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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마치의 중공군
오늘도 이 숙우여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니 어느 결에 일어난 남편이 TV 앞에 서서 팔운동을 하고 있다
“ 잘 주무셨어요.”
“ 음.”
“ 어제 저녁엔 좋은 꿈꾸지 않으셨우. “
“ 그렇지 어제 저녁에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는데 허출하니 어서 밥이나 차려.”
“ 밥이 끓으려면 아직도 한참은 있어야 하니 조금만 참으tu요.”
이 여사는 그 말을 하고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는 쌀을 씻어서 솥에다 안쳤다.
봄 날씨라고 하지만 아직도 3월이라서 그런지 아침저녁은 싸늘하여 조끼를 하나 더 입었다.
이여사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지는 벌써 30년이 지났다. 집을 새로 짓고 올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새롭고 방까지 환하였으나 집이 오래 되다 보니 집안으로 들어서면 우중충한 기분이어서 요새 많이 한다는 집수리를 하면 좋으련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저냥 살다보니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집을 지을 당시에는 좀 높이 짓기 위해서 대문을 들어서면서 층계를 3단으로 하고 다시 현관으로 들어가기 까지 3단 층계를 만들다 보니 집은 번듯하고 앞이 훤하게 트였지만 지금은 몸이 그전 같지 않다보니 층계를 오르내리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에 어디 조금 높은 데라도 올라가시게 되면 다리와 허리가 아프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 그때의 어머니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다 보니 이제는 이여사가 어디를 자유롭게 다니지를 못하는 처지가 되어 옛 어른들이 나이를 못 속인다는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면서 살고 있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남편이 처음에는 건망증 증세를 보이더니 그것이 심해지고 요즘에는 옛날의 일은 제대로 기억을 하면서도 가끔은 아주 엉뚱한 소리를 하여 이 여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를 않는다.
초기에 병원엘 모시고 가니 의사는 대단치를 않지만 치매증세가 차츰 심해질 수도 있으니 안정을 취하고 꾸준히 약을 먹으라고 하여 그대로 하고 있지만 증세가 나아지지를 않고 있는 형편이다.
치매를 앓게 되면 나중에는 가족까지도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제발 더 이상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여사가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은 6.25가 일어나기 전 해로 그때에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는 순경시험을 보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야말로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대로 구식으로 결혼식을 하고 시집을 와보니 시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시지만 남의 땅을 얻어서 소작을 하다 보니 가을에는 그런대로 지나지만 봄이 되면 쌀이 떨어져서 앞집 부자 댁에서 쌀을 꾸어다가 먹거나 장리쌀을 얻어서 먹어야 했으니 시집을 오기 전에 친정에서는 쌀이 떨어진 것을 보지 못한 이 여사는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느꼈지만 참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침내 남편은 순경시험에 합격을 하여 경찰학교에 입교를 하였는데 그런지 보름 만인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강행하였다.
이 날은 일요일인데다가 새벽부터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는데 군 트럭이 지나면서 다급한 방송을 하였으니 공산군이 남침을 하였으니 한시바삐 피란을 나가라고 하여 시동생이 200m가량 떨어진 한길의 동태를 보러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지금 한길에 나가 보니 길이 미어질 지경으로 피란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밀려 나오는데 거의가 38선 부근에 사는 고탄 사람들을 비롯하여 일남. 용산리. 옥산포 사람들로 피란민들은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나오기도 하고 지게에다 짐을 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어서 우리도 피란을 나가자고 독촉이 빗발 같았다.
사태가 이렇다고 하자 시아버님과 시어머니는 옷 입은 채로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집을 나서니 비옷과 우산을 받쳐 들었지만 금방 옷이 다 젖고 말았다.
그때 이여사가 살던 집은 춘천의 강북인 사농동 농공고가 있는 가라메기마을이었다.
피란민들을 우선 소양초등학교로 가라고 해서 그리로 갔지만 몇 시간 후에는 다시 소양강다리를 건너서 시내로 이동을 하라고 하였다.
그때 지금의 춘천초등학교 근처에 살던 시누님이 사셔서 식구들은 모두가 그 집으로 가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였는데 이튿날 새벽에 봉의산 정상에 포알이 마구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자 사람들은 어서 피란을 나가자고 아우성이었다.
시댁 식구들은 이날 팔미리를 지나는데 그때 모를 내던 사람들도 피란민들을 보고는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쯤을 가자 날이 저물기 시작을 하였는데 마침 집 한 채가 있어서 들어가서 보니 피란민들이 가득 방안을 차지하고 있어 일부는 방안을 비집고 들어가서 잠을 자고 시동생은 봉당 끝의 비가 뚝뚝 떨어지는 쪽에서 가마니를 깔고는 잠을 자야했다.
하룻밤을 지나고는 다시 식구들이 멀리 갈 형편이 되지를 않아서 산을 올라가다가 솔골이라는 마을의 한집을 찾아 들어서니 그분들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며 걱정을 하였다.
그 집은 기역자집으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마루를 놓을 자리에는 털지 않은 보리 단을 쌓아놓았고 부엌에는 나뭇단이 쌓여 있었다.
