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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6일 토요일 [(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의 자녀들은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홍해에 마른땅이 나타나자 그들은 어린양들처럼 뛰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8,14-16; 19,6-9 14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15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16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땅 위에 서니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19,6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7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8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9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행하신 업적을 노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줄곧 졸라대며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은 채 미적거리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 제자들에게 낙담하지 말고 계속 간청하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부가 청한 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판결이란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뜻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한 자, 곧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지만, 과부는 그에게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올바른 판단,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이 내리는 판결을 내려 줍니다.여기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늘 올바른 것을 간청하였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나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한 것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될 것이라 여기지만 결국 나와 공동체에게 해가 될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나는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더 집요하고 고집스러웠습니다. 결국 과부가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끈질김이었습니다. 결국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승리에 찬 종말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이 중간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박해와 고통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이 너무 더디오는 것 같고, 주님은 너무 멀리 계시는 듯한 느낌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이 상당합니다. 이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기도할 때, 대충, 적당히 기도할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집요하게, 목숨걸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사제와 70여명으로 구성된 최고의회격인 산헤드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나 시골에서는 대체로 회당을 지키는 율법 교사가 재판관 역할까지 도맡았습니다. 유산이나 금전 관련 소송이 발생했을 때, 공인 재판관들은 재판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은 무관심하고 심술까지 궂어, 과부의 재판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재판만 열리게 되면 이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과제였습니다. 과부는 뇌물을 제공할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몇번을 거절 당한다 할지라고, 가고 또 가고, 청하고 또 청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투견장에 들어간 큰 불독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집요한 압박에 재판관은 점점 그녀 존재 자체가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징징거리며 졸라대니, 스트레스가 점점 치솟았습니다. 과부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재판관은 마침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 앞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 손 두 팔 다 들고 도움을 주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간청할 때 절대로 나몰라라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때로 우리를 좀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때로 우리의 조바심을 유발시키실지언정, 절대로 우리의 청을 거부하지 않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청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꺽인 영을 안고 밤낮으로 청하고 또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기도 지향들을 읽어보며, 어이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좀 더 큰 기도, 더 하느님 뜻에 맞갖은 기도, 더 영적인 기도로 성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빨리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통과 십자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죄송하지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 믿음의 기도가 된다.
어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최 루카 형제님이 스테파니아 반장님께 카톡으로 보낸 글들을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분이 병자성사를 받으시며 느낀 ‘기도에 대한 체험’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병자성사 시작 직전에 문득 제가 저지른 잘못이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였고, 늘 그렇게 되새기며 지냈습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갔을 때, 또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이 왔을 때 ‘주님, 저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고, 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몸뚱이도 당연히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일 뿐이요, 저는 살아가는 동안 그저 주님의 것을 선량하게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잠을 못자거나, 참기 어려운 통증이 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손해(?)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에 다 맡기니 알아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며 투정(일종의 항의??) 섞인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심자이니 감안해 주실 것이고, 저의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는 분이시니, 무슨 기도를 못하겠냐는 마음으로 고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저를 재워주셨고, 통증을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저의 잘못에 대한 가슴 깊은 회개가 있었을 때에만 그러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병자성사 전, 갑자기 제가 주님께 봉헌한 저의 육신을 그리고 영과 혼을, 그동안 너무나 소홀히 다루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금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소홀히 하였고, 특히 기도와 성경읽기를 최근 들어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는 참회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또 다시 제 기도에 바로 응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제 왼쪽 복부에 기분 나쁜 통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성사 중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루카 형제님은 세례 받으신 지 얼마 안 된 분이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무언가를 청할 때 그분이 당연히 그런 은총을 주셔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이미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감사하지 못한 자신을 먼저 회개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에 더 청하기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청하니 주님은 이런 경우엔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제가 강론을 공유하게 된 것도 유학 때에 저에게 강론을 원했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는 특강 같은 것이나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몇 번 저를 만나신 분들이 귀찮더라도 메일로 강론을 보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당신은 사제이니까 당연히 목마른 양들에게 양식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면 묵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제가 공부하러 나온 입장에서 매일 묵상을 써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청하면서도 매우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사제로서 당연히 강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긴 했지만 기꺼이 매일 강론을 올려드렸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강론을 매일 쓰는 것은 마치 피를 말리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의 값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흘리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우리는 그 피를 청할 때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청할 때 은총을 충만히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가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과부처럼 지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 과부와 같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며 가슴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연히 주셔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기도는 그 성령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 성령을 주실 때 죽을 듯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도 그 가치를 알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로 받는 은총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은총이 조금이라도 끊기면 살 수가 없기에 청할 수밖에 없을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의 필요함이 절실할 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죄송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도가 은총을 얻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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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제르트루다(대)(Gertrude the Great)
활동년도 :1256-1302년
신분 :수녀,신비가,저술가
지역 :헬프타(Helfta)
같은 이름 :거트루드,게르투르다, 게르투르데스,게르투르디스, 게르트루다,제르뜨루다, 제르뜨루디스,제르트루디스, 젤뚜르다,젤뜨루다,젤투르다, 젤트루다,제르투르다
이 성녀는 흔히 "대" 제르뚜루다라 불린다.
다섯 살 때에 그녀는 삭소니의 헬프타 수녀원에 맡겨졌고, 그곳에서 자랐으며, 이 수녀원을 떠난 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여기서 그녀는 성녀 멕틸다의 제자이자 절친한 벗이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특별한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공동체 안에서 무슨 직책은 맡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를 거의 관상생활로 보냈는데, 25세 때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
그 때부터 제르뜨루다는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에만 관심을 쏟았으며,교부들의 저서와 전례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또 그녀의 생활은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으며,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둔 것이 소위 "제르두르다와 멕틸다의 묵시"라 부르는 전집이다.
