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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은 너희가 풍족하다
요한계시록 강의4, 파라클레토스 2020.2.
세키네요시오(関根義夫)
1. 받아야 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번에는 일곱 교회 중 두 번째, 서머나교회에 대해, 요한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 예수의 말씀을 공부하려 합니다. 여기서는 주 예수를, ‘처음부터 나중까지 있는 분, 지금 계시고 과거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오실 분,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말씀하시는 분, 한 번 죽었다가 보라! 세상 끝날까지 살아계시는 분’이라고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가장 핵심은 지금도 살아서 일한다는 부분입니다. 그분이 서머나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게 도입부의 요약입니다.
이 말씀을 이천년이나 지난 오늘의 우리가, 서머나교회 신자 중 하나가 되어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떠올려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받아야 할 고난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과 이어집니다. 실로 깊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지금은 무서운 고난이 다가오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긴박함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신자 중 일부가 옥에 끌려가 적어도 열흘간은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왜 열흘일까? 그것으로 끝나는가? 의문이 생깁니다만, 서머나 신자들을 이런 고통에 빠뜨린 자들은 유대인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요한에게 나타난 주 예수는, 그들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즉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과 그리스도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인과의 격돌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도 자신이 투옥된 적이 많았고, 매 맞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죽음을 맛본 적도 많았다고 말하였습니다.
2. 너에게 생명의 관을 주리라
주 예수는 서머나 신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믿는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합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생명의 관을 주겠다고도 합니다. 그들이 직면한 고난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은, ‘너희의 고통과 가난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너희가 부유하다’ 하고 위로합니다. 또 참 생명의 주, 예수에 관한 믿음이 순수하고, 항상 주와 함께 지내니, 사실은 너희가 풍요롭고 부유하다고 격려합니다. 만일 너희가 목숨을 잃더라도 나는 너에게 승리의 인,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격려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고난을 이기는 자는 결코 ‘제2의 죽음’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약속합니다. 제2의 죽음에 대해서는 20장에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3. 요한계시록을 지금 읽기 위해서
이렇게 시대마다 상황이 다르니 이를 나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시대마다 독특한 사정이 있고, 뜻하지 않은 개인적 고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이신 주 예수를 나의 영혼 가장 깊은 곳으로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매일 마음에 새기고 산다는 기본적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귀 있는 자’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반드시 들어야 할 ‘성령이 모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나에게 임하시는 주 예수를 섬기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그렇게 사는가?’ 묻는다면, 바로 움츠러들겠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주께 붙어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전개될 선인들의 삶에서 깊이 배우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2천 년 전의 일이지만, 주 예수께 격려받고 살았던 사람들이니까요.
4. 예리한 양날의 검을 가진 분
버가모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는, 자신을 ‘예리한 양날의 검을 가졌다.’라고 소개합니다. 버가모에는 사탄의 왕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정체는 무엇일까? 제가 읽은 참고서를 인용합니다.
이 고장에는 많은 신전이 있었습니다. 제우스 신전과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어 도움을 구하는 순례자들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29년에는 이미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여신 로마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예배가 성행하였습니다.(NTD 신약성서주해11, 요한묵시록 P.50)
서머나 신자에게 말씀하신 ‘죽기까지 충성하라, 너희가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여기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버가모 신자의 집회책임자였던 충실한 증인 안디바가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 숭고한 순교를 눈앞에서 보고도 신자들은 주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NTD에 의하면, 안디바의 순교가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한 박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이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았다는 기록도 없고, 안디바의 죽음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안디바를 우발적으로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험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5. 발람의 가르침, 니골라파의 가르침
버가모 신자들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발람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가 있다. 또 니골라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도 있다.”
발람과 니골라파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니,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힘을 발휘했습니다. 발람은 민수기 22-24장과 31장에 그 이름이 나오는데,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걸려 넘어지도록 바락에게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민수기 22-24장에서는 반대로 모압왕 발락이 애굽에서 이주한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저주해달라고 발람에게 부탁합니다. 무려 세 번이나요!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고 모두 거절합니다. 그런데 31장에는, 이스라엘을 주에게서 돌아서게 했다는 정반대의 기록이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시켰던 것이지요. 이스라엘로서는 유혹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람의 교훈’은 본래의 신앙을 변질시켜 우상 신앙이 되게 하는 수단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또 니골라파에 대해서도 자세하지는 않으나, 우치무라에 의하면, 평신도 정복파라고 하며, 신자의 믿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內村성서주해전집 14권) 본래의 영적 종교라 말할 수 없는 이 두 가지는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버가모 신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에 대해 주께서는, 여러분이 바른 신앙으로 돌아와 회개하면, 내가 너희에게 가서 ‘나의 예리한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우리라.’ 말씀하였습니다. 주가 직접 당당하게, 그들과 진정한 논전을 벌이고 싸워보리라 하셨습니다.
