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일하시는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강의 2(파라클레토스 2019년 12월호)
세키네요시오(関根義夫)
1. 밧모섬의 요한
요한계시록 1장 10-15절은 도입부에 이어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요한 자신에게 일어난 뜻밖의 사건과 실제로 본 그리스도의 놀라운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아, 주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로마 관헌에게 잡혀, 소아시아 지중해의 작은 섬 밧모로 유배되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 있는 밧모섬의 현재 모습>
당시(제1세기 90년경) 이미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의 통치정책은 각지에서 그리스도인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는데, 요한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의 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돌연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디아두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
요한은 놀라서 자신에게 말을 건 소리의 주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뒤돌아보았습니다. 갑자기 일곱 금 촛대가 보이고, 그 금 촛대 중앙에는 인자와 같은 분이 서 있었습니다.
2. 인자와 같은 분
요한이 본 광경은 놀랍게도 ‘인자와 같은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인자라는 단어는 주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주 예수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와 같다’(원어는 ‘~와 닮았다’)는 말이 좀 애매한 표현이나, 결국 ‘확실하나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요한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분이 왠지 사람같지 않은 위엄에 차 있어, 두려움마저 느꼈던 듯합니다.
여기서 요한이 분명하게 기록해 준,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 번 보기로 합시다. 복음서에서 만났던, 한없이 온유하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해 주었던 주 예수의 인상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전월호에 실었던 렘브란트의 예수상처럼, 참으로 온유하고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얼굴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분이 나사렛 예수와 같은 분이라 생각할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주로 섬겼던 인자 예수가 분명하나, 그 모습이 실로 웅장하고, 압도적인 위엄과 광채와 힘으로 넘쳤기 때문입니다.
3.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그분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모세에게 지시한, ‘너의 형제 아론을 위해 위엄과 아름다움을 더한 거룩한 예복을 지으라. …그들이 만든 옷은 가슴부터 … 긴 옷이었다.’라는 말씀, 즉 제사장직을 수행한 아론의 옷(출 28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 나왔던 대제사장의 모습도 방불케 합니다.
물론 분명히 다른 점도 있습니다. 요한이 본 사람은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출애굽기에서는 대제사장이 각색 실과 아마 실을 사용한 흉배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구약시대 대제사장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4. 그 머리털은 눈처럼 희고
그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눈같이 희다고 하니, 문득 레위기의 ‘백발의 어른 앞에서는 일어나고, 장로를 높이며,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백발의 어른은 뭔가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고 위엄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아마 그런 느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계시록에서는, 박해를 견디고 개선한 성도가 입는 옷이 흰색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축복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또 구약의 예언자 다니엘의 꿈에서도 흰색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에 옥좌가 있고, 거기에 ‘해와 같이 빛나는 자’가 앉아있었는데, “그 옷이 눈처럼 하얗고, 그 백발은 정결한 양털과 같았다.”(7:9)
해와 같이 빛나는 자란 영원히 계시는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인자와 같은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불꽃 같은 눈
이곳도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과 겹칩니다. 다니엘은 티그리스강 가에서 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한 사람이 베옷을 입고, 순금의 띠를 띠고 서 있는데, 그 눈은 불꽃 같고 팔과 다리는 청동 같고, 말하는 소리는 군중의 소리 같았다.” 요한이 본 인자와 같은 분도, ‘발은 정련된 동과 같이 빛나고, 소리는 큰물 소리와 같았다’고 합니다.
6. 입에서 예리한 양날의 칼이 나와
계속되는 묘사를 보면, 입에서 예리한 양날의 칼이 나오고, 얼굴은 내리쬐는 태양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입에서 예리한 양날의 칼이 나오고’라는 말에 저는 히브리서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 어떤 양날의 검보다 예리하여 정신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며, 마음의 생각과 염려를 다 알아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이 전혀 숨을 수 없고, 하나님의 눈에는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4:12, 13)
7. 선인의 깊은 영적 체험을 배우다.