이 댁의 주인은 이 여사네 식구에게 사랑방 하나를 내주었는데 방이 좁아서 식구들이 기거하기에는 불편이 따랐으나 언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되지 못하여 며칠간을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주인댁의 감자를 캐주거나 보리방아를 찧어주면서 동냥하다 싶이 한 끼 한 끼를 해결하였다.
매일같이 마음을 졸이면서 어느 듯 보름이 지나고 나서 소식을 들으니 춘천은 이미 인민군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피란민들도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자 집으로 들어간다고들 하였다.
그래서 이 여사네 식구들도 집으로 향하여 팔미리를 지나서 신남초등학교가 저만치 보이는 지점에 도달하였을 때 이 여사네 가족은 눈을 의심하고 제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으니 저 멀리에는 어깨에 붉은 견장을 단 인민군들이 피란민들을 줄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자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고 소름이 꽉 끼쳤던 것이니 만일의 경우 경찰가족이라는 것이 탄로가 난다면 이 사람들이 어찌 나올지 그것이 두려워서 가슴은 두근두근하였다. 그렇지만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외길이어서 할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한 발작씩 앞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자니 가슴이 떨려 도저히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긴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을 하니 이렇게 민적 대다가 오히려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서 억지로 그 앞을 지나가기로 하였다.
인민군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반기면서 환영의 말을 하였다.
“ 여러 동무들 반갑습네다 . 우리 인민군은 여러분들의 해방군으로 나왔습네다. 아무 걱정 마시고 이제는 피란 가지 않고도 잘 살 것이니 어서들 집으로 들어가시라요.”
이 여사는 그들의 말 한마디에 걸음을 재촉하여 그 자리를 벗어나고서 한길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으니 길 한쪽 언덕바지에 얼굴이 새까매진 남자 하나가 뒤로 나가자빠진 체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사람이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겠지만 난생 처음으로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목격한 이 여사는 사람이 저렇게 죽다니 하는 안쓰러움으로 마음을 진정하며 그곳을 지나쳤다. 소양로를 지나서 소양강다리를 들어서기 직전인데 여기서 또 한 번 놀랐으니 소양정 정지각 모퉁이 광장에 국군들의 복장을 한 군인들의 시체 10여구가 그대로 엎어지거나 하늘로 향해서 누워있기 때문이었다.
필연코 인민군과 싸우다가 전사를 한 군인들을 보게 되니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 진정할 수가 없고 그분들이 가엾다는 생각도 하기 전에 무서움이 밀려왔고 다리를 건너자 또 한 번 질겁을 하고 놀랐던 것은 그 넓은 제사공장 주위에 밭 가운데에 수도 없이 많은 인민군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는가 하면 수백 필의 죽어있는 말들이 네다리를 하늘로 뻗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7월의 찌는 듯한 한 여름이라 시체의 썩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코를 막아도 가시지를 않았다.
그렇게 말과 인민군이 거기에서 몰살을 당한 것은 국군이 봉의산 일우에서 인민군이 함빡 다리로 들어서서 건너올 때에 기관총을 발사하여 미처 빠져나갈 수가 없다 보니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후일에야 알게 되었다.
사농동 집에 도달해 보니 울타리 가에는 수도 없이 많은 참호를 파놓았는데 밭 가장자리에는 탄약을 담은 나무상자가 수십 개 포개져 쌓여 있는가 하면 쌀을 넣을 수 있는 흑갈색의 전대( 쌀을 넣을 수 있게 만든) 가 버려져있기도 하고 개울로 나가는 길모퉁이에는 말마차가 망가져서 버려져 있었다.
그때 인민군들은 대포를 말마차로 실어 날랐으며 소가 끄는 마차에는 탄약을 실어 날랐다.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국방군은 특별한 장비도 없이 전쟁에 임했던 것이니 초반부터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에 유엔군이 출전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장비에 대한 말이 나왔지만 인민군들이 소지한 따발총은 쏘련 제로 둥글게 탄피집이 되어 있어 한번 방아쇠를 잡아당기면 68발의 총알이 나간다고 하니 성능으로 보아서는 무서운 무기이고 또 한 가지 개인이 소지한 총으로는 따쿵총이 있었는데 이 총은 유난히 긴 장총으로 당시에 어린 인민군들은 이 총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라고 할만치 총의 길이가 길었다.
더구나 그 총을 쏘면 따쿵 하는 소리가 울려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니 그 총으로 인해서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집안에 들어서서 집안 청소를 대충 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낯선 사람들이 대여섯 집으로 들이 닥치더니 대뜸 식구들에 대한 동태를 살피고는 아들이 어딜 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무도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중의 한사람이 나서서 말을 하였다.
“ 우리는 댁의 아들이 경찰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왔으니 바른대로 이야기 하시라요.”
그러더니 그들은 다짜고짜로 신발 신은 채로 이 여사네 사랑방으로 들어가서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장롱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서랍 속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경찰학교 입교 통지서와 연수교재 등을 끄집어내었다.
그들은 방을 나오면서 하는 말이 이제는 인민군이 전 조선을 해방시킬 것이고 지금 대전을 점령하고 대구며 부산도 곧 함락이 될 것이니 그 안에 아들에게 연락을 하여 자수를 하게 되면 대우를 잘 해줄 것이니 그리 알라면서 돌아갔다.
