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생명으로(도마복음 1절)
도마복음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도마는 서론에서 예수를 “살아계신 예수”라고 소개했습니다. ‘살아계신’이란 예수께서 에고가 죽고, 영이 살아있는 분이요, 자기부인을 통해 자신의 영적 본성을 깨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살아 있는 영으로 깨어난 이들에게는 에고의 죽음, 육체의 죽음은 있을지언정, 영의 죽음은 결코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생명은 에고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부활이 반드시 몸의 죽음을 통과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생명인 영이 그 생명력을 드러내려면, 반드시 에고의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이미 사망,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오는 놀라운 은총을 허락받았습니다. 요한복음 5:24를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죽음의 에고)에서 생명(생명의 영)으로 옮겼느니라.”
예수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일을 미래형이 아닌 이미 일어난 과거 혹 현재완료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영생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생을 누가 산다는 건가요? 지금의 나? 아니면 죽은 후 또 다른 나가 나타난다는 말인가요? 영생을 사는 나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합니다. 다만 누군가는 그걸 깨닫고 그 나로 깨어났거나, 그 나를 깨닫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기서의 사망은 바로 에고, 즉 자아의 사망입니다. 생명은 영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영생을 사는 나는 영으로서의 나, 영적 본성을 가진 참된 나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죽음은 에고의 죽음입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은 에고의 차원에선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에고는 항상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이 주는 두려움, 괴로움 속에서 삽니다. 모든 인간은, 정확히 말하면, 모든 에고 차원을 사는 인간은 아무리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항상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에고가 겪는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은 죽음으로부터 나타나는 두려움과 괴로움입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에고가 죽었음을 암시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에고가 죽고 없으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죽음 자체를 맛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고가 죽은 자리에선 영이 살아납니다. 영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뿐입니다. 에고에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요 괴로움과 공포의 근원입니다. 하지만 영에게는 죽음이 그저 하나의 관념이요, 생각일 뿐, 그 생각이 제멋대로 정의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영은 관념을 넘어서고 생각을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이라 정의해 놓은 그 사건을 그저 하나의 있는 그대로의 사건으로 알아차릴 뿐입니다. 에고는 죽음이라 이름 짓고는 그건 나쁜 일, 안 좋은 일, 슬픈 일이라 생각하며 미리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고, 어떻게든 그 죽음을 늦추려 안달복달합니다. 현대사회는 '죽음'이 아주 괜찮은 장사거리입니다. 보험, 병원, 요양병원, 장례사업(상조) 등 말입니다. 이 죽음 장사는 죽은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는 산 자들, 그저 에고로만 살아가는 자들,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하는 에고의 차원에 사는 자들을 상대로 합니다.
절대로 변함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났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꽃이 피면 지고, 해가 뜨면 지고, 모든 건 변합니다. 모든 건 지나갑니다. 우리의 생도 언젠간 다 지나갑니다. 우리 부모, 조상들이 그들 생을 살다가 다 떠나갔듯이, 우리도 언젠가 떠나갈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죽지 않을 사람인 것처럼 그걸 피하려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생명은 다 죽는 게 절대불변의 진리일진대, 그걸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이치지 그걸 두려워 피하려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은 해가 뜨면 밝은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어두운 밤이 되는 것이 싫다고 스트레스 받고 짜증내며 괴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은 육체에 국한된 일입니다. 이는 분명하고도 명백한 사실인데 왜 도마복음의 예수께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거라 하시는 걸까요? 예수께서 이를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선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정말로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있는 어떤 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거란 말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이 주는 고통, 괴로움을 맛보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먼저 우리 안에 죽음을 맛보지 않는, 죽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게 도대체 뭘까요? 죽지 않고 항상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영입니다. 모든 건 변하지만 항상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 영, 그리고 지금 이 순간입니다. 