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許鍊), 묵란(墨蘭), 19세기, 비단에 수묵, 22.2×107.7㎝
꽃을 보기 어려운 겨울이지만, 집안에 키우던 난은 얼마 전 어여쁜 꽃을 피웠다. 그 잎을 보자니 옛날 선조가 그린 사군자 속 일필휘지로 쳐낸 그것과 같이 청초한 듯 곧은 기세를 펼치고 있고 꽃은 마치 어여쁜 얼굴을 부끄러이 내민 여인네 같다. 왜 그 옛날 선조가 난초를 매화,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라 했는지 알 듯도 하다.
사군자 중 하나였던 만큼 난초는 사군자화의 그림 속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특히, 난은 군자의 인격수양을 지향하는 선비들에게 있어 굉장히 애용되었던 소재였다. ‘난을 그린다.’라 하지 않고 ‘난을 치다.’라는 표현을 쓴 것 또한 붓으로 난을 그리는 그 일필 자체에 군자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 수양의 성격을 반영한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사대부들이 사군자를 즐겨 그린 것은 식물 자체가 아닌 그것으로써 상징되는 인격이었다. 문인들이 사군자를 애호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행위는 인격수양과 자기 보완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김정희(金正喜),
부작란도(不作蘭圖), 19세기, 종이에 수묵, 30.6x55cm
난초그리기 20년의 세월, 제대로 그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우연히 그렸더니 오랫동안 생각했던 그런 그림이 되었네.
어쩐 일인가? 문을 닫고 가만히 관찰해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가 주장한 무심(不二禪)의 경지가 아닌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부작란도(不作蘭圖)」는 그의 회화세계의 정수인 묵란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20년 동안 불이선의 경지에서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난이 갑자기 득도하듯 눈앞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 그림은 문인화의 사의(寫意)와 문기(文氣)의 세계를 넘어 종교적 법열의 심오한 경지까지 느끼게 해준다.
■ 난(蘭)이 가진 다양한 상징성
사군자 중에서도 난(蘭)은 다른 사군자와 비교하자면 지극히 여성적인 느낌이 든다. 한자어 ‘蘭’자만 풀어보더라도, 난초는 ‘
(풀 초)’와 ‘門(문 문)’에 ‘柬(고를 간)’을 합친 것으로 ‘향초 중에서 고른 명문의 귀녀’라는 뜻이 있다. 이런 연유에서 난초는 예부터 ‘미인’을 상징하는 식물이기도 했다.
이런 ‘미인’ 외에도 난초는 실로 다양한 상징성을 내포한, 역시나 사군자답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식물이었다.
- 지조(志操)
군자의 기상과 절개와 관련하여 난초는 지조를 상징했다. 그 유래는 공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공자가 “지초와 난초는 깊은 숲에서 자라지만 사람이 없어도 꽃을 피우며, 군자는 덕을 닦고 도를 세우는 데 있어서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인적 없는 심산궁곡에서 피어난 난의 자태와 그 향기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자신의 도리를 실천궁행하는 군자의 참모습을 본 것이다. 또한, 초나라의 우국시인 굴원(屈原)이 너른 들에 난을 심어 놓고 우국충정의 마음을 달랬다는 일화는 이후 많은 문인들에게 난의 군자적 상징성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一
芳芬本在山 언덕의 고운 꽃은 산속에 있어
淸香無路出塵間 맑은 향기 속된 세상에 보낼 길 없네
他時應作幽人佩 이다음 숨어사는 이의 패물이 되리니
莫遺樵童許採還 나무군 아이들은 캐어가지 말라.
- 박지번(朴枝藩, 1426-1498)「영란(泳蘭)」-
박지번(朴枝藩, 1426-1498)은 난초를 본질적으로 탈속한 존재로 삼으며 세속을 멀리하고 고아하게 숨어 사는 은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윽한 난초는 이미 시들었으니
저무는 해에 누구와 벗을 하랴.
