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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세상으로 나오시다(요 4장 23~24)
여러분은 집에서 기도할 때가 더 경건한 기분이 드십니까, 아니면 정한 날, 정한 시간에 교회당이라는 장소에 나와 기도할 때가 더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집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때와 예배당에 나와 예배할 때, 어느 때가 예배를 제대로 드렸다고 느끼시나요? 아마도 여러분 중 대부분이 후자에 대해 더 경건하고 기도하는 것같고, 예배 드린 것 같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우리 기독교인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종교적 본능, 종교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부터 종교적인 사람들은 어느 한 공간을 보다더 신성하고 거룩하다고 여기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한 공간을 신성한 곳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한 곳은 누군가 그 종교의 신성한 한 사람이 신을 만나고 신의 신비로운 음성을 듣거나 계시를 받은 곳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은 신이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곳이고, 신께 제사나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됩니다. 그런 신성한 곳은 여기저기 여러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군데에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이 중심이 되어 종교의 규칙과 예식과 절기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 원시인들에게 그곳은 신령한 산이나 동굴, 그리고 깊은 산속 샘물이었습니다. 고대나 현대의 도시인들에게는 신전과 성전이 그런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사람들의 종교적인 열망을 채울 수 있는 믿음과 희망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신에 대한 갈망을 가진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 중심이 되는 신성한 곳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갈증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종교심, 종교적인 갈망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군데 고정된 중심이 되는 신성한 장소에서 드려지는 예배, 혹은 제사의식은 여인에겐 또 다른 괴로움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영적인 갈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곳까지 가야하는데 지금 여인의 처지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킬만한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껄끄러웠습니다. 어쩌면 남몰래 자신의 동족 사마리아인들이 제사지내는 사마리아 산의 예배에 참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들의 라이벌인 유대인들에겐 솔로몬이 지은 멋진 성전이 있었고, 그곳에서의 제사의식이 매우 은혜롭고 장엄하고 감동스러워서 마치 정말 하나님이 그 장엄한 예배에 영광스럽게 함께 하시는듯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동족의 예배에도 마음놓고 참여하지 못하는 여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극도로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예배에 참석하기란,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딘가 정해진 고정된 장소만이 신성하다는, 정해진 거룩한 장소는 여인에게는 또 다른 괴로움과 고통의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어느 날 유대인 남자가 자신이 몰래 다니던 우물가에 앉아있었고, 희한한 능력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부정한 행적을 알아맞히는 게 아닙니까? 보는 범상치 않은 분, 예언자가 틀림없습니다. 혼신을 다해 이런 상황중에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예수님은, 결국 여인의 이 내면 깊은 곳에, 아무도 모르던 여인 자신도 맘편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갈망을 끄집어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 영적인 갈망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는 여인의 물음은 사마리아 산에서 드린 예배로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당신들 유대인들의 예배,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는 어떻습니까?라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깊은 내면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지금 종교적인 중심이 되는 공간의 문제 때문에 막혀 있습니다. 어느 한 곳이 더 거룩하고 경건하기 때문에 그곳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곳에 가야 더 기도가 잘 되고, 더 예배드린 것 같고, 더 하나님이 나의 소원에 귀를 기울여 응답하실 것이라는 공간의 중심의 문제에 여인의 영적 갈망이 가록막혀 있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 아니라고 말하십니다. 분명히 부정하시는 것이지요. 무엇을 부정하십니까? 사마리아 산이든, 예루살렘이든, 혹은 사마리아산의 성전이든, 예루살렘 성전이든 어느 산 혹은 어느 성전 모두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느 특정한 공간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프레데렉 르누아르는 예수의 이 말이 “이제는 세계 어느 곳이건 하나님께 예배할 특정한 공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사마리아산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리도 신성한 곳이라 여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머물렀던 적이 있는, 고귀한 조상인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의 성전마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유일한 중심의 공간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마저 하나님께 예배드릴 곳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진정한 예배는 어디서 드려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해서 예루살렘 성전마저 부정해버리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성전 자체만을 부정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내면 깊은 곳의 갈망을, 사마리아 성전이나, 예루살렘 성전 등 특정 장소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장소들은 종교의 중심지, 종교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선 종교를 부정하신 것입니다. 뭐에 관해서요? 신에 관해서 종교가 필수라는 관념에 대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종교는 필수적이라는 일반의 관념을 뒤엎으시는 것입니다. 종교의식 통해, 종교 관행이나 종교제도도 통해 신과 만나고, 신을 예배해야 한다는 기존의 종교적 확신을 뒤엎으시는 혁명적이고, 혁신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더 나은 곳,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더 경건하고 거룩한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라고 묻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어디서, 어떻게 라는 물음에 ‘때’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진정한 예배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때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곧 이 때라.” 이때가 언제입니까? '이때'에 사용된 헬라어는 '뉜'이란 단어입니다. 현재 혹 지금이라는 뜻이죠. Now,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여기서 '지금'은 언제인가요? 예수님이 여인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놀라운 진리를 여인에게만 말씀하시는 게 아녜요. 모든 시대, 모든 곳에,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예수님 당시의 그 순간이 아니라, 항상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항상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지금 이 순간'이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산과 예루살렘은 각각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종교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의 삶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졌듯이, 사마리아인들의 생활도 그리심산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종교적 정당성을 정립하기 위해 제일 먼저 중심이 되는 장소(공간)를 정합니다. 그리고는 그 정한 장소를 거룩하다, 신성하다고 딱지를 붙이죠.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어딘가 한 군데를 정하고 그곳을 '영험하다'며 신성시합니다. 어느 산이 영험하대, 어느 동굴이 영험하대, 어느 바위에 기도가 잘 통한대. 어느 예배가 더 은혜롭고 감동적이대.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이런 식으로만 이해되고 있습니다. 고대만 아니라,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 어느 성전, 어느 목사, 심지어 같은 교회도 몇부 예배가 더 은혜롭대. 이런 식입니다.
