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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영적인 깨우침(도마복음 2절)
2절에서 예수께서는 “추구하는 자가 찾을 때까지 멈추지 말라.”고 하십니다. 멈추지 말고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 하셨습니다. 또 추구한 것을 찾은 뒤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도 언급하십니다. 그것은 혼란, 놀람, 다스림입니다. 맨끝에, '다스림'이라는 건 꽤 매혹적입니다. ‘모든 걸 제맘대로 다스릴 수 있다면’ 하는 게 많은 이들의 원하는 것 아닌가요? 헌데 예수가 의미한 다스림은 이런게 아닙니다. 그가 의미한 건 지극히 내면적이고, 지극히 영적인 걸 가리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미망들과 허망한 생각들, 감정의 찌끼, 상처와 아픔들, 이런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자기를 다스리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 에고라는 허상에 휘둘리지 않고 에고를 부림으로서 마음과 생각으로 불거져 나오는 욕망과 집착과 고통을 다스릴 수 있는 그 다스림. 바로 영적 다스림,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내적 자유, 영적인 힘을 가지려면, 먼저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다스림에 이르는 이전 단계들을 거쳐야 합니다. 그 단계들은 혼란, 놀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야 다스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다소 의아한 것은 영적 힘을 얻기 위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단계가 혼란이라는 것입니다. 왜 혼란일까요? 혼란은 불안, 염려, 두려움 등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따져 봅시다. 말씀에 의하면, 멈추지 않고 찾을 때까지 뭔가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멈추지 말고 추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뭔진 모르지만 예수께서 찾으라 하신 것이니 꽤나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일 겝니다. 그런 것이면 찾았을 때, 기쁘거나 희열을 느끼거나 만족스럽다거나 하면 좋을 텐데, 혼란스럽다니요? 예수께선 이렇게 혼란스럽게 될 걸 뭐하러 멈추지 말고 찾으라 하신걸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힘입니다. 즉 자기 자아, 에고를 다스리는 힘이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마음과 생각의 차원에서 생겨나는 온갖 고통과 아픔과 상처들을 극복하여, 내면적 자유와 평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 힘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영적 힘을 얻기 위해 예수께선 멈추지 말고 추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멈추지 말고 추구하고 찾으라 하신 것은 바로 그 영적인 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건 바로 진리, 하나님, 에고와 마음과 생각을 넘어서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본성을 가리킵니다. 이 영적인 힘을 얻는 데에 있어서, 진리를 마주할 때에 가장 먼저 거쳐야 할 것이 바로 혼란스러움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믿던 것이 진리인줄 알고 있다가, 진정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때까지 알던 것에 대해선 엄청난 혼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 영적 힘을 얻는 과정서 혼란과 불안, 자신이 딛고 의지해 서있던 기존의 토대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는 진리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의 자신이 진리라 알고 있던 그것이 거짓이요 불완전한 진리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기쁨보단 자신이 믿고 알던 불완전한 진리가 무너지는 경험, 거기서 오는 혼란과 불안감이 큰 게 당연합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교회를 그리도 열심히 다니면서 내가 예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었다는 반성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여 그 해가 가기 전에 성경을 꼭 한번은 읽겠다는 각오로 성경통독에 돌입했습니다. 그때 정말 미친듯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정말 집중력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예수님을 알겠다는 일념으로 읽어댔습니다. 어찌보면 지금 목사가 되고서도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은 그때 형성된 거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성경에 푹빠져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도 다 그때 성경을 읽으며 받았던 마음의 감화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푹 빠져 읽으면서 나는 예수님을 더 알고 싶다는 영적 갈망이 깊어졌습니다. 이렇게 영적 갈망이 깊어질수록 또한 동시에 깊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알고 싶고 만나고 싶은 예수를 정작 내가 속한 교회, 내가 만나는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명 설교에서는 예수를 말하고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또 성경공부에서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말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 헌신하여 평생을 예수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목사, 선교사, 신학자들을 만났고 예수에 대해 설명하는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에게서 예수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서도 예수가 과연 나에게 어떤 분인가, 나는 예수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찬양 인도자로서, 또한 선교사로서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알고, 예수에 대해 많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또한 항상 정말 열정적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그분으로 높여 경배하며 그를 갈망했음에도, 내가 정말 예수를 만나고 알고 있는 걸까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런 의구심을 갖게 한 것은 바로 처음 성경을 읽으며 마음에 생겨난 영적인 감화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정말 안다면 나는 혹은 교회는 또는 기독교인들은 어때야 할까? 정말 이게 교회다운 모습이고, 기독교인다운, 아니 예수의 제자다운 모습일까? 교회가 조금이라도 커지기만 하면 교회당부터 짓고, 그저 하나의 코스웤일 뿐인 제자훈련이니, 선교훈련이니, 가정교회니 하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정말 우리를 예수와 실제적으로 연결지어주는 걸까? 우리를 예수의 자기부인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따르게 하는 걸까?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왜 그런 프로그램을 참석하고, 예배에서 그토록 간절하고 열정적으로 예수를 부르며 찬양하면서도, 그들에게선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걸까?’