- 김극기(金克己, 1379-1463)「유감」 -
여기서 고려 때 시인 김극기(金克己, 1379-1463)는 그윽하게 자란 난초를 속된 세상에서 떠나 사는 지조 높은 선비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 우의(友誼)
우의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은 여러 대상을 통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난초는 이러한 우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식물이었다. 이러한 난초의 이미지는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二人同心 基利斷金 同心之言 基臭如蘭)”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이로부터 ‘금란(金蘭)’은 친구들 사이의 깊은 우정을 일컫는 대표적인 칭호로 상용되었다.
또한,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與善人交, 女人芝蘭之室, 久不聞基香, 則與之化矣”
“착한 사람과 사귀는 것은 마치 난초와 지초를 가꾸고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해도 그것과 동화된다.”
이로부터 난은 좋은 벗과의 사귐을 상징하는 식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의 문인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친우들의 우의를 일러 ‘금란지교(金蘭之交)’, 혹은 ‘지란지교(芝蘭之交)’라 하였다. 세종대 명유로 이름이 높았던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친우들과 모임의 이름을 금란계로 명명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종대의 사림의 종장이었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친우들과 금란계를 맺고, 쓴 다음 글도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천하를 막론하고 의기로써 구하는 것인데
더구나 같은 고향에서 친구 삼기 쉬움에랴.
봄의 꽃 가을 달 아래선 서로 불러 술 마시고
남쪽 둑 서쪽 언덕에선 함께 낚시하며 논다.
십년 동안의 영욕을 서로 자부하지 말고
백대의 세월 속에 끝까지 잘 사귀어야지.
진정 금란의 약속을 다시 맺었네.
이익을 위한 관계는 사람들에게 원수만 짓게 한다네.
『주역(周易)』의 내용에서 비롯된 우정의 상징으로서 난에 대한 인식은 묵란화와 같은 그림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조선말기 최고의 묵란화가였던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자신이 그린 묵란화에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同心之言, 基臭如蘭).”라는 제시를 새겨 넣었다.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묵란(墨蘭), 지본수묵 37.8x27.3cm
또한, 이하응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자신이 그린 「석란도(石蘭圖)」에 다음과 같은 제발문을 적어 난을 우의의 상징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蘭兮, 蘭兮, 基操也雅, 基香也澹,
故君子居常, 不可無此交友之道,
以蘭爲盟, 以石爲交, 基不美哉.
난이여! 난이여! 그 지조는 아취 있고, 그 향기는 맑구나.
이에 군자가 늘상 더불어 살았으며, 이것 없이는 교우의 도가 불가하다.
난으로 맹세하고 돌로 사귀니, 그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 미인(美人)
임희지(林熙之, 1765년-?),
묵란(墨蘭), 지본수묵, 62.5x38.5cm
예로부터 ‘유인풍치정여란(幽人風致貞如蘭)’, ‘난화사미인(蘭花似美人)’, ‘유란여정녀(幽蘭如貞女)’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난은 유인(幽人), 미인, 정녀(貞女) 등으로 비유되어 왕비의 궁전을 난전, 미인의 침실을 난방이라고 하였으며 “난초 꽃은 미인을 닮았다.”라는 말이나 “그윽한 난초는 정녀와 같다.”라는 말을 통해 난초는 우아한 미녀, 귀녀를 상징하였다.
난은 독특한 향기를 취하여 유곡가인(幽谷佳人), 미인향(美人香), 군자향(君子香), 공곡유향(空谷幽香), 군자가패, 왕자지향(王子之香)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는데, 난유유자풍운(蘭有儒者風韻), 난령인수계라 하면서 난의 고아함을 칭송하였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공자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절개와 충성심의 상징으로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으로부터 비롯되었다.
