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닮는 믿음
“이는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은 도마복음을 시작하면서 도마복음이 어떤 책인지 소개하는 간략한 소개의 글입니다. 짧지만 이 글에는 도마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핵심은 세 개의 내용으로 이뤄져있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 “디두모 유다 도마” “비밀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도마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썼습니다. 도마는 도마복음을 쓰면서 왜 이런 설명으로 시작했을까요? 여기엔 도마복음을 이해하고, 도마복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 세 개의 문구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먼저 도마는 예수를 “살아계신 예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네 개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소개하는 방식과 다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며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분”,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계신 말씀, 곧 하나님이신 말씀”(요 1:1)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는 것처럼 사복음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위대한 인물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요, 심지어 하나님과 같은 분, 다윗처럼 왕이 되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도마는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소개합니다. 사복음서와 비교해보면 다소 평범하고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도마는 왜 예수님을 하나님, 즉 신과 같은 이나 아브라함과 다윗 같은 위대한 인물들과 비교하기보다, 아무런 거창한 수식 없이 그저 “살아계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사복음서에서는 우리와 달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특별하고 신성한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고, 결코 우리가 그에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으로말입니다. 그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를 높여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그를 믿고 의지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를 닮거나 흉내내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요. 반면에 도마복음이 말하는 “살아계신” 분이라는 묘사에서는 우리와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예수’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도마가 이 글을 처음 기록할 때에는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신, 즉 생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산 사람을 앞에 두고 굳이 ‘살아 있는’이라는 형용사를 갖다 붙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도마가 자신 앞에서 말씀하시던 예수에 대해 “살아계신”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는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숨쉬고 피가 흐르고 눈을 껌뻑이는 그런 육체적 생명을 가진 상태를 말함이 아닙니다.
도마복음에서 ‘살아 있다’는 말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영적 본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살아계신 예수”를 “얼나를 깨달은 예수”라고 해석했습니다. ‘얼나’란 자아, 즉 에고로서의 나와 반대되는 참된 본성인 영적인 자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얼나’란 영적인 자아 혹은 영으로서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얼’은 영 혹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얼나를 깨달은 예수’란 영적 자아로서의 자신을 깨달은 예수 혹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숨쉬고 먹고 생활하는 육신적 생명을 살아 있다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8:22)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명이 와서 예수께 죽은 자기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니 하신 말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 죽었습니다. 지금 죽어서 숨이 끊기고 몸이 굳어버린 시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사람들에 대해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대단해도, 심지어 아무리 종교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라도, 에고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 에고,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본성이 에고가 아니라 영임을, 영적인 자아임을 깨달은 이들만이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에고로 살아가는 이들은 영이 죽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본성을 깨닫고 영적인 자아를 깨달은 이들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이들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과 진정한 하나됨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깨어나고, 자신의 영적인 본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깊은 연결을 맛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고 말슴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영으로 하나되는 은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신을 ‘디두모 유다 도마’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디두모’와 ‘도마’는 같은 뜻의 말들입니다. ‘디두모’는 그리스어로 ‘쌍둥이’라는 뜻이고, ‘도마’는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도마와 디두모는 도마에 대한 별명 혹은 도마의 특징을 말해주는 말들이고, 도마의 진짜 이름은 ‘유다’인 것이지요. 