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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옷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한 자
요한계시록 7, 파라클레토스 2020.5.
세키네요시오(関根義夫)
1. 제6의 봉인이 열리다.
우리는 보좌에 계신 이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은 어린양이, 다섯째 봉인을 열었던 곳까지 공부하였습니다. 지상에서는 전쟁과 굶주림, 역병으로 고난을 겪으면서도 주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선인들이 ‘구원과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구합니다’ 하는 간절한 외침을 보았습니다. 신자의 수가 차기까지, 잠시 기다리라 하시면서 흰옷을 주신 것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어린양이 여섯째 봉인을 푸는 곳부터 시작합니다.
어린양이 제6의 봉인을 풀자, 다섯째 봉인 때와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때는 우리가 이 땅에서 혼란과 고통과 슬픔을 한없이 맛보았지만, 이번에는 지상의 일을 뛰어넘어 우주적인 대혼란과 이변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이 되며, 하늘의 별이 마치 무화과의 풋열매가 강풍에 우수수 떨어지듯 우주에 대소동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어떤 고난에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지내왔던 많은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과 어린양의 분노에 접하여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공포와 두려움을 보입니다.
요한은 이 광경을 보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분노가 터지는 날이 왔다.” 말하며, 과연 누가 이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2.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印)을 기다리는 천사
그런데 마치 경천동지 같았던 그 장면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이번에는 땅의 네 귀퉁이에 서 있는 네 천사가 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각의 넓은 평면으로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네 천사가 한 모퉁이씩 맡아, 불어오는 강풍이 땅이나 바다에 미치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천사가 태양이 뜨는 방향, 동쪽이겠지요?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도장)을 손에 들고 등장합니다. 이 천사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는 대지도 바다도 나무도 해를 입으면 안 된다.”
요한이, 도대체 하나님의 인을 받을 종들이 누구일까 알고 싶어서, 천사에게 그 사람들의 수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12부족에서 각각 1만 2천씩, 14만4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또 있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의 모든 국민, 언어가 다른 민족과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인데, 손에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모두 흰옷을 입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함께 있던 천사들도, 보좌를 둘러선 장로들도, 네 생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광경을 요한이 본 것입니다. 정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장관입니다.
천상의 보좌를 둘러싸고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는 흰옷 입은 큰 무리에 압도당하여, 멍하니 서 있는 요한에게 장로 하나가 질문을 합니다. “이 흰옷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가?” 당연히 요한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장로가 요한에게 가르쳐줍니다. “이 사람들은 큰 고난을 받고 온 사람들이다. 그 옷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어졌다.”
3. 큰 고난을 받고 온 사람들
여기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계시록이 기록된 게 1세기 말이라고 합니다. 그때 이미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막 새로운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온 콧대 높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 선두에 섰던 이가 사울. 바울로 변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무심한 듯,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신약성서에, 구원에 참여하는 백성으로 제일 처음 이스라엘이 등장한다는 게 실로 놀랍다는 생각 말입니다.
4.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사 위에
저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한 후, 자연스럽게 신약성서에 몰두했습니다. 나중에야 신약과 함께 구약성서가 주어진 깊은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 갔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가 구약성서에 집약되어 전해졌고, 그 위에 신약성서가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고난의 역사는 신약성서를 뛰어넘어, 지금 20세기까지 꼬리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과 부활이라는 인류구원의 핵심인 복음은, 그 바탕에 이스라엘의 수천 년 역사가 있습니다. 이 유산을 부정하면, 신약의 복음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만큼 구약성서는 신약과 함께,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주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인류를 창조하셨는지, 그 나라에 맞아들이려고 어떻게 우리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조상과 예언자를 보내어 눈물겨운 시도를 해주셨는지…. 그리고 이윽고 때를 기다려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 과정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건 구약성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점철된 조상들의 영혼을 담은 기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혼 깊은 곳의 회개를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4.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 인류의 것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고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믿음의 역사를 아버지 하나님은 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고, 인내하며, 눈동자처럼 아껴 결국 구원으로 이끄신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인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같은 아버지 하나님은 때가 되자, 예수를 보내어 기어이 십자가에 달리게 합니다. 우리의 근본 문제인 죄를 해결하고, 전 인류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꼴찌이지만 분명히 구원으로 이끌어오겠다는 이들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준 이가 바울입니다.
이 과정을 보면, 계시록의 저자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의 깊은 뜻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배신을 계속하면서, 밑바닥의 괴로움을 겪는 이스라엘. 천지 만물의 창조주,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정의의 하나님은 그럼에도 이스라엘에 끊임없이 사랑을 줍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주 하나님의 깊은 배려를 보며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스라엘 모습에서는 아쉽게도 실망뿐입니다.
5. 큰 고난을 겪은 사람들
장로는 요한에게 계속하여 말을 건넵니다.
“그들은 큰 고난을 겪고 온 사람들인데, 옷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되었다.”