余旣滋蘭之九兮 나는 이미 난을 구완에 기르고
又樹蕙之百畝 백무(百畝)의 혜초도 심었노라 (중략)
冀枝葉之峻茂兮 가지와 잎이 무성하기를 바라
願時乎吾將刈 때를 기다려 나는 베려 했더니
雖萎絶其亦何傷兮 시든들 그 무엇이 슬프랴만
哀象芳之蕪穢 꽃향기 잡초에 더럽혀져 슬퍼라
굴원은 그의 시 『초사(楚辭)』에서 난초를 현인(賢人)이나 군자에 비유하여 이때부터 난초는 절개와 충성심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문학작품에서 난초는 뛰어난 향기, 깨끗함, 청초함으로부터 미녀를 상징하며 많은 이들에 의해 애용되었다.
彈入宣尼操 공자(孔子)는 거문고로 난의 곡조를 타고
爲大夫佩 대부는 난초 수(繡) 놓인 띠를 차고 있네
十薰當一蘭 난초 하나가 열 가지 향기와 맞먹으니
所以復見愛 그래서 다시 보고 사랑하리라
-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오설란(傲雪蘭」,
『성근보집(成謹甫集』-
난초로세 난초로세.
큰 애기 얼골이 난초로세.
- 민요「배꽃타령」-
난초같은 고운머리
금박댕기 너울너울
외씨같은 두발길로
반공중에 노닌다.
- 민요「단오날」-
- 청초(淸楚), 고고(孤高)
김응원(金應元), 석란(石蘭), 근대한국화, 비단에 수묵, 10곡병(十曲屛) 209.0×418.0㎝
난초는 깨끗하고 청초함과 고고함을 표상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하여 은군자(隱君子)로 상용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식(李湜)이 지은 다음의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如傀人間被俗廛 인간 세속에 물드는 걸 부끄럽게 여겨
巖生岩谷淵之濱 바위 골짜기 물가에서 살고 있네
雖無今色如嬌女 비록 교태롭게 아양떠는 재주는 없지만
自有幽香似德人 스스로 그윽한 향기 지녀 덕인을 닮았도다
- 이식(李湜, 1584-1647),「난(蘭)」,
『사우정집(四友亭集)』-
난초는 속세의 티끌에 접촉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깊은 산중 바위로 이루어진 골짜기의 물가에 홀로 피어난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아양을 떨거나 요염한 모습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요기(妖氣)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고고한 자태로 은은한 향기를 뿜어 지조 높은 덕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윽한 난초가 이미 시들었으니
저무는 해에 누구와 벗을 하랴
- 김극기(金克己) 「유감(有感)」, 『동문선』-
고려시대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유감(有感)」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난초는 예로부터 은자의 지극한 벗이었다. 시에서는 이러한 난초가 사라져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읊고 있다. 이 시에서 김극기는 그윽하게 자란 난초를 속된 세상에서 떠나 사는 지조 높은 선비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제일향(第一香)
“난은 꽃이 적고 향기가 많으니 ‘향문십리(香聞十里)’라고 함이 반드시 턱없는 한문식의 과장만이 아니다. 난화(蘭花)를 향조(香祖)라 또는 제일향(第一香)이라 이름 함이 어찌 이유가 없음이랴”
문일평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서 앞서와 같이 말했다. 난초는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귀한 자태로 향기를 내뿜는다. 난초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그 향기와 고귀함이다.
난초의 향기와 고귀함에 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시대로부터 기록이 나타난다.