도마는 자신을 ‘쌍둥이요 쌍둥이인 유다’로 소개한 셈입니다. 쌍둥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썼다는 것은 도마가 이 쌍둥이라는 말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쌍둥이란 똑같이 생긴 형제를 말합니다. 일란성 쌍둥이들은 어떤 경우에는 거의 똑같아서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얼핏보면 완전히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도마가 자신을 쌍둥이라고 소개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과 꼭 닮은 사람라는 뜻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과 육체적으로 꼭닮은 쌍둥이라는 말이 아니지요. 바로 영적으로 꼭 닮은 쌍둥이와 같은 그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라 그 가르침대로 깨우치고, 스승의 수준만큼 올라간 제자들에 대해 쌍둥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이런 전통이 있습니다. 선불교의 경우, 함께 깨달음을 얻은 동문 수행자에 대해 쌍둥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키며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온전히 따르는 이들을 형제, 자매로 보셨습니다. 자신과 같은 피, 같은 아버지를 둔 똑같은 어떤 특질을 가진 자신의 형제로요. 도마가 쌍둥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예수님과 영적으로 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이나 도마가 도마복음을 기록할 당시인, 초대교회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그리스도라 부르며 숭배하는 이들, 그를 예배하고 그를 믿고 그를 섬김으로써 그에게서 복을 받고, 만사형통하고, 기도응답 받고자 하는 자들은 많아도, 예수를 닮고, 그가 가신 길을, 그가 깨달은 영적 깨달음을 따라가고자 하는 이들은 매우 적습니다. 그를 닮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가 가진 영적 본성, 그의 영적 유전자를 똑같이 닮는 것을 말합니다. 스승으로서 예수를 본받고 그 저럼 자기를 부인하고 영적 존재로 겨듭나, 영성적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영적존재로영적 자아로 거듭나며,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점점 더 에고의 이기적 성향이 죽고,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영으로 깨어나는 이 길,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진리,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데에 너무나도 눈이 감겨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참된 도에 우리는 여전히 까막눈입니다. 성경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열정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주님의 도가 우리에게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신이 받아적은 "살아계신 예수"의 말씀이 '비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비밀의 말씀은 비밀스런 말씀이나, 은밀한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자,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영적 자아를 깨닫지 못한 자, 자신 안에 있는 영이신 하나님 과 함께 깨어나지 못한자는 결코 알 수 없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비밀의 말씀은 에고의 차원에서, 종교적 에고가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차원에서는 결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새로운 차원으로 과감히 바꿔야 할 때입니다. 나, 즉 자기중심적 에고로서 그저 나만 잘되고, 더 복받고 더 내 소원과 기대와 원함을 이루려는 저급하고 미숙한 믿음에서, 예수를 닮고 예수와 같은 본성을 가지며, 예수와 같은 영적 존재로 깨어나는 더 깊은 믿음으로 바꿔나가야 할 때입니다. 공자는 “잘못 되었으면 고치는 데 거리끼지 말라(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논어, 학이편)이라 했습니다. 또한 “잘못을 고치지 않는 이것을 잘못이다.(과이불개시위과의(過而不改是謂過矣)"(논어, 위령공편)라고 했습니다.
불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물이 무진장으로 쌓여 있는 부자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 나라로 두 사람이 재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그 재물은 따로 주인이 없어 가져가는 자가 곧 임자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 발견한 재물은 쌀가마니였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쌀을 한 가마니씩 짊어졌습니다. 한참 가니 비단 더미가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지고 온 쌀가마니를 내려놓고 비단으로 바꾸어 한 짐 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이제까지 지고 온 수고가 아깝다며 쌀가마니를 그냥 지고 갔습니다. 한 사람은 값진 것이 나올 때마다 바꾸어 짊어졌습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그 동안 지고 온 수고가 아깝다며 쌀가마니를 그대로 지고 갔습니다. 나중에 집에 와 보니 한 사람은 금을 한 짐 지고 왔고, 다른 한 사람은 쌀을 한 가마니 지고 왔습니다. 누가 어리석고 누가 슬기로운가요? 이제까지 믿어온 믿음이 아깝다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날로 날로 새로워지는 믿음, 날로날로 깊어지는 믿음이 되어야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저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며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소원만 이루려는 미숙하고 저급한 기복 신앙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에고가 죽고 영으로 깨어나, 예수의 비밀의 말씀을 깨달아, 예수와 같은 영적 존재로, 예수께서 가지셨던 영성적 본성으로 다시 깨어나는 깊은 믿음으로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