위의 구절을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옷’은 말 그대로의 의복만은 물론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생을 부여받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육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변의 세계를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바꿀 수 없는 자신, ‘자기’라 불리는 존재입니다.
이 ‘자기’는 다른 ‘자기’의 존재로 인해 크게 좌우되는 일도 있고, 인생의 고뇌와 죄와 격투를 벌입니다. 물론 육의 옷인 자기가 세상에서 단련되어, 때가 이르면 이 세상의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물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겨우 100년에 지나지 않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물론 놀라운 고난도 있습니다. 이 고난은 전혀 새로운 ‘생명의 영’과 만나는 연결고리가 되기도 합니다. ‘생명의 영’이란 십자가의 주 예수, 즉 나의 죄를 속해주시고, 부활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분, 그리스도입니다.
6. 주의 영에 쫓기는 자의 행복
이 분과의 만남을 허락받은 사람은 정말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육의 몸’을 대신하여 성령으로 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을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기뻐하는 삶을 사는 자로 변화되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분의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새로운 흰옷인 ‘영의 몸’입니다.
물론 주의 영에 이끌려 살면서도, 실제로는, 아직 육의 몸 그대로, 그 나름의 고난을 겪으며 삽니다. 육을 따라 살아온 이 인생은, 부활의 때 영의 몸으로 완전히 순화되기 위한 훈련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꽉 잡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7. ‘영의 몸’인 흰옷
어린양의 피로 씻었다는 표현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나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알고, 주를 믿은 나에게, 예전의 ‘육의 몸’ 즉 세상에서 준 ‘낡은 옷’인 자기를, 새로운 영의 몸인 ‘흰옷’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굳은 약속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흰옷은 영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주인입니다. 내가 주 예수께 붙어 있는 한, 주께서도 우리를 붙잡습니다. 절대로 나를 놓지 않습니다. 정말 완벽하게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기쁨이며, 감사입니까?
8. 우리 위에 장막을 쳐주시는 분
장로가 말을 이어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어, 주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보좌에 계신 분이 이들 머리 위로 장막을 펼치신다. 그들은 이제 굶주리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는다. 태양도 더위도 그들을 괴롭힐 수 없다.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생명의 샘으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장막을 펼친다!’
일찍이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그들과 함께 걸어주었습니다. 그때처럼 주 예수도 한때는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았었고, 지금도 절대 떠나는 일 없이, 우리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21장에서 다시 반복하여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계시록 절반도 오지 않은 7장에서 결론과도 같은 중요한 말이 갑자기 나오다니? 놀라운 선언입니다.
9. 하나님의 경고와 마음이 둔한 사람들
생각해 보면 계시록이 기록되고 이천년이 지난 지금, 인류 역사는 점점 희망에서 멀어져 왔습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증오와 싸움이 심각하게 늘어났습니다. 우리나라는 20세기 들어서 핵폭탄을 맞고도, 욕심이 폭발하여 원전 사고를 일으켰고, 자연과 인간을 오염시켜, 지구온난화로 위중한 생태계에 큰 해를 끼쳤습니다. 몇천, 몇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그 이상의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살 집도 먹을 음식도 부족한 현실이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오키나와에서는 민의를 저버리고, 미군기지 건설이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어 자연 파괴가 강행 중입니다. 정치가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알려주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지요? 이제 우리는 반응도 둔해지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최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까지 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 마음의 자만과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슬픔의 경고가 아닐까요?”
그때 하늘의 보좌에 계시던 분은, 지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그분의 뜻은 결코 변함이 없다고 요한을 통해 보여주시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겸손하게 정의이신 창조주를 섬기고, 성령이신 주 예수의 영을 마음에 받아, 주를 믿는 자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소동에서도 독일은 그 피해가 적은 것 같습니다. 독일의 지도자는 2차 대전 후 깊은 반성을 하고, 철저한 사죄외교로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유지하였습니다. 헌법에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공표하였고, 충실하게 실천한 결과가 아닐까요?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도의조차 없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지도자가 이끄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른지 놀랄 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남을 탓하기보다 죄 사함을 받은 자로서 나를 돌아보고, 이럴 때일수록 기도하며, 깊이 생각하고, 주어진 때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실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늘에 계신 분을 바라봅시다. 우리 모두 함께 걸어주시는 성령의 주를 의지하고, 그 이름을 찬미하며, 슬기롭게 걸어가 봅시다. 여러분의 건투를 마음 깊이, 기도하며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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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에서는 우편물이 원활하게 도착하여 모든 잡지들을 차질없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모든 나라의 우편물 수령을 개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가는 일반 우편물 수령을 거부하고 있어서 성서신애를 비롯한 잡지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EMS로 보내는 우편물만 겨우 받고 있는데, 가격이 해외택배비 수준이어서 너무 비쌉니다. 일본이 좀 열린 사회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