지금까지 남의 집에 가서 세간 살이에 대해서 자세히 물을 수도 없을 만큼 금기시하고 사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남의 신혼새댁의 세간 중에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장롱 안까지 거리낌 없이 뒤지는 이자들은 어떠한 무리들이란 말인가.
이 여사는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적군들이 남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별별 짓을 다 하는 것이니 눈에 불이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그들은 부잣집에서 머슴을 살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내서는 붉은 완장을 채우고 민청위원회 소속으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하니 이 사람들이야 말로 처음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곧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들이야말로 남의 집 머슴으로 있다가 하루아침에 회전의자에 앉게 되니 세상이 변해도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는 모두가 얼마나 기고만장하였겠는가.
더구나 이제는 그들의 상전이 되어 자기가 살던 집주인을 잡아들여 무릎까지 꿀릴 수가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 얼간이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면서 끝까지 주인을 보호하려는 착한 머슴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빨갱이 중에 악질은 그것을 용납을 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니 이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을에 입성을 하면서 제일 먼저 한 작업이 지주들을 잡아드리는 일이었고 이 일을 머슴으로 있던 자들에게 시켰던 것이다.
그동안 너희들이 괄 씨를 받았으니 이제는 너희가 그 분풀이를 해야 되지 않느냐면서 앞장을 세우니 아무리 세상이 뒤집혀 졌다고는 하지만 자기에게 밥을 먹여 주고 입을 것을 챙겨주던 주인에게 어찌 감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면서 주인을 끌어낼 위인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김일성을 위해서 사는 방법이 아니라면서 강제적으로 주인을 잡아끌어내어 창고에다가 가두고 매질까지 하라고 하였으니 그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를 않으면 이 집단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주인들을 닦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 이 여사네 동네에는 서우지 집의 머슴으로 개똥 새라고 별명이 붙은 정환정이 살았는데 이 사람을 민청사무실에서 불러올리고는 완장을 채워주웠던 것이다.
이 사람은 원래 조실부모한 사람으로 어렸을 때에 동네로 떠돌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는데 이 애를 불쌍하게 생각을 하고는 아주 머슴으로 고용을 하게 되니 밭도 잘 매고 소도 잘 키워서 이 댁에서는 수양아들 겸 길러 주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정환정으로 하여금 주인집의 아저씨를 붙들어 오라고 명령을 한 것이니 정환정은 다른 일은 다 할 수가 있지만 그 일만은 못하겠다고 뻗딛게 되자 치안대장은 그 이상은 강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중에도 이여사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친정인 옥산 포에서 일어난 일로서 그 당시에 이장은 동네에서도 존경을 받을 만큼 동네일을 잘 보기도 하였지만 부자로서 살았기 때문에 머슴도 여럿을 두고 지났는데 하루아침에 인민군들이 들이닥치고 마을에 치안대가 형성되면서 지방빨갱이들이 득세를 하게 되자 맨 먼저 착수한 일이 부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이었다.
머슴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주인으로 하여금 구덩이를 파게 하였으며 스스로 구덩이로 들어가라고 하니 죽을 자리를 알면서 선뜻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악에 받치는데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무얼 잘못 했다고 이리 몹쓸 짓들을 하느냔 말이냐 . 너희 놈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남한을 점령하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길 것 같지만 절대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야 그러니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 “
그러자 지방빨갱이가 앞으로 나서면서 그의 말을 막으면서 죽창 하고 소릴 질렀다는 것이다
“이 놈아 그동안 잘 먹고 잘 지냈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고 총알이 아까워서 죽창 맛을 보여 줄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죽창을 든 놈들이 이장을 향하여 죽창으로 사방을 찔러대니 이장은 피투성이가 된 채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남에게 악한 일은 커녕 선량한 일만 하던 분이 이렇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자 같은 공산주의자들 까지도 속으로는 저주를 하였을 것이다.
이 분 댁과는 친교가 두텁던 이 여사는 친정마을에서 이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한동안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락을 점령한 후에는 부락마다 치안대를 조직하고 경찰가족과 군인 가족을 샅샅이 조사하여 무슨 방법을 쓰던지 간에 이들에게 압박을 가하려고 하였다.
더구나 해방 후 38선 부근에서는 끊임없이 공산주의자들이 지서를 습격해서 순경을 죽이는가 하면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을 너무도 많이 봐온 부락민들은 그들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고 청년들은 산에 가서 숨고 방공구덩이 속에서 숨어서 지나다가 국군이 수복을 하자 모두가 태극기를 들고 뛰어나와서는 북으로 진격하는 국군들을 환영을 하였으니 지금 생각을 해도 산속에 가서 숨어 살았던 사람들은 용감한 애국자들이었다는 생각을 떨 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여사네 집에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내무서원이 밤중에 집으로 와서는 이여사의 남편에 대해서 행방을 물었지만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어머니가 하시었다.
“ 나도 아들이 난리 통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몰라서 환장을 하겠는데 우리 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요.”
