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스승 예수님
다음 그림에서 동그라미를 찾아보십시오. 전부 몇 개일까요? 찾으신 분은 답을 말하지 말고 “아하!”라고 외쳐주십시오. 어떤 분은 쉽게 찾으셨겠지만, 대개는 도대체 어디에 동그라미가 있는지 찾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림에는 온통 사각형만 보일테니까요. 동그라미를 찾지만 눈에는 사각형만 들어옵니다. 동그라미를 찾으라 해서 찾지만, 우리 의식에는 ‘이 사각형 안에 무슨 동그라미가 있지.’라는 의문이 가득합니다. 그 의문은 사실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사각형만 보려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동그라미를 찾으라는 말을 듣고, 동그라미를 애써서 찾지만 무의식 중에 우리는 사각형만 보려하고 있습니다. 사각형만 보려하는 무의식적인 강한 의식을 놓치 않으면 결코 동그라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각형만 보려한다는 강한 의식을 놓고 다르게 볼 때, 여기엔 분명히 동그라미가 있습니다. 그것도 이 작은 그림 안에 열 여섯 개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심리학자들이 개구리의 눈은 어떻게 사물을 보는지에 관해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에 의하면 개구리는 물체가 가진 모양이나 색깔과 움직임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물을 그 색깔대로, 그 모양대로, 그 움직이는 동작대로 다양하게 보지만, 개구리는 뭔가 어슴프레하게, 그림자처럼 보는 것이지요. 개구리 눈에는 단 네 가지만 비쳐보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있는 곳 주변의 대충의 테두리, 둘째 갑자기 움직이는 그림자, 셋째는 자기보다 훨씬 큰 몸집의 적수가 덤벼들때의 어두운 그림자, 마지막으로 자기 시야로 갑자기 파리같은 작고 검은 그림자 등입니다. 개구리에게는 오직 이 네가지만 감지되고, 나머지는 자동으로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예쁜 꽃을 보면 거기에 빠져 ‘아, 예쁘다’하지만 개구리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와 상관 없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즉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실험을 개구리보다 수준 높은 동물들인 개, 원숭이 등에도 했는데, 개구리보다 좀 더 복잡하게 보기는 하지만, 역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만 보고 나머지는 무의식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물들보다 조금 복잡하게 작용할 뿐이지, 자신이 살아가는데에, 생존하는 데에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보고 듣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 이미 땅에는 미세한 진동이 있습니다.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진동입니다. 하지만 새들이나 개, 두꺼비 등은 이 진동을 느끼고 몸을 피신합니다. 우리가 가진 감각 기관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실제로(real)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배워서 알고 있다는 것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있기보다는 지극히 일부분을, 그것도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알게 모르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내 맘대로, 내가 알고 싶은 대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밤에 길 가다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물체를 보고 뱀이라 놀라 자빠지기도 하고, 황토빛 흙에 묻혀 있던 돌덩이를 보고 금덩어리라고 착각하며 좋다고 춤을 추는 왔다갔다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좁다란 세상이 전부인줄 착각하며 거기에 눌러 앉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그렇게 목놓아 말씀하셨는데도, 그렇게 간절하고 자신의 전 삶을 걸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좁은 길을 가는 자가 복이 있다’고 참된 축복을 외치셨는데도, 우리는 손 안에 잡히는 물질적인 축복이, 죽고 난 다음에 들어갈 내세의 천국만을 동경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실재로 펼쳐지는 진리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저 그림 속 네모만을 보느라, 거기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 동그라미의 세계를 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내면의 관점, 우리 내면에서의 보는 시각, 세계를 바라보는 내면의 의식이 하나님 나라라는 가치기준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하자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로 그 내면이 가득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내면의 관점, 내면의 의식으로 가득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라는 내면의 의식을 영적인 사고방식, 영적인 의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 영적인 의식으로 우리의 의식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면의 고정되고 편협한 사고방식과 의식, 즉 자아로 가득한 의식을 버리고 예수님의 영적인 사고방식으로 바꾸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면엔 우리를 그의 제자로 삼으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라면 그분은 누구시죠? 우리의 스승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나 ‘교인’으로 보시지 않고, ‘제자’로 보셨습니다. 