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별과 일곱 촛대
요한계시록3, 파라클레토스 2020.1.
세키네요시오(関根義夫)
1. 보았던 일, 지금 있는 일, 앞으로 일어날 일
요한계시록은 이제부터 드디어 본문에 들어갑니다. 그 전에 먼저 확인해둘 일이 있습니다. 1장 19-20절의 ‘보았던 일, 지금 있는 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적으라’는 말에 나오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 더 확실히 알아보는 것이 계시록 전체를 이해하는 데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책의 서두에서 확실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 모두가, 곧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또 요한에게 전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문제입니다. 먼저 ‘보았던 일’부터 바로 공부하겠습니다.
2. 주의 주, 왕의 왕
요한이 성령 충만하여, 주의 날에 자신의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를 듣고 직접 보았던 일은, 이땅에서 선교하실 때의 부드럽고 자비 넘치던 나사렛 예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너무나 담대하고 용감하며, 부활하여 활약하시는 주 예수였습니다.
지상에서는 너무나 약한 모습으로 낮게 임하셨지만,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시어 어떤 악에도 굽히지 않는 ‘주의 주, 왕의 왕’이 되어 요한의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보았던 일’이라 할 수 있지요.
3. 아시아주 일곱 교회의 지금
그렇다면 ‘지금 있는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요한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또는 책임을 맡은 아시아주 일곱 교회(에클레시아)의 동료 신자들이 놓여있는 상황을, 좋은 모습과 위험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가공할 세상의 권력 앞에 드러난 일곱 교회의 모습이 2장과 3장입니다.
4. 일곱 개의 봉인, 일곱 개의 나팔, 일곱 개의 대접
‘앞으로 일어날 일’은 4장부터 18장에, 요한은 본 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지상의 악의 세력과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치열한 싸움과 그 결말을 모두 보여줍니다.
4장은 천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 지배하는 승리와 영광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5장은, 도살당한 어린양에 의해 하나님의 두루마리에 있는 일곱 개의 봉인이 차례로 열리게 되며,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이어져, 지상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여러 재앙으로 반복하여 계속됩니다. 사실 그 모습은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세상의 역사 현실로, 요한의 눈을 통해 우리 앞에 실로 생생하게 비춰 옵니다. 그 일들을 눈앞에 대하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격렬하고 빈틈이 없는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찬찬히 생각할 때, 앞으로도 얼마나 죄로 인한 어둠과 어리석음이 반복되어 나타날지 보게 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애통함과 사람을 향한 끝없는 은혜
그런 생각으로 다시 계시록을 읽으니, 이 하나님의 잔혹하고 냉정한 모습 안에는 오히려 끝을 알 수 없는 애통함이 숨겨진 게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주 하나님은 일찍이 독생자 예수를 지상에 보내,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은 슬픔과 아픔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주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더욱더 배반의 걸음을 반복하였습니다.
만일 역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면, 인류는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지 않았을까요? 세상을 지배했던 저 거대공룡들처럼. 그러나 지금, 아직,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생존을 허락받은 것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인간은 정말로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6. 밧모의 요한에게 위탁한 하나님의 예언 말씀
요한은 자신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전합니다. 즉, 나 요한이 써서 보내는 증거의 말씀은 실로 중요한 예언의 말씀이니, 신자들의 모임에서 낭독하기를 바라며, 듣고(흘려버리지 말고 진지하게 들으라.) 확실히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왜 이런 주장을 힘주어 말하는가? ‘바로 일어날 일’이며, 그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7. 일곱별과 일곱 촛대
요한은 눈앞에서, ‘전투의 그리스도’라 할 그분이 일곱 금 촛대 중앙에 서서, 오른손에 일곱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숨은 의미를 말해줍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 천사들이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일곱 촛대가 일곱 교회를 뜻한다는 건 매우 쉬운 해석입니다. 그런데 일곱별이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라니.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공부한 표현을 참고해야 합니다. 계시록 1장 1절입니다. ‘이 계시는 바로 일어날 일을 하나님이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그리스도로부터 천사를 보내 종 요한에게 전한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결국 계시라는 중요한 정보를 그리스도가 천사에게 전하였고, 천사는 다시 요한에게 전하였으니, 천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요한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천사들’은 각 교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주는 중요한 영적 정보를 전하는 중개자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여기서, 주 그리스도는 영적 말씀을, 중개자(천사)가 아닌 요한이 교회에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8. 마침내 우리에게도!