어머니가 워낙 강하게 나가시자 이들도 답변할 자료가 없다 보니 그냥 슬며시 왔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 유일하게 전쟁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소문밖에는 없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에게 패해서 후퇴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가는 곳마다 미군의 비행기에 박살이 나는 바람에 인민군은 밤에만 겨우 이동을 할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 대낮에는 인민군이 도로에 얼씬도 할 수가 없었으니 그들이 나타났다 하면 언제 어떻게 그 정보를 알았던지 쌕쌕이 제트기가 소리도 없이 와서는 폭격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쌕쌕이 제트기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소리도 없이 상공에 나타나야 비로소 비행기가 온 것을 알았을 정도로 쌕쌕이는 정말 빠른 비행기였다.
그 당시 춘천에서 홍천을 가자면 원창고개. 모래재 고개. 부사원 고개. 등 세 개의 영을 넘어가야 하는데 전쟁이 한창이던 8월 어느 날 인민군들은 갑자기 춘천 사람들에 대해서 동원령을 내렸던 것이니 그것은 춘천역에 보관하고 있던 쌀을 홍천 북방까지 운반하라는 내용이었다. 집집마다 한사람씩 동원이 되어서 역 창고엘 가니 앞앞이 몇 말씩 부대에 넣어서는 등짐으로 홍천까지 가라는 것이었으니 그때에 사람들의 행렬이 원창고개까지 닿았다. 그런데 쌀을 지고 가던 사람들이 가다가 원창고개에서 기겁을 한 것이니 쌕쌕이가 머리 위를 날면서 금방이라도 기총사격을 할 것 같은 공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쌕쌕이 비행기는 민간인들을 알아보고는 사격은 가하지를 않았지만 반공으로 뭉쳐진 사람들은 속으로 아무데나 폭격을 시원하게 가하라는 주문을 하였다.
홍천까지 가려면 도보로 이틀을 가야 했는데 그때에 고개 마루에서 산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모두가 놀란 것은 고개의 커브를 트는 골짜기 깊은 곳에는 여지없이 인민군들의 트럭들이 비행기 폭격으로 부서져서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이기려면 하늘과 바다와 육지를 제대로 장악을 해야 함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전술임에도 제공권을 모두 유엔군이 장악을 하였으니 인민군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9월 들어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우리 국군이 수도서울을 탈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마침내 국군이 서울에 입성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적치 3개월간이나 수도 서울을 빼앗겼다가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는 그 감격을 서울에 남아있던 동포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환영을 하였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춘천에도 홍천 쪽에서 대포소리가 간간히 들리기를 시작하더니 저녁마다 인민군들이 후퇴를 하는 대열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인민군들에게 어떤 행패를 당할지 모르게 되자 서면 쪽으로 피신을 하기에 이 여사네 가족들도 눈눞 강을 건너서 성주봉 밑의 한 으슥한 집의 사랑을 얻어서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을 있다 보니 쌀이 떨어져서 시아버님과 시어머니가 저녁때 농고 앞마을 집으로 쌀을 가지러 가셨다. 그때에는 밤에 비행기가 시간당으로 뜨기 때문에 불을 밝힌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깜깜한 어둠속에서 지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시부모님은 저녁을 해 잡수시고 쌀을 퍼가지고 강을 건너가려 하다가 너무 어두워서 이튿날 새벽에 가시기로 하고 11시가 지날 무렵 주무시려고 막 자리를 폈을 때에 싸리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 어쩌지요.”
시어머니의 겁에 질린 말씀에 시아버님은 급하게 뒷문을 열고 나가서는 장독간 뒤로 몸을 낮춘 것이다.
그런데 싸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안방 문을 열고 사람이 없자 뒷문을 열면서 “손들어.” 하는 소리에 시아버님은 금방 손을 들고 일어서셨다는 것이다.
인민군 세 명이 긴 장총을 시아버님을 향해서 들여대다가 내리더니 한마디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조금만 늦었으면 총을 그대로 쐈을 것이외다.”
그들을 안방에 들어앉더니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해달라고 해서 어머니는 그들에게 밥을 해서 주자 며칠을 굶은 사람들처럼 밥 두 그릇 씩을 먹고는 세상모르게 한잠을 자더니 새벽에 일어나서는 북으로 가면서 말을 하였다.
“ 어머이 우리도 북에는 어머이가 계시디요. 지금 인민군은 후퇴를 하는 판인데 여기 계시면 위험합네다. 내일 일찍 피란을 가시라요 .”
그들도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쌍하더란 말씀을 누누이 하시면서 시아버님은 그날 죽는 줄 아셨다면서 그 순간처럼 겁이 나보시기는 생전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때 춘천농업고등학교에는 밤마다 확성기 소리가 마을 전체로 번져 왔는데 그 넓은 운동장에는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그야말로 갈 가마귀 떼처럼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가죽 띠를 어깨에 두른 앳된 여자 병사들이 김일성의 노래를 부르면서 전쟁에 대한 승리를 고취하자고 열띤 방송을 벌렸지만 후퇴하기에 바쁜 인민군들이 그 소리를 제대로 듣기나 하였겠는가.
그런 어느 날 서우지집의 머슴으로 있던 정환정이 밤중에 살던 집으로 돌아와서는 주인아주머니를 붙들고는 제발 살려 달라고 애걸을 하였다는 것이다.