우리가 참된 생명인 영으로 깨어나 있다면 항상 변함없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영은 죽음도 어느 날 지금 이 순간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 이름 붙여놓고 두려움, 피하고 싶은 것의 대명사가 된 그것이 아니라, 그저 나고, 자고, 먹고, 걷고 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사건 중의 하나로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그 순간 이후에는요? 우리는 실제의 영생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꼭 죽음 이후에 경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는 그 에고가 죽고 그 에고로부터 깨어난다면, 그래서 점점 더 영으로 깨어난다면, 자신이 이미 영원히 항상 존재하는 영으로서의 존재임을 깨달으면 우린 영생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운 죽음이란 사건으로 맛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반드시 겪게 될 하나의 지금 이 순간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책 <인생론>에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지 않고 항상 변함없이 있는 영조차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어야 할 것, 즉 육체와 에고가 죽는데 무엇 때문에 두렵겠느냐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괴로움을 맛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면엔, 자신이 완전히 소멸될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죽음 이후 지옥에 대한 두려움, 천국극락 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깨어나 죽음을 우리의 관념이 지레 겁먹듯이, 고통스럽고 모든 게 끝장나는 두려운 것이 아닌, 우리가 매일 매순간 경험하는 하나의 또 다른 지금 이 순간으로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 안의 죽지 않는 그것, 바로 영은 그 죽음을 그저 지나가는 무상한 하나의 시간으로 흘려보내고, 오히려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관문으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문자주의 종교의 한 가지 장점은 내세의 영생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영생이든, 지옥에서의 영생(영벌)이든 말입니다. 다만 문자주의 종교는 지옥에 가길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크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복 받으려 안달하고, 심판받지 않으려 벌벌 떨며 법과 규칙을 지킵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종교는 지옥이 두려워 벌벌 떠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영성은 지옥을 다녀온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궁극적 실재, 즉 우리의 진정한 영적 본성을 자각하고, 영적 본성을 가진 우리의 참된 나의 근본 바탕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깨달으며, 지금 이 순간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은 에고의 허상으로부터 깨어난 사람입니다. 자아가 만든 조각난 세계로부터, 모든 것이 하나 된 세계로 깨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 천국 지옥, 삶과 죽음의 구분이 불필요합니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기인하고, 죽음은 또 다른 삶을 만든다는 사실을 압니다. 항상 자기가 좋은 것은 집착하여 그걸 놓치면 괴로워하고, 자기가 싫은 건 피하려 괴로워하는 에고, 즉 이기적 자아로 사는 한 그런 삶은 자체로 지옥입니다.
한평생 하루도 쉬지 않고 노동하던 사람이 어느 날 죽었습니다. 그가 간 곳은 살아생전에 꿈꿨던 온갖 좋은 것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음식, 그리고 안락한 생활이 다 있는 곳이었습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턱시도를 입은 지배인이 다가왔습니다. “선생께서 선택만 하면 이곳에 있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음식이라도, 어떤 즐거움이라도, 어떤 종류의 차, 집이라도 말입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생전엔 그림의 떡이었던 산해진미를 맛보았고 갖가지 오락에 흠씬 빠져 보았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세월을 보냈을까요? 어느 날 그는 먹고 노는 일에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그는 지배인을 불렀습니다. “모든 것이 지겨워졌소. 무슨 일인가 하고 싶어요. 나한테 아무 일이라도 맡겨 주시오.” 지배인은 안쓰럽다는 듯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가 선생께 해드릴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곳엔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는 매우 낙심했습니다. “그렇담 지옥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소?” 그가 따지고 들자 지배인은 정중히 되물었습니다. “선생께선 지금 어디에 와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항상 고요한 샘처럼, 맑은 호수가 비가 오나 먹구름이 비치나 그 물 자체는 맑고 깨끗한 물인 것처럼 순수한 영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 어떤 풍파에도 그 자체로 천국입니다. 에고가 죽고 영으로 깨어나신 예수, 영적 본성을 깨치신 예수와 함께하는 삶,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를 따르는 삶은 그 자체로 천국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그 안, 내면 깊은 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졌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기에 이미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에고로 사는 한 그 자체로 죽은 것이요, 영으로 깨어나 살면 그 자체로 항상 사는 것입니다. 에고로 사는 삶 자체가 지옥이요, 영으로 사는 한 그 삶은 항상 천국입니다. 에고는 천국 지옥 나눠 천국은 집착하고 지옥은 피하려 합니다. 영은 천국 지옥 구분 안 하니 집착도 두려움도 없이 항상 천국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