이와 함께, 이병기는 「풍란(風蘭)」이란 글에서 “난초의 푸른 잎을 보고 방열()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선인들은 난초의 향기를 국향(國香)제일향(第一香)왕자향(王子香)유향(幽香)향조(香祖) 등으로 표현하였다. 퇴계 이황도 「도산육곡(陶山六曲)」에서 “유란이 재곡하니 자연히 듣기 좋아라.”라고 읊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인인 이제현()은 『역옹패설()』에서 난초의 향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찍이 여항(餘項)이란 땅에 가서 있을 때 난초 한 분을 선물로 주는 이가 있었다. 그것을 서안 위에 받아 놓았는데,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고 더불어 한참 담화할 때에는 난화의 향기가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밤이 깊어 오래도록 앉아 있으려니 달은 창에 비쳐 드는데, 난화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맑고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마음으로 사랑할 뿐이요,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성삼문(成三問)은 다음 시에서 난초의 뛰어난 향기를 찬양하며 그 향기의 가치를 다른 열 가지 종류의 꽃향기에 상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彈入宣尼操 공자(孔子)는 거문고로 난의 곡조를 타고
爲大夫佩 대부는 난초 수(繡) 놓인 띠를 차고 있네
十薰當一蘭 난초 하나가 열 가지 향기와 맞먹으니
所以復見愛 그래서 다시 보고 사랑하리라
- 성삼문, 「오설란(傲雪蘭)」,
『성근보집(成謹甫集)』 -
다음 시에서도 난초향의 그윽함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한 줄기에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난 난초에서 은은한 향기가 바람처럼 퍼져 나가니 십 리 안의 모든 초목이 감히 그 향기에 상대하지 못하고 감복하여 무안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옥분(玉盆)에 심은 난초 일간(一幹) 일화(一花) 긔이
다
향풍(香風) 건 듯 이는 곳에 십리초목(十里草木) 무안색(無顔色)을
두어라 동심지인(同心之仁)이니
백년(采采百年)
리라
-이수강-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한 물줄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얗고도 여린 자연(紫煙) 빛이라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香)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이은상 「풍란(風蘭)」-
이은상은 시를 통해 난초가 꽃 중에서 가장 뛰어난 향기를 지녔다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난초는 그 향기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식물이다. 중국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도 그의 시에서 난향(蘭香)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爲草當作蘭 풀이 되려거든 난초가 되고
爲木當作松 나무가 되려거든 솔이 되려므나
蘭幽香風遠 난초는 그윽하여 향풍이 멀리 가고
松寒不改容 솔은 추워도 그 모습을 아니 바꾸나니
- 이백(李白, 701-762)
「오송산(五松山)에서 남릉(南陵)의 상찬부(常贊附)에 바치다」-
이 외에도 난초의 향을 읊은 시는 많이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허난설헌(許蘭雪軒)은 그 이름부터 눈 속에 핀 난초 꽃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s
盈盈窓下蘭 하늘거리는 창 아래 난초
枝葉何芬芬 가지와 잎이 그리도 향기롭더니
西風一披拂 하늬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零落悲秋霜 슬프게도 가을 서리에 다 시들었네
秀色從凋悴 빼어난 고운 모습 기울어져도
淸香終不斃 맑은 향기는 끝내 사라지지 않으니
感物像我心 그 모습 보며 내 마음 아파
涕淚沾衣袂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네
- 허난설헌(許蘭雪軒) 감우(感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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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초(蘭草), 허난설헌(許蘭雪軒)
그림에 화제(畵題)로 쓰인 시
誰識幽蘭淸又香
年年歲歲自芬芳
莫言比蓮無人氣
一吐花心萬草王
그 누가 알리요, 그윽한 난초의 푸르름과 향기
세월이 흘러도 은은한 향기 변치 않는다네. 세상 사람들 연꽃을 더 좋아한다 말하지 마오.꽃술 한번 터뜨리면 온갖 풀의 으뜸이오니 |
이 밖에도 난초는 “난초 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라는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 『본초경(本草經)』에는 난초를 기르면 집안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고 잎을 달여 먹으면 해독이 되며 오래도록 마시면 몸이 가벼워지고 노화현상이 없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난초 그림을 집 안에 걸어 두고 ‘벽사’의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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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란(墨蘭)
- 민영익(閔泳翊)
- 근대한국화
- 종이에 수묵
- 132.0×58.0㎝ |
이렇듯 다양한 의미와 함께 그윽한 향을 풍기며 아름답고 고고한 자태를 지닌 난(蘭)은 분명히 선조가 사랑할 수밖에 없던 식물이었으리라. 난초는 그 자태도 자태이거니와 그림자마저도 고귀하다. 그 모습으로도 아름답지만 문갑 위에 올려 있는 난분의 자태가 어둔 달빛에 모습을 비추기라도 하면 운치가 그만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