“ 저놈들이 불러내서 가서 앞잡이 노릇을 하였지만 이제 국군이 들어오면 총살을 당 할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하기야 인민군이 전쟁에 패하고 후퇴를 하는 판에 그 앞에서 자발적으로 몹쓸 짓에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 어찌 저 머슴 한사람뿐이겠으며 그와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그의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면 그의 편이 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전쟁이 휩쓸고 간 뒤에는 또 다른 후유증이 끝이 없었다.
춘천 사람들도 10월 초에 이르러 국군을 실은 트럭들이 날마다 북쪽인 화천 쪽으로 향하자 그 당시야 말로 통일이 곧 올 것이라는 기대에 사람들은 모두가 부풀어 있었다.
이 여사네 남편이야말로 경찰에 입교한 이후 소식을 전혀 몰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새까매진 얼굴로 금의환향을 하였으니 시부모님은 꿈에도 그리던 아들이 돌아오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남편은 그동안 경찰국 이동에 따라 포항까지 내려갔으며 구룡포에서 인민군과 접전을 벌렸으며 총알이 비 오듯 하는 전선에서 용케도 살아났다고 하였다.
적치 3개월 동안에 다른 고장에서는 지방빨갱이들에 의해 경찰가족들이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여사네 가족은 그래도 순탄하게 이 기간을 보낼 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부락의 민청위원장으로 있던 사람이 남편의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로서 사변 직전까지만 해도 양가 부모님들까지도 서로 왕래를 할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인데 사상이 다르다고 하지만 친구네 가족에게까지는 차마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마침내 38선을 돌파하고 압록강까지 진격을 한 뒤에 앞록강물을 떠서 이승만대통령에게 받치게 되자 우리 국민 모두는 드디어 남북통일을 이룩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국운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그랬던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민군의 지원병으로 국군을 공격한 것이니 아! 이것이 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줄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였으랴!
이후 유엔군은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꽹과리 부대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그 많은 장비를 눈 속에 파묻은 채 후퇴를 거듭하게 되니 이것이 다시생각하고 싶지 않은 1,4후퇴였다.
1,4 후퇴 이전에 춘천시민은 이미 초겨울로 접어든 11월 18일 다시 춘천에서 피란보따리를 꾸려야 했으니 인민군에게 다시 춘천을 빼앗길 것이라는 정보에 의해서였다,
이 여사네 식구들은 피란보따리를 짊어지고 청평댐을 지나 대성리 건넛마을에서 밤을 맞게 되었는데 그 부락 사람들은 왜 좋은 세상을 만나서 잘 살 수가 있을 텐데 피란을 가느냐면서 방이 있어도 내주지를 않았다.
그 당시에는 지방 빨갱이들이 마을을 지배하는 시대였기에 우리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날은 몹시 춥고 눈은 펄펄 날리기 시작을 하는데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이 여사네 가족인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비롯한 큰시누님과 시동생 그리고 작은 시누이와 조카 둘을 합쳐 여덟 식구는 할 수 없이 김장밭에 쌓여있는 짚가리 옆에다가 의지를 해서 짚을 쌓아 바람막이를 하고 하늘을 가리기 위해 막대를 구해서 사방으로 얼기설기 놓고는 짚을 그 위에다 쌓고 그 밤을 지났는데 이튿날 일어나니 몸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오고 눈이 펄펄 날리는 날씨는 얼마나 추운지 몰랐다.
조반도 거르고는 배를 타기 위해서 강가로 나가니 우리처럼 고생을 한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네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몇 시간인지 모르게 걸어서 닿은 곳이 경기도 마석 땅으로 그때 춘천 피란민들은 다 이곳으로 집결을 하였다.
여기에 있는 동안 집집마다 큰일을 할 때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렸는데 그만큼 마석은 피란민들로 가득하였다.
그런데 처음에 마석에 닿은 사람들은 그래도 방들을 얻어서 지날 수가 있었지만 나중에 온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집집의 깍지우리나 헛간을 빌려서 지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여사네 식구들은 그곳마저 얻지를 못하고 엄씨네가 사는 부엌을 간신히 얻어서 거기서 멍석을 깔고 잠을 잤는데 시아버지는 그 집의 깍지광에서 12월 한 달간이나 지나신 것이니 이 여사는 그것이 안쓰러웠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사실 날씨는 본격적으로 추운데다가 그 당시의 초가집들의 부엌이라는 곳이 한데나 마찬가지로 널빤지로 벽을 막을 정도였으니 거기에서 잠을 자자니 밤중이 되면 등허리가 시려워서 잠이 깨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만에 다시 춘천이 탈환되었다고 해서 춘천사람들은 하나 둘씩 집으로 들어가서 보름정도를 있다 보니 정세는 다시 악화되어 또다시 피란을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 이미 서울은 1월4일 후퇴를 하게 되어 서울은 다시 인민군에게 빼앗겼고 춘천사람들또한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때에 이 여사는 아기를 낳은 지 보름 만이었다. 눈이 쌓인 피란길은 이 여사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그래도 피란을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길을 떠나 삼마치 고개 밑에 도달하였을 때에 앞에서 총소리가 나고 하늘에서는 쌕쌕이가 기총사격을 가하니 이 여사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산골짜기 눈이 쌓인 길목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총소리가 멎은 다음에야 이 여사가 업은 아기 생각이 나는 것이어서 아기의 퍼 데기를 돌려 젖이라도 물리려고 안아보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쌔근쌔근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아기의 지저귀는 얼어있고 얼굴은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었으니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보름을 넘기면서도 젖을 빨고는 잠만 자던 아기였다.