이런 차제에 행전교회에서 행했던 산상수훈 설교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 말씀을 연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의문이 풀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2년 전의 경험 후에, 도서관에 틀어박혀 교회 밖에서 묘사하고 관심 갖는 예수, 교회 밖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수를 연구하고 파고 들어가면서 거의 완전히 의구심을 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교회에서 배우고 알고 믿는 예수는 바로 우리가 정통이라고 알고 있던 문자주의 기독교, 로마에 의해 로마화된 기독교에 의해 완전히 말살되고 변질된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특히 산상수훈에서 보이는 예수는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는 자기부인의 예수, 세상의 권력과 돈과 명성을 뒤로하고 세상 영광을 버리고 좁은 문, 좁은 길을 가신 예수였습니다. 화려하고 찬란한 로마의 황제처럼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세력과 세도를 떨치는 예수가 아니라,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항상 자비로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제도적 종교가 아닌 우리 내면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일깨워주시는 예수, 그저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경배하라고 존경하라고 꿇어엎드리라고 강요하시는 예수가 아닌, ‘나를 따르라’시며 우리의 삶과 영혼의 스승이신 예수였습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요구하는 분이 아닌, 그분의 삶을 모범으로 따를 것을 원하시는, 그리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 영적인 깨어남과 동시에 찾아오는 깨우침을 강조하신 예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성 기독교, 제도적 종교인 기독교와 그 교회에서는 매우 찾아보기 어려웠고, 오히려 도서관에 처박혀 교회 밖에서 외치는 인문학자들의 외침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다른 종교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바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과 비슷한 가르침들을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내에서는 문자주의 정통 기독교가 외면하고 이단이라 제거하였던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에게서 깨달음과 깨우침을 강조하신 예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러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면서 느꼈던 것은 바로 혼란스러움이었습니다. 저는 장로교단의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았고, 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말씀, 정통, 신학을 줄기차게 외치는 교단에서요. 타종교는 물론이고 영혼의 내적 신비를 강조하는 이들을 경계하며 오직 말씀, 문자로된 오직 말씀 오직 신학만 강조하는 교단에 속한 제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소 다른, 제가 믿고 확신했던 것과 다소 다른 예수를 발견했을 때의 그 충격과 혼란이 얼마나 컸을지 여러분은 아마도 잘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교회와 기독교가 잃어버리고 외면한 예수를 오히려 교회 밖에서, 신학 외적인 세상의 철학과 역사와 비교종교학에서 발견했을 때의 그 충격 말입니다. 이 예수를 내가 속한 기독교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걸까? 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만난 것이 바로 도마복음이었습니다. 도마복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신학교때 배워서 알고 있었습니다. 신약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외경 중의 한 책이라는 정도로요. 그리고 우연히 얻게 된 가톨릭 성경에 뒷 부분에 도마복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읽을 필요가 없고, 아니 읽어서는 안 되는 그런 이단시되는 책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지요. 하지만 막상 책을 펴서 이미 발간된 도마복음 주석서들과 함께 읽어나갈 때, 제가 느꼈던 경험은 바로 놀라움이었습니다. 도마복음에 제가 다른 종교들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한 것과 거의 같은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가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예수>라는 제목으로 도마복음 주석서를 낸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박사는 “문자적이고 표피적인 뜻이 전부라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이 더 깊은 뜻을 알게 되면 일단은 당황할 정도로 혼란스럽고 고민스러워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어 복받고, 예수 믿어 만사형통하고, 예수 믿어 성공하는 인생을 얻으려는 기복주의 기독교만 기독교로 알고 있던 종교인들이 영적 깨달음과 깨어남을 강조하는 예수, 내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이렇게 하나님과의 합일을 가르치시는 예수를 만나면 혼란스럽고 고민스러워하게 됩니다. 또 오강남 박사는 진리는 불편한 진리요, 훌륭한 종교적 가르침은 ‘편안한 사람에게는 혼란을, 혼란한 사람에게는 편안을 준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혼란스럽과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저 설교를 듣고 마음이 편안하고 위로받고 습관적으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하는 정도에서 머물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진정 진리를 만났다면 자신이 가진 거짓 진리, 불완전한 진리에 대해 혼란스럽고 흔들리고 고민하며 그것이 마구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저 예수 믿어 그를 예배하여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사무탈한 삶을 사는 정도, 만사가 형통하고 내 가족 내 사업 잘 되는 정도의 신앙, 그 정도의 기독교 진리를 진리라 알고 있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라 외치시는 깨달음의 예수, 영적 깨어남의 예수를 만나면, 기존의 기복신앙은 참 무의미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욕망에 불과했음을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나인 영적인 본성을 가진 참된 나, 나의 내면 안에 계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면 놀라게 됩니다. 우리의 혼란이 영적 혼란이요,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한 참된 진리로 인한 혼란이라면, 그 혼란은 결코 혼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놀라움을 경험하게 합니다. 돈이 주는 만족보다, 권력과 세상의 힘이 주는 만족보다, 세상의 명성이 주는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 물질적인 복보다 더 큰 영적 지복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이 놀라움은 바로 세상이 달라보이는 것, 실상이 달라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평생 시력을 잃고 앞을 못보다가 어느날 시력을 얻은 이가 세상을 볼 때의 그 감격처럼 말입니다. 세상이, 사물과 사람이, 실상이 달라보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우리의 내면은 마음과 생각을 넘어서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고통과 상처와 욕망과 감정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그리고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사본은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로 쓰였습니다. 이것 말고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본이 또 있습니다. 거기엔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다, 다음에 편히 쉬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정도로 영적으로 깨어나고, 마음과 생각을 일으키는 에고를 초월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자기 자신은 내면 깊은 곳에 영이신 하나님, 그 본성이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 항상 평안하게 안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쉼이 바로 예수께서 말하는 구원이요, 우리 안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