 나와서 오히려 입구쪽보다 수위가 높아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건너편에 있는 농어촌공사 양수장이 강력하게 뽑아올려 원래 수위보다 높은 수위로 다시 흐르도록 한 것 같습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도중에 몇 번이나 이런 조작을 하지 않으면 물이 고이고 멈춰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전기 모터를 마음대로 쓰기 힘들었을 옛날에는 어떻게 이 지하 암거를 통과시켰을까요? 못내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