업힌 아기가 조금만 더 컸더라도 춥고 배고 고프면 엄마 등을 걷어 내찼으련만 말 못하는 아기는 얼어들어오는 찬기를 이기지 못하고 가엽게도 눈을 감았으니 아기를 안던 엄마는 너무도 놀라서 입에다가 바람을 불어넣었으나 아기의 눈은 끝내 떠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엄마가 진작 챙겨주지 못한 죄책감과 너무도 가엾고 불쌍하다는 생각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시부모님께서도 진작 아기를 챙겨주지 못한 어른이 잘못했다 하시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시는 사이에 다시 삼마치 고개위에서 중공군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고갯마루로 올라가려던 피란민들은 다시 아래로 쫓겨 내려오게 되니 이 여사는 죽은 아이를 다시 업고는 골짜기로 쫓겨 내려오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얼마만큼 내려오다가 총소리가 멎자 시아버지께서는 죽은 아이를 내려놓으라고 하시더니 홑이불자락 한 귀퉁이를 잘라 아기를 감싸신 다음에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시면서 아기를 묻고 올 테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시더니 한식경이 되어서야 돌아 오셨다.
시아버지는 아기를 묻을만한 곳을 찾으셨지만 사방이 꽁꽁 언 땅이니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어떤 나무 밑 한군데에 흙을 파가느라 구멍을 파놓았기에 그 안으로 아기를 밀어 넣고는 흙이 없어서 눈과 낙엽을 간신히 긁어서 덮고 오셨다는 것이다.
인명재천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난리가 나게 되면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겠지만 아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내내 뇌리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삼마치 고개에서 쫓겨 내려온 가족들은 향방도 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하화계리라는 곳인데 빈집들이 많은 중에 어느 집엘 들어갔더니 마루에 제상이 놓였는데 광목이 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 전에 상을 놓은 것 같아서 들어가기가 언짢았지만 할 수없이 이집으로 들어가서 방 청소를 하고는 군불을 넣어서 방을 덥혔다.
그 당시야말로 전쟁 때다 보니 피란민들이 오다가다 밤저녁이 되면 아무 집이나 찾아들어가서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중공군들이 떼거리로 몰려들면서 쑤알라대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들은 이 여사네 가족들을 보더니 “따미 따미” 하면서 쌀을 달라고 하였지만 식구들이 굶는 판에 무슨 쌀이냐고 시아버님이 호통을 치자 그들은 그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밤낮으로 미군의 비행기가 하늘에서 감시를 하니 식량이고 보급품이 제 때에 공급될 리가 없었으니 그들이 가는데 마다 빈집에 숨겨놓은 쌀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 집에서 며칠간을 있는 동안 먹을 쌀이 떨어져서 때를 놓을 판인데 마침 피란민의 한 여자를 만나게 되어 말을 들어보니 여기서 얼마쯤을 가게 되면 중공군이 있다가 간 집의 부엌바닥에 쌀이 쏟아져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거기를 같이 가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장소로 가보니 정말 부엌의 흙바닥에 쌀이 꽤 많이 쏟아져 있는데 흙이 반이 넘었지만 그것을 긁어모아서 가지고 와서 몇 번이고 까부른 다음에 보니 쌀 너덧 되는 실히 되어서 며칠간 먹을 양식은 되었다.
이 여사는 사실 산후 조리도 하질 않은 채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다녀서 그런지 몸이 차츰 으슬으슬 추우면서 아프기 시작을 하였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그때 중공군이 다시 떼걸 이로 이 여사네 집으로 들이 닥치더니 식구들을 한군데로 몰고는 저들은 안방을 차지하였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께서는 할 수 없이 헛간에 작은 방에 부엌을 고쳐 들어가시고 시누님이며 조카들과 함께 이 여사는 한방에서 자나게 되었다.
중공군이 이 집으로 처음으로 들어오던 날 그들은 저녁에 가마솥에다가 쌀과 좁쌀을 섞어서 죽을 쑤었는데 우리네는 쌀을 깨끗이 씻어서 솥에다가 안치지만 그들은 쌀을 씻기는 커녕 그대로 물을 붓고는 휘휘 저어서 끓은 다음에는 사발이고 요강이고 간에 그릇으로 생겼으면 물에 씻지도 않은 채 죽을 퍼서 먹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비위생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한국하고는 너무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공군들은 며칠을 유하고는 이동을 하였는데 그때에 중공군의 동태를 살피던 이 여사는 깜짝 놀란 사실이 있었으니 윗방에는 환자 서너 명이 누워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 중공군에게는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는데 혹시 이들이 그들이 아닌가 하고 이 여사는 단단히 주의를 하였다.
그런데 며칠 동안은 그저 그런대로 지났는데 어느 날 부터 이 여사는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입맛을 잃게 되고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닳으면서 앓기 시작을 하는데 도무지 의욕이 없어지고 꼼짝달싹하기도 싫어지더니 몸은 점점 퉁퉁 붓기 시작을 하였다.