즉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이들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또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며 질책을 하시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가 스승이라면 믿고 구원받으라보다는, ‘듣고 '깨달으라'. 들을 귀있는 자는 들으라. 듣고 깨치라!’가 더 중요합니다. 그를 의지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좋은 곳에 가는 것보다, 그의 가르치는 것 따르고 그를 본받는 것 중요합니다. 선생들은 자기만의 방식있습니다. 그게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라면 진리를 알고 깨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따르는 그 선생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따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신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따르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느냐”며 자주 한탄하셨죠. 주님은 주인인데, 주인이라면 주인으로 모시는 하인들이 철저하게 완전하게 복종하는 게 맞지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라 부르면서 주인의 명한 바는 제대로 실행하지 않으니 주님으로 부르는 것이 다 허사인 게죠.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면에는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겸손한 복종의 자세보다는, 그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또 믿음이라는 어떤 능력으로 삶의 어려움을 해결하며 나중에는 천국이라는 극락 비슷한 사후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은근히, 아니 노골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자신의 구미에 맞는 어떤 것을 얻으려 하는 이기적인 종교적 에고의 욕망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지표가 될 스승으로, 그의 가르침대로 진리를 깨닫게 해줄 깨달음의 스승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도마복음을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연구하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도마복음이 예수님을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깨우치게 해줄 스승으로, 깨달음과 영혼의 깨어남으로 인도해줄 위대한 스승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그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현재 인도 최대의 종교는 힌두교, 그 다음은 이슬람, 그 다음이 카톨릭, 그 다음이 그밖의 종교들입니다. 불교는 바로 그 밖의 종교에 포함되어 1%도 안 되는 수의 신자를 가졌을 뿐입니다. 불교가 발흥지인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브라만교, 힌두교가 카스트제도, 즉 사람마다 서로 다른 아트만, 즉 자아가 있는데 어떤이는 고귀한 아트만, 어떤이는 비천하고 천박한 아트만을 가지고 있어 그에 따라 신분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어느날 나타나서는 본성적 자아인 아트만이란 건 없다고, 즉 무아anatman를 주장하자, 사회적 계층, 위계적 계급을 강조하던 브라만교로서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신분제도인 카스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인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불교가 티벳과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가서 선불교형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발생지인 이스라엘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이 기독교로서 다행일까요?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이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예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권력을 거머쥔 문자주의 정통 기독교일 뿐입니다. 권력과 부와 거대한 힘을 가진 로마 제국과 결합한 종교일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로마제국을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걸 크리스텐덤이라고 부르지요. 교회의 모든 조직을 로마제국의 계급제도로 바꾸었습니다. 귀족과 평민 나누듯이 성직자와 평신도를 이때 나눈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최고 수장을 황제, 교회의 최고 수장을 교황(교회의 황제)이라고 부릅니다. 문자주의자들은 영성주의 기독교와 대립할 당시부터 주교의 권한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주교란 성직자를 말합니다. 주교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까지 말한 자들도 있습니다. 매우 권위적, 계급적입니다. 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사라졌듯이, 기독교가 발생지인 이스라엘에서 사라졌듯이, 예수의 가르침도 정통 기독교에서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로마나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 아닌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모든 이의 내면에 하나님 나라 있으니, 성직자도 평신도도 구분 필요없습니다. 모두가 성직자, 모두가 귀족,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내 안에, 즉 나의 내면 깊은 곳, 존재의 근본 바탕에 그리스도께서 계셔 우리의 존재의 근본을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르침들을 가르치신 위대한 스승, 깨달음의 스승을 도마복음을 통해 꼭 만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