6. 감추었던 만나,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이름
그러나 주께서는 마지막 맺는말에서, 버가모 신자들에게, 역시나 진심으로 격려하는 말을 건넵니다. “승리를 얻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리라, 또 흰돌을 주리라. 그 작은 돌에는, 얻은 자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감추었던 만나. 이는 주를 믿으며 사는 자들로서는, 부활의 주가 주시는 생명의 빵이라 할 성령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것을 가진 자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새 이름을 주시는데, ‘새 이름’이란 19장에서 밝혀지는 ‘정결하게 빛나는 베옷을 입은 어린양의 신부’ 중 하나가 아니겠는지요?
7. 두아디라교회의 문제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의 편지에서, 주는 자신을 ‘눈이 타는 불꽃 같고, 발은 청동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의 행위, 사랑, 신앙, 봉사, 인내를 알고 있다. 이어서 너희들의 요즘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주께서 두아디라 신자들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전해줍니다. 그러나 그 두아디라 신자들도 실은 주께 큰 심려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예언자로 자칭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성이 있어, 신자들을 잘못 가르쳐 혼란스럽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하는데도, 신자들이 이 여자를 받아들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라면, 구약 열왕기상 19장의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내 이름입니다. 당시 바알 제단을 쌓고 위세를 떨치던 아합왕에게,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라 충고한 예언자 엘리야의 명을 저지했던 이가 바로 그 이세벨이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요? 일부러 두아디라 여성 예언자를 아합왕의 처 이세벨이라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주는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문란한 행위를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두아디라의 자칭 예언자 이세벨은 물론, 그녀를 따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고통을 만나리라 말씀합니다. 이 여자를 따르는 자녀들도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녀들’이 두아디라 신자들인지, 친자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실제 자녀들이라 해도 심각한 일입니다.
8. 지금 가진 것을 잘 지켜라.
‘이렇게 모든 교회가, 내가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꿰뚫어 보는 것을 깨닫는다면’이라 말합니다. 실로 처음에 ‘불꽃같은 눈’이라 했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결국 단순히 일곱 교회만이 아닌, 이 지상의 모든 신자의 모임이,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주는 말씀을 계속하며, “나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합니다. 그 여자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사탄의 온갖 깊은 비밀을 알지 못하는 두아디라 신자에게, “너희에게는 별도의 짐을 지우지 않겠다. 다만 내가 갈 때까지, 가진 것을 단단히 지키라.” 하고 덧붙입니다.
9. 동쪽 하늘에 고고하게 빛나는 샛별을 바라보며
가장 큰 문제는‘사탄의 온갖 깊은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바른 신앙으로 사는 신자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즉 사탄이 자신만 안다고, ‘실은 중요한 것을 전혀 모르는 주제에’ 자랑하는 특유의 지식이라 할까, 사고방식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에게는 사탄의 그런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주, 죽었다가 부활하여 지금도 활동 중이신 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지금 우리가 가진 성령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인합니다. 이것이 승리를 약속하는 길이며,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게 아닐까요?
주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샛별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깊은 밤의 어둠이 드디어 물러가고 밝아질 무렵, 새벽의 동쪽 하늘에 저 높이, 단 한 점, 고고하게 빛나는 샛별. 주위가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주가 확실히 계심을 보여주며,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희망과 기쁨과 주를 따르려는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는 주의 귀한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10.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걷는 자
두아디라 신자의 편지는 일곱 교회 편지 중 가장 깁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데교회 편지는 매우 짧은데다가, 까칠한 질책마저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주의 진심어린 의도가 숨어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너는 산 것 같으나, 실은 죽어있다. 눈을 떠라. 죽어가는 남은 자들을 강하게 하라. 나는 너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너무나 엄격한 말씀입니다.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은 처음 에베소교회 신자에게 한 충고와 닮지 않았는가? 에베소 사람들도, 첫사랑을 버렸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흩어버리겠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 형제들에게는, 잘 인내하였고 내 이름을 위해 지치지 않았다고 칭찬과 격려로 마무리합니다. 그에 비해, 사데 신자들에게는 이름만 살아있고 실은 죽었다고 강경하게 말씀합니다. 아마도 사데 신자들의 영혼은 주의 걱정을 들을 만큼, 활기찬 힘을 잃어버렸던가 봅니다. 그러나 그 사데 신자 중에도 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가 있다며 격려합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라”고 합니다. 또 그의 이름을 절대로 생명의 책에서 지우지 않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타낼 거라고도 밝히 말합니다.
주는 어떤 상황에서도 봐야 할 일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전부 보고 계십니다. 얼마나 속깊은 마음이신지, 놀라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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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