중공군 환자들은 어느 결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는데 이여사의 몸은 좀처럼 나아지지를 않았다.
그러자 시아버지께서는 중공군이 있던 집이고 못된 병을 옮아주고 갔다고 하시더니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야겠다고 하시고는 아침에 나가셔서 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오셨는데 지금 있는 집에서 오리쯤 떨어진 곳에 집이 하나 있어서 가보니 집의 겉은 괜찮은데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방안 가득히 말똥이 쌓여서 그것을 치우고 오시느라 늦으셨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 중공군들은 말을 타고 다니기도 하고 마차를 끌고 다니는데 날이 워낙 춥다 보니 방안에다가 말을 재웠던 모양이었다.
그 다음날 시아버님은 며느리를 업고서라도 이사를 하자고 하여 식구들은 시아버님을 따라서 말똥을 치웠다는 집으로 가서 보니 그야말로 말똥냄새가 방안가득하게 퍼져있어 비위가 상했지만 환자가 있던 집에서 나온 것만 해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었다.
그 당시에 이여사네가 먹은 반찬이라고는 굵은 소금이 고작이었으니 멀쩡한 사람도 그런 음식을 먹게 되면 병이 날판인데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데다가 끼니도 제대로 잇지를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중병을 앓으면서 일어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시아버지께서는 며느리를 업고 오시면서 네가 병으로 죽는다면 수복이 되어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사돈댁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느냐면서 어떻게 하던지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하셨다. 시아버님의 그 말씀을 단단히 마음에 새기고 시아버님께 걱정을 들이지 말아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이 여사를 살린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시아버님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살아지지를 않았다.
그렁저렁 이집에서 얼마동안을 있는 중에 이여사의 병세는 차츰 낳아지게 되었을 때에 다시 춘천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소식이 들려 식구들은 춘천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번에는 시아버지께서 감기가 드신 것처럼 추우시다면서 들어 눕게 되셨다. 그때에 이여사의 친정어머니가 오셨는데 시아버님의 증세를 보시더니 심상치 않다면서 약을 지어다가 드리라고 하여 덕두원에 있다는 한약방을 찾아서 약을 지어다가 달여 들였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다시 사농동에 소개 령이 내려서 할 수 없이 편찮으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새말( 중도) 로 가기로 하였다.
집에서 중도 새말을 가자면 몸이 아프신 환자로서는 도저히 걸음을 걸을 수가 없지만 그러면서도 가지 않을 수가 없어 집을 나서니 웬 추운 강바람은 그리도 차던가.. 식구들은 눈물을 먹음고 십리 길을 몇 시간에 걸쳐서 도착하니 시아버님은 불덩어리처럼 몸이 달아 있었고 병세는 대뜸 나빠지더니 밤낮으로 열이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을 하였다.
시아버님은 열을 참을 수가 없었던지 웃통을 벗으시고는 댓돌에 나가서 앉으시기까지 하였다. 그러면 안 된다고 억지로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니 얼굴은 열로 인해 술을 잡수신 것처럼 붉어지시는데 누우셔서는 헛소리까지 하시었다.
이 여사는 자신의 병이 시아버지께 전염이 된 것이라는 생각에서 잠을 설치며 간호를 해드렸으나 음식도 잡수시지를 않던 시아버님은 나중에는 이상한 소리까지 하셨다.
“ 운전수양반 이제는 어서 나를 데리고 가요.”
시아버님은 그 말씀을 하시더니 괴로우신 듯이 신음을 하시는데 입술이 바짝 마르신 것 같아서 꿀물이라도 타드리고 싶었지만 꿀이 있을 리 없으니 맹물을 데워서 드리자 냉수를 달라고 하신다.
몸에서 열이 펄펄 나시니 냉수를 찾으시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미지하게 물을 데워서 한 대접을 드리자 벌컥벌컥 마시시더니 다시 물을 찾으셨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바람은 쌩쌩 소리를 내면서 불고 있는데 물을 찾으시던 시아버님이 반듯이 누우신 채 눈을 몇 번 껌벅거리는 것이 하도 이상하여 개울로 빨래를 하러 가신 시어머님과 큰 시누님을 빨리 오시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자 시아버님은 그 순간 흑흑 느끼는 듯 서너 번을 하시더니 입에서 하얀 거품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와 시누님이 막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실 때였는데 그때까지 몸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갑자기 눈을 감으시자 너무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며 시아버님을 붙들고는 통곡을 하셨다.
“ 지금까지 일생을 살면서 잘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부락에서는 남의 손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살게 되고 아들이 경찰에 들어가게 되면 농사자금이라도 보태게 될 것이라면서 그렇게 좋아하던 당신이 몸이 아프다고 한지 일주일이 겨우 넘었는데 돌아가시다니 이게 웬 일이란 말이요.”
시누님도 맏딸로서 아버지께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데 벌써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면서 울었고 이 여사 또한 자신이 앓던 병을 시아버지께 옮겨드린 것 같아서 그 슬픔이 끝이 없었다.