저는 이번 요한계시록을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도 계시록 저자도 구약의 예언서를 공부했구나 하고 마음 깊이 감동했습니다.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은, 그 깊은 바탕에 구약시대 조상의 영적 하나님 체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각각의 시대에, 이런저런 곤란한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나님의 영과 만났던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모든 기록이 그렇지는 않으나, 조상의 영적 체험 유산이 구약성서의 바탕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렇게 구약에 주목하는 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깊이 사고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적당히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8. 밧모섬 요한의 경우
무엇보다 요한 자신이 이분을 눈앞에 대했을 때, 힘과 위엄과 그 당당한 존재감에 완전히 압도되어,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눈에 보이는 모습은,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주의 모습과 조금 다르지만, 분명히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나를 위해 돌아가셨던 분, 주 예수 바로 그분임을 확신하였습니다.
9. 두려워 말라!
인자의 출현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고, 너무나도 박력 있는 존재감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던 요한에게, 그분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며, “두려워 말라!”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말 속에 얼마나 마음을 안도하게 하는 힘이 넘쳐 있었는지. 그분의 ‘두려워 말라!’는 말에 요한은 안심하였고, 이분이 ‘나의 주 예수’임을 확신하고 눈과 마음을 열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는 지상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없이 ‘두려워 말라!’고 말하며, 제자들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며 지켜주었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들의 선배인 사도들은 언제나 힘과 용기를 얻었고, 소망을 받았으며, 다시 일어섰던 것을 요한은 상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때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 주는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 약해질 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 느낄 때, 반드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라고 조용히, 하지만 힘있게 꾸준히 말을 걸어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격려하고 지지해줍니다.
10.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신 전능의 신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요한에게 그리스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처음이며 나중인 자. 또 살아 있는 자다. 한 번 죽었으나, 보라. 세상 끝날까지 살아서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다.”
이 말씀이야말로 신의 외아들로서 인류 구원을 위해 지상에 내려와, 십자가 죽음으로, 신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고 3일 후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고,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에게 성령으로 임해주시는 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신 전능의 신과 하나 된, 참 구원의 주. 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남김없이 몸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지금 요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 보았던 사실과 지금 있는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록하여 남기라.”
실로 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요한계시록이 시작되었습니다.
11. 여러분의 형제인 나, 요한.
나는 여러분의 형제이며 주 예수에 묶여서 그의 고난, 지배, 인내에 참여한 요한이다.(1:9)
이 두루마리를 여러분에게 보내는 요한은, 여러분과 같이 주 그리스도로 연결된 형제이며, 함께 예수를 진정한 구원의 주로 믿어 살리심을 받아, 예수의 영으로 굳게 묶여있는 자입니다. 우리를 죄의 세상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신 주 예수의 그 고난을 나의 것으로 받아, 예수의 지배를 따르는 종으로서 받아야 할 당연한 고난 속에서 여러분과 함께 걷고 있는 자입니다. 그 여정 중에,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고백하여, 지금 여기 밧모섬에 갇혀있는 자입니다.
12. 세상의 권력에 눌린 중에도
요한은 매 주일에 홀로, 또는 같은 유형의 몸인 신자와 함께 예배하는 일을 계속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던 중에 요한은 자신에게 나타난 주 그리스도에게서, “네가 본 것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로 보내라.” 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일곱 교회(에클레시아)는 당시 비교적 큰 지역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 외에도 규모가 작고 모이는 사람이 적은 집회도 있어, 주를 섬기며 매주 예배를 계속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루마리를 기록한 요한에게는,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황제숭배에 저항하고 진심으로 주를 믿음에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집회에 보여주려는 생각도 있었겠지요.
한 주해서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여서 ‘모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역시 그렇습니다. 요한은 주께서 보여주신 일을 그 규모의 대소와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 집회에 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해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계시록은, 그 시대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닿았고, 또 각지의 신자들에게 건네져서, 마침내 지금 우리 손에까지 닿은 것입니다. 2,000년의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이때와 같은 비상 상황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가!’ 놀랍습니다. 이 계시록에서도 같은 일이 집요하게 반복되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당시의 그 현실을 눈앞에 맞고 있는 것입니다!
13. Do your nearest duty!
(눈앞에 있는, 할 일을 하라!)
그런 상황에서는, ‘나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랴?’ 하고 무력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곁에 있다.” 끊임없이 조용히 말을 걸어주시는 주에게 격려를 받는 게 중요합니다. 칼라일이 항상 자신을 일으켰다는, “Do your nearest duty!”라는 말이, 주께서 지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첫댓글 주 예수님의 영광이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