주 그리스도로부터 요한에게 전해진 ‘증거의 말씀’이 하나하나 아시아주의 일곱 교회에 전해졌고, 지금 마침내 우리도 계시록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순서는 먼저 에베소 교회를 시작으로,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서머나, 버가모, 디아두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로 이어집니다.
9. 에베소교회에
에베소는, 로마제국 아시아주의 수도로 최대의 상업도시였습니다. 도시에는 그 웅장함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여신 아르테미스신전이 있었는데, 이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네 배나 될 만큼 이방 우상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첫 번째 교회가 이교 신앙의 중심지 에베소였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잘 생각해 보면,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까지 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대 전도자 바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 번째 전도여행(53-56년) 중, 이 에베소에서 2년 정도 체재하였는데, 이때 그의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빌립보서 등을 썼습니다. 또 사도행전(19:21-40)을 보면, 이 여신의 거리에서,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고 외쳐,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제작하여 큰돈을 벌던 업자들이 일어나 소동을 일으켰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아, 계시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에베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건, 바울이 그 씨를 뿌려 30, 40년이 지나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한의 신앙이 바울과 이어진다 생각하니, 밧모의 요한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낸 이가, ‘오른손에 일곱별을 가진 분, 일곱 촛대 사이를 걷는 분’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른 교회에도 나오는데, 모두 요한이 본 당당한 용장 그리스도의 독특한 특징을 정확히 골라 표현하였다고 이해합니다.
9. 처음 사랑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는 잘 인내하여, 내 이름을 위해 참으면서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할 말이 있다. 너는 처음 사랑에서 떠났다. 그러니 어디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으로 돌아오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나는 너희를 떠나고, 촛대를 옮기리라.”
주 예수의 충고는, ‘처음의 사랑으로 돌아오라.’입니다. ‘처음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주 예수의 사랑에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이라 할까, 놀라움? 기쁨?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주의 성령이 가만히 들어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 예수가 소중한 분임을 알려주었던 그때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또 주 예수의 십자가를 말하기도 합니다. 신의 아들 예수의 무참한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그때입니다.
‘처음 사랑에서 떠나고 말았다. 예수에 대한 열정이 식고 낡아 버렸다.’ 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 넘쳤던 뜨거움이 차가운 지식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는 표현이 좋겠지요. 그러나 ‘처음 행위로 돌아오라.’는 말은 좀 어렵습니다. 사랑이 행위로 나타나지만, 행위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처음 주 예수를 사랑했던 때로 돌아가라는 말은 확실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주 예수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말씀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니골라당도 스스로 사도라 칭하는 자도 결국은, 주 예수에게 뿌리박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살아있는 복음을 제1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이 자들의 틀린 점을 예리하게 분별하고, 니골라의 행위를 멀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주 예수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해 잘 인내하였고, 지치지 않았다.”고 주가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10. 언제나 주와 함께
무엇보다, 언제나 언제나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부활의 주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가벼이 여길 때, 그 교회(에클레시아)는 주의 모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모이는 자의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떠나고, 너의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 사실 회개가 없으면, 일견 교회 흉내를 내기는 하나, 주를 제1로 하는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떠나 버리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참으로 엄격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주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보낼 첫 교회로 에베소를 선택한 이유가 확실해집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마지막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영이 교회들에 하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를 얻는 자에게는 신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 열매를 먹게 하리라.”
이를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영이 여러분에게 고하는 것은 주 하나님의 뜻이다. 만일 너희가 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다면, 영이 교회들에 고하는 것을 피하지 말고 분명히 들으라.”
이는 주 예수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기 ‘승리를 얻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우리로서는 얼마나 힘이 나는 말인지 모릅니다. 물론 오직 부활의 주가 함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겠으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