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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상처를 통해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은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항상 뭔가를 소원하지요. 희망, 기대는 그것이 이뤄지길 바라면서 간직하는 마음의 상태들입니다. 이 때문에 뭔가를 시작하거나, 다시 도전하거나, 목표를 위해 정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이것들은 실망과 좌절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소원, 희망, 기대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실망하고 좌절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현실에서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지나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실망과 좌절과 상처를 안고 삽니다. 이러한 소원, 기대, 희망이 크면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투성이의 실패한 인생입니다. 결혼에도 실패했고 사랑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에서도 실패했습니다. 이 모든 상처는 바로 이 여인의 소원, 희망, 기대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좋은 남자, 자신을 사랑해주고 인생을 책임져줄 좋은 남자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남자에 대한 그 원함이 계속해서 남자를 바꾸는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좋은 가정을 원했던 그 원함이 그녀에게 가정생활에서의 실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계속해서 새로운 남자를 원하고 또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 했던 이유는, 과거 그의 부모, 그가 자랐던 가정 역시 깨진 가정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깨어진 가족사의 기억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새로운 가정을 찾게 원했겠지만, 오히려 그 원함이 가정생활에 대한 실패와 상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또 이러한 여인의 아프고 서글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이해해줄 친구, 좋은 이웃사촌에 대한 기대와 희망 역시 물거품이 된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시간에 우물을 길러 나와야할 만큼 철저한 외톨이였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이 여인에게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희망과 소원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인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종교적 열망이 그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남자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얻지 못한 기대와 소망을 신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얻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에 대한 이 열망은 여인에게 더 큰 상처와 좌절로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성하다고 여기는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장소가 사마리아 성전이든, 예루살렘 성전이든. 성전에 가서야만 예배드릴 수 있다는 종교의 규칙은 여인에게 괴로움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성전에 자유롭게 갈 수 없는 이였기에 그 괴로움은 더욱 컸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생으로부터, 남편으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기대와 희망을 해결하고자 이 여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큰 희망과 기대와 소원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갈망이 크면 클수록 이 여인의 괴로움 또한 더 커집니다. 성전이라는 공간이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종교의 규정이 확정적인 한, 이 여인의 가장 큰 기대와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절망과 상처로 남았습니다.
참된 영적 열망은 종교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건 종교가 아닌 영적 접근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인의 열망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지만,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종교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요. 종교적 열망이 바로 영적 열망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영적 열망입니다. 물에 대한 갈증 이면에 외로움, 즉 남자에 대한 갈망이, 남자에 대한 갈망 이면에 종교적 갈망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게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종교적 갈망 이면엔 보다 더 내적이고 깊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건 영적 갈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대부분의 갈망들은 괴로움을 유발하고 상처를 남깁니다. 결코 완전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에 대한 갈증은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인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외로움은 남자들과의 헤어짐이란 상처를 주었습니다. 종교적 갈망은 자신은 종교의 중심인 신성한 장소에 적합하지 않은 부정한 죄인이라는 낙인찍힘의 상처를 주었습니다. 중심에서 밀려난 변두리인이라는, 경쟁에서 낙오된 실패자라는, 뜻을 이루지 못한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상처와 좌절들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겪은 아픔과 실패와 불완전함에 시달립니다. 이런 상처들, 이런 낙인들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율법적 당위를 강요합니다. 중심에 도달해야 한다는 마음의 압박, 경쟁에서 이겨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는 사회적 강요, 거룩한 공간에 찾아가서 정결하게 하는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는 종교적 강요, 현재(현세, 이생)의 삶은 구원받지 못한 죄의 상태요,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저 타락한 세속의 삶일 뿐이라는 이원론적 분리의 삶이라는 어리석은 고정관념을 강요받습니다.
이러면서 놓치는 것은 현재의 삶, 즉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충만하다는 사실을 놓칩니다. 지금 이 순간 이미 나를 자비롭게 있는 그대로 품에 안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임재를 놓칩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뜻대로 소원대로 기대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면 않은 대로 이미 충만하고 완전한 대도 그걸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인 우리가 완전하고 충만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바로 자신이 완전하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인데도, 늘 완전해지려고, 신처럼 완전하게 원하는 대로 이루고, 모든 게 기대하는 대로 되며, 희망하는 것마다 희망대로 펼쳐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연약하여 얼마든지 상처받고 아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뭔가를 더 해야 하고, 어딘가 더 나은 곳을 가야하고, 지금 보다는 더 나은, 다른 어떤 삶에 도달해야 한다는 관념, 즉 생각의 강박에 시달립니다. 여하튼 지금 나의 모습, 내 삶, 내 형편은 항상 모자라고, 더 뭔가 필요하고, 새로워져야하고 불완전하고 불충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뭔가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다른 것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항상 다른 걸 원합니다. 그게 이뤄지면 또 다른 걸 원합니다. 항상 지금 이 순간을 산다면, 우린 매 순간 새로움 속에 있는데 그걸 감지하지 못합니다. 뭔가 다른 것을 '원하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선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지 않습니다. 다시 반복되어 재생되고 또 비슷한 상황에서 또 다른 상처가 생겨납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그 속성상 이분법적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딘가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 들어가지 않는 한 환경 자체, 모든 걸 구분하고 차별하는 이분법의 세계는 항상 누군가를, 특히 '나'를 차별하고 판단하고 딱지를 붙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딱지 붙이기의 달인은 바로 '나'입니다.