고종황제의 교지를 받으신 김범종( 金範宗) 할아버지의 둘째로 태어나신 시아버님은 열 일곱 살에 한 살 아래인 시어머니와 결혼을 하여 4남매를 두시고 소작농을 하다 보니 가난은 늘 따라다닐 정도였지만 시어머니께서 소를 길러 팔아서 논밭전지를 사셔서 해방 전에는 일제에 공출을 하고도 먹는 쌀은 남에게 꾸러 다니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오락시설이 없었던 반면에 밤저녁이면 마을아낙네들이 모여서 길쌈을 하기도 하였지만 겨울 농한기에는 시아버님이 읽어주시는 이야기책(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홍루몽. 장끼전. 토끼전 등) 소릴 들으러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는 것인데 그만큼 시아버님은 지금으로 말하면 낭송가의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시아버지도 그러셨지만 시어머니는 원래 가평 북면의 포수 아버지를 두신 장녀로서 자랐는데 3.1운동에 아버지가 가담하셔서 일본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옥고를 치르셨다고 하였다. 그때에 일본사람들은 독립운동 만세를 부른 사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앞장선 사람들을 공회당 마당에다가 모아놓고는 한사람씩 눕혀 놓은 뒤에 장작개비를 배위에다가 올려놓은 뒤에 사람들을 그 위에 올라서게 하니 자연히 입을 벌리게 되는데 그들은 입에다가 양동이 물을 앵겨서 사람들을 기절케 하는 형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잔인하다는 것은 이미 소문이 난 바가 있지만 이런 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니 힘없는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고통을 받았던 것인가.
시어머니는 이렇게 끔찍한 장면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왜놈이라면 진저리가 난다는 말씀을늘 자녀들에게 하셨다. 비록 학교 공부를 하시지 못해서 글을 읽지는 못하셨지만 기억력 하나는 얼마나 좋으신지 집안 어르신들의 생신이며 동네사람들의 생일이며 제삿날까지 기억을 하실 정도였다.
이렇게 시부모님 두 분은 남달리 사이가 좋으셨으나 6.25 사변은 두 분의 사랑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으니 분단된 나라의 비극은 이렇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안락하던 가정들을 파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어머님은 춘천농고가 있는 안마을 큰댁엘 가셔서 큰 아주버님께 좋지 않은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하자 같은 형제이면서도 그 병이 나쁜 병이라면서 외면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시어머님은 할 수없이 마을에서 칠성판을 얻어서 이고 오셔서는 마침 이웃에 단 한집에 살고 있던 유 갑딕씨에게 시아버님의 염을 부탁하자 이 분은 타성바지이면서도 정성껏 염을 해드리고는 살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밭둑을 파고 모셔 주시었다.
이 여사는 인척들도 외면을 하는 나쁜 병임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염을 해주신 이분을 사변 후에 몇 번 찾아뵙고는 그 은혜에 대해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어찌 그 분을 잊을 수가 있으랴!
인간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다가 막상 시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자 이 여사는 그 자리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고 살아계실 때에 효성을 다 해드리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몰랐다.
시어머니께서는 시아버님을 땅에 모신 다음날
“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 하니 어서 피란을 나가도록 하자.” 하시는 바람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신데 대해서 슬퍼할 사이도 없이 새말을 떠나서 춘천사람들의 소개지인 원주까지 가게 되었다.
원주에서는 앞서 피란 때처럼 남의 집엘 가지 않아도 될 만큼 피란민들의 수용시설을 임시로 마련을 해서 거기에서 춘천으로 들어올 때까지 있을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에 가있던 남편이 수용소를 찾아와서 기쁨의 재회를 하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남편과 시동생은 망연자실하며 슬퍼하였다.
그 후 두 달 만에 춘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은 불타 없어져서 야영을 하다가 기둥만 겨우 세우고 널판자를 사방으로 엮어 당시에 유행하던 하꼬방을 짓고 살았다.
그때까지 38선 부근에서는 접전이 계속되었는데 공산군이 유엔군의 폭격에 당하지를 못하게 되자 휴전회의를 요청하게 되고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열리었다.
전선은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아군은 백마고지를 탈환하였으니 사기는 날로 충천한 가운데 전 국민이 반대하던 휴전조인이 1953년 7월 27일을 기해서 되었으니 우리의 통일 염원은 좌절이 되고 말았다.
남편은 그 후 진급하여 지서장으로 있다가 퇴임 후에는 산림조합으로 들어가 홍천군과 화천군에서 산림조합장으로 복무를 하다가 정년을 하였다.
정년 후에는 매일같이 자전거운동을 하였는데 최근 5년간에 뇌질환의 일종인 건망증의 증세가 심한 편이어서 투약을 하고 있는 중인데 점차 그 도가 심해지는 것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남편은 식사를 하루 다섯 번 정도를 할 정도로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이따금 의외의 말을 하는 것이 하나의 걱정으로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문제다.
이여사의 바램은 더는 도지지 말고 현재대로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남편이 이여사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만일 이여사가 먼저 졸한다면 그 치다꺼리를 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걱정이다.
만 열 일곱 살에 시집을 온 이 여사!
오늘도 이 여사는 남편의 건강이 예전처럼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맞고 있다.
金 斗 洙 ( 21 춘천문학벌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