예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반종교적, 반체제적인 선언입니다. 모든 중심을 해체해버리십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 유대교 유대인이라는 중심을 부정해버리십니다. 이 상황의 예수의 모든 행동은 중심을 무너뜨리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예배라는 중요 주제를, 제자들도 아닌 이교도 이단자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자가, 여자도 부정한 여자가. 유대지역 아닌 사마리아에서, 성전도 아닌 우물가에서 말입니다.
종교로서의 예배, 절차와 형식으로 진행되는 예배, 제도와 조직으로서의 교회와 종교의 모습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극히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하지만 너무나 신성한 그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바로 여인의 감춰진 갈망, 그 내적인 갈망, 그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지극한 경외심으로 흠모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심산이라는, 예루살렘이라는 또 성전이라는 특정한 공간이나 그곳에서 진행되는 특정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항상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어떤 특정한 장소나 공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 교회당으로부터 먼 곳에 있을 때에는 불가능합니다. 항상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예배할 곳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곳에도 예배할 곳이 있어야 합니다. 공간을 중심으로 놓으면 예수의 말씀대로 예배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식의 예배를 부정하십니다. 이제 어느 특정한 장소나 공간으로서의 예배드리는 곳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성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서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나 자신이 성전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성전이란 말은 예배 드릴 유일한 공간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 우리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것, 내면의 깊은 중심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지금 이 순간에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나’로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려면, 바로 우리 자신이 항상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 하나님과 만나 있는 하나님의 존재여야 합니다. 고전 6장 19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지금 이 순간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셔야 합니까? 항상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그리심산,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몸과 나의 실존이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인에게 하나님은 바로 네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 안, 내 내면 깊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 내면 깊은 곳, 바로 나의 진정한 중심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내 내면 깊은 곳에 계셔서, 직접 나의 중심이 되어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목마름도, 배고픔도, 불만족도 없습니다. 항상 끊임없이 흐르는 깨끗하고 맛있는 생수가 흘러넘칩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우리도 영으로만, 영적으로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영으로, 혹은 영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절차나 예식이나 종교적인 순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잠잠해지는 내면의 침묵, 마음의 고요함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흠모하며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지금 이 순간 ‘그저 있는 분’으로 계심을 잠잠히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이 항상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예배하고 흠모하는 성전이 된다면 우리가 있는 모든 곳,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다 거룩한 곳이 됩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것도 제자들도 아닌 이단자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놀라운 진리를 가르치신 의도는, 예수께서 성전을 나와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이게 이방인보다 더 경멸하던 사마리아인, 그것도 여인, 부정한 여인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가장 신성한 가르침을 주셨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메시지입니다. 제가 춧불 집회에 참석하며 깨달은 사실, “하나님은 교회에서 광장으로 나오셨다.”과 같습니다. 이 말을 뒷받침해주는 한 종교학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세속화된 형태로 근대 세계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성당에서 빠져나와 있다.” 한 개인의 내면이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유일한 공간임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교회가 아닌 세상으로 우리와 함께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곳,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앞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항상 영이신 하나님을 흠모하며 잠잠히 거하여 있는 영적존재로 살아가십시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혼신을 다해 만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내면이 성전임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자신의 내면, 자신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그것은 영적으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의 깊은 갈망, 영의 갈망은 여러분 자신의 내면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영적갈망을 해결해줄 생수, 생수의 근원은 이미 여러분의 내면에, 여러분의 중심에 흐르고 있습니다. 종교로도, 그 어떤 노력으로도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내면 안에 흘러넘치는 생수가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리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이미 나의 내면에 계신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자각하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