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무리 지옥을 닮아가도
땅에 하늘의 마음이 자리한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의 영혼이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을 찾아다니며
하늘의 등불을 켠다.
8월 15일은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남양성모성지에서는 전날인 14일에 성모승천 대축일 전야제 행사를 갖는다. 올해에는 콜베신부님을 소재로 한 낭송 연극을 준비해 묵주기도와 성체조배를 하는등 신자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올해 아직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함께 할는 낭송 연극과 묵주기도 그리고 성체조배를 통해 성모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는 기쁜시간이었다.
◆ 성모승천대축일
성모 마리아가 지상에서의 생활을 마친 후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로 올라갔음을 기념하는 축일로 마리아께 바쳐진 초대 교회시대의 교회 하나가 예루살렘에서 헌당식(獻堂式)을 행한(5세기) 날에 지켜졌다. 성모 승천은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를 믿어 왔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이를 믿는 교리로 반포하였다. "원죄가 없으시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현세생활을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는 것을 믿을 교리로 밝히고 이를 선언하는 바이다"(비오 12세의 사도헌장, Munificentissimus Deus). 성모 승천은 비록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부터 내려오는 믿을 만한 전승(傳承)과 구세사(救世史)에 있어서 성모의 역할, 성모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교회 안에서의 성모의 위치 등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적 결론이다. 즉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은 성자를 잉태하여 생명의 창조주를 낳으신 마리아의 육체에 무덤의 부패를 면하게 하신 것이다. 승천에 대한 최초의 전례적 축일의 날짜와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3-4세기부터 순교자나 성인들을 그들의 사망일에 기념하는 사상에 부응하여 4세기 중엽의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이 성모의 죽음과 승천의 축일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6세기경에는 그 명칭이 'Dormitio'(도르미시오, 일시적인 잠에 떨어짐)로 불렀으며 마우리치우스(Mauricius) 황제(재위 : 582-602)에 의해 8월 15일로 정해진 듯하다. 7세기에 동방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져 서방으로 전해졌으며 8세기에 8월 15일로 날짜가 확정되고 명칭도 'Dormitio'에서 '마리아의 승천'으로 변화되었다. 이후 이 날은 마리아 축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에서 이날은 의무축일로 지켜지고 있다.
◆ 콜베(Kolbe, Maximilian Maria)
Kolbe, Maximilian Maria(1894∼1941). 성인. 폴란드의 사제. 폴란드 우지 부근의 마을 즌스카볼라에서 태어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1910년 라브프 소신학교 졸업, 루보프에 있는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에 입회, 1913년 로마의 그레고리오대학 입학, 1914년 종신서원, 1915년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 취득, 191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19년 신학박사 학위도 취득한 후 귀국하여 크라쿠프(Krakow)에서 교수생활, 1922년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하였다. 1930년 4월 일본 전교를 위해 나가사끼(長崎)에 도착, 1개월 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일본어판을 창간하고 그 편집 발행에 종사, 1931년 일본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건설하였다.
1936년 폴란드로 귀국,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수도원장직에 있으면서 출판사업을 지휘, 1939년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발행부수가 100만부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그와 수도원 수사들이 나치 게시타포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억류당했다가 12월에 석방되었다. 1941년 2월 다시 나치 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교도소에 투옥, 5월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체포 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가 갇힌 감방에서 한 포로가 탈주하였다. 수용소 규칙에 따라 그 감방의 포로 10명이 아사형(餓死刑)을 당하게 되어, 지명된 사람들 중에는 처자식을 가진 프란시스코 가조니체 중사(中士)가 끼여 있었다. 콜베 신부는 수용소장에게 그 중사를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다고 청을 하여, 아사감방에서 15일간 굶주린 후 독약주사를 맞고 8월 14일에 임종하였다.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콜베 신부의 뜻을 받드는 이탈리아의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1958년 한국에 진출, 대구, 부산, 서울 등지에 수도원과 성당을 세우고 사목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부산 대연동에 보육원, 경남 동래군 일광면에 음성나환자 수용소를 설치, 경영하고 있다.
첫댓글 성모님과함께⚘
평온해 보입니다
다음 전야제엔 성모님과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