상처란 사실 마음이 혹 에고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에 집착하려 끝없이 재생해내는 생각의 습관이요 기억에 불과합니다. 상처는 마음의 침묵, 에고의 잠잠함이 없이는 결코 치유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허상이요, 생각은 마음 속 구름이나 안개 같은 것임을, 생각은 그저 마음이 만들어 내는 농담임을 깨닫는다면, 마음의 상처란 것도 그 농담, 그 생각의 틀 지워진 조건에 불과함을 깨닫는다면 그 순간 상처로부터 헤어 나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니 마음이 만들어내는 상처가 사실은 하나의 삶의 순간이요, 놀이요, 유희임을 알게 됩니다. 그건 다 마음의 농담이기 때문입니다. 농담, 그냥 웃자고 하는 말, 쓸데없는 말입니다. 무시하고 놓아버리면 되는데, 우리가 마음에 포로 되어 그걸 못합니다.
그 상처로 인한 괴로움은 무엇인가요? 그 상처가 왜 생겼나요. 그 상처를 거부하고 빨리 없애려는 마음의 조작, 마음의 저항, 마음의 조급함이 바로 상처로 인한 괴로움입니다. 상처가 마음의 농담이요, 허상임을 안다면 그냥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럼 그것도 때가 되면 그냥 제갈 길을 가버립니다.
여인이 예수와의 이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하자면 여인은 예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순식간 깨우쳤습니다. 순식간에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즉시 여인의 번잡하고 혼란하고 상처 가득했던 마음이 잠잠해졌습니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튀어 나와 버렸습니다. 자기로부터 확 깨어난 것입니다. 침묵이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더 새롭고 더 좋고 더 평안하고 더 기쁘고, 더 흥미로운 어떤 상태에 이르거나, 뭔가 불편하고 싫은 어떤 것을 떨쳐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어떤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나의 마음 너머 내면 깊은 곳에 영이신 하나님, 영인 참된 나가 있다고 해서 그 영적 상태 혹은 영적 존재를 어떤 특정한 감정이나 경험으로 경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건 말하자면 그저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과 온전히 하나 되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예수회 신부인 장 피에르 코사드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새로이 발견할 때마다 기뻐하라. 인내하지 못할 때면 인내하지 못함도 인내로써 참으라. 평온이 사라질 때면 그 순간을 평온하게 견뎌내라. 화가 날 때는 화난 자신을 두고 화를 내지 말라. 불만스러울 때는 불만스러운 대로 만족해하려고 시도하라.” 이겁니다.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답답해하거나 탓하기보다는, 그런 자신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냥 가장 자연스럽게 그것이 혹은 그 상태가 혹은 그 사람이 되도록 놓아두는 것,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자연스런 상태에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두고, 힘들면 힘든 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침묵을 하다가 희한한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희한한 경험도 그냥 놓아주어야 합니다. 침묵기도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이 어떤 신비하고 비일상적 방식으로 신을 혹은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집착하게 하기 쉽기에. 다 놓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를 만나 놀라운 영적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대인에게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이 변했나요? 그가 여자라는 사실이 변했나요? 그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지금은 결혼도 안하고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변했나요? 이 여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동네의 시선이 변했나요? 아닙니다. 그대로입니다. 그저 여인은 이런 모든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괴로운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자신의 상처로부터 놓여났습니다. 그 괴로움이 지나갔습니다. 자신의 처지, 자신의 상처, 자신의 좌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남자에 대해 열망하게 했던 사랑에 대한 갈망과 남자에 대한 기대, 원함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내버려두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성한 장소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종교적 열망도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상처받고 좌절되고 희망과 기대가 이뤄지지 않은 대로의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셨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여인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바로 여인의 상처, 여인의 불완전함, 이루지 못한 꿈, 이뤄지지 않은 기대와 소원과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함, 우리의 상처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이 됩니다. 말하자면 지옥 같았던 그녀의 메마르고 퍽퍽한 인생은 놀랍게도 그녀를 하나님을 만나는, 그리고 자신 안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는 생수의 근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종교는 지옥이 두려워 피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영성은 지옥을 다녀온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영성의 핵심을 가리키는 ‘케노시스’라는 단어는 바로 ‘비워낸다’는 뜻입니다. 이 비움은 또한 ‘항복한다’는 의미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이 비움은 ‘바닥을 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대도 소원도 희망도 다 잃어버린 채 살았던 이 여인은 그야말로 인생의 바닥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낸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영성의 놀라운 신비는 바로 이 비워냄의 자리, 바닥을 친 자리에 영성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만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세의 신학자요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인간의 “불완전함은 갑옷에 난 금과 같고, 그 '상처'를 통해 '신'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위대함을 맛보려거든 자신의 연약함을 먼저 맛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처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아니 상처, 즉 자아가 깨어진 틈을 통해 하나님의 항상 ‘있는’ 임재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상처를 통해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여인을 혼신을 다해 찾아오셨듯이 말입니다. 여기에 예배가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 뵐 영의 깨어남이 있습니다.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약함 속에 강함이 있고, 비참함 속에 기쁨이, ‘죽음의 나락’ 아래에 ‘은혜의 열매’가 있다. 저 너머의 영성은 언제나 내면에서 먼저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