이 책은 중세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예수 성심께 대한 제르뚜르다의 놀라운 신심 때문에 후대에 와서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헬프타에서 운명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글레멘스 12세는 전교회가 그녀의 축일을 지내도록 지시하였고, 서인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13세기의 위대한 신비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성녀 맥틸다(Mechtild)와 더불어 그녀는 혼인의 신비라 부르는 깊은 영성을 살았다.
즉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녀의 영성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심에 깊은 인격적 일치를 이루며 자신을 삼위일체의 생명 그 자체 안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신심이 결코 아니었다.
제르트루다는 전례의 리듬에 따라 살았으며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전례와 성서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심을 표현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주제와 표상을 발견했다.
그녀의 개인 기도와 전례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
제르트루다의 생애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기도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지이다.
개인적 기도와 전례적 기도,일상적인 기도이든 신비적인 기도이든 언제나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기도가 그리스도인 생활이다.
"주님, 당신은 하느님과 같으신 당신의 마음, 당신 천주성의 은밀한 보화를 내 모든 행복의 원천이 되도록 너무나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에게 주시며 당신의 은밀한 우정에로 나를 받아들이셨나이다.
때로는 당신의 마음을 자유로이 나누어 주시고 때로는 우리 서로 간의 특별한 당신의 마음을 자유로이 나누어 주시고 때로는 우리 서로간의 특별한 상호 우정 표시로 주셨나이다.
당신은 너무나도 자주 당신의 사랑어린 애무로써 내 영혼을 녹여 주셨기에, 내가 만일 당신의 넘쳐 흐르는 은혜를 몰랐다면 나는 너무 놀라서 당신의 복되신 모친도 그렇게 놀라운 애정과 사랑의 표시를 받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성녀 제르투르다 생애와 계시, 2편 23장)
성녀 멕틸다 (Mechtildis)
활동년도: +1298년
신분: 수녀,신비가
지역: 헬프타(Helfta)
같은 이름: 마띨다,마띨디스, 마틸다,마틸디스,맥띨다,맥틸다, 메히틸다,메히틸디스,멕띨다
성녀 멕틸다는 로쓰도르프의 수녀가 되었고, 처음에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1258년, 수녀들이 삭소니아의 헬프타로 옮겨가서 3년이 지난 후에 성녀 제르뚜르다(대)가 수녀원 교육을 받으러 들어왔는데, 이때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성녀 제르뚜루다를 장성할 때까지 돌봐주었고, 뛰어난 신비가로 키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의 나이팅겔"이 되어 그녀와 같은 신비적인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제자인 제르뜨루다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써내려갈 때, 처음에는 이것을 경고하였으나, 주님께서 멕틸다의 마음에도 감도하셨기에 위대한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멕틸다 자신도 영적인 체험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성녀 멕틸다의 계시록" 혹은 "특별한 은혜에 관한 책"으로 불리운다.
성녀 멕틸다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바 없으나,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신분: 왕비
활동지역: 스코틀랜드(Scotland)
활동연도: 1046-1093년
같은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에드워드 두트레메르 왕자와 독일 공주 아가타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노의 조카이다.
그녀는 헝가리에서 태어났고, 스테파노 왕의 궁중에서 자랐으며, 하스팅 전투를 피하여 스코틀랜드로 갔다.
그녀는 여기서 말콜이란 사람과 결혼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되었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고, 던펨라인에 성삼위 성당을 세우는 등 교회 안팎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녀이다.
스코틀랜드의 마르가리타는그녀가 자신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해방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자유를 의미했다.
마르가리타는 본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헝가리 출신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정복자 윌리암으로부터 도망가다가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파선당했다.
말콤 왕은 그들을 친절하게 대했으며 아름답고 우아한 마르가리타에게 사로잡혔다. 그들은 1070년 던펌린(Dunfe rmline)성에서 결혼했다.
말콤 왕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마치 그의 나라처럼 거칠고 무례했다.
마르가리타에 대한 말콤의 사람이 극진하여 그녀는 그의 성격을 부드럽게 하고 그의 생활을 바르게 하며 그가 덕을 갖춘 왕이 되도록 도왔다.
그는 모든 집안 일을 그녀에게 맡기고 때로는 국사 문제에까지 그녀의 조언을 구했다.
마르가리타는 예술과 교육을 장려하여 그 나라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종교 개혁을 위해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도록 촉구하고 사제들과 신자들 가운데 있는 공통된 종교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토론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것은 독성 또는 불순한 결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여러 개의 교회도 세웠다.
마르가리타는 왕비인 동시에 어머니였다. 그녀와 말콤 사이에는 여섯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이들의 종교 교육은 물론 다른 공부까지도 직접 지도 감독했다.
그녀는 집안 일과 나라 일로 대단히 바빴지만 세상사와는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녀의 사생활은 엄격했다.
그녀는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신심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검소한 식사와 짧은 수면을 취했다.
그녀와 말콤은 두 번의 재계를 했는데 한 번은 부활 전에 한 번은 성탄 전에 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들은 언제나 한밤중에 일어나서 미사에 참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가난한 사람 여섯 명의 발을 씻어 주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녀는 공공 장소에서도 언제나 거지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들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홉 명의 고아와 24명의 어른을 먼저 먹이지 않고는 절대로 식탁에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1093년에 윌리암 푸퍼스 왕이 알위크 성을 불시에 공격하였을 때 말콤왕과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살해되었다.
이미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던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살해된 지 4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애덕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깨꿋한 길’과 ’지저분한 길’이다.
’깨끗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에 돈이나 옷등을 희사하는 것이다.
’지저분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봉사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손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두드러진 덕행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마르가리타는 물질적 선물을 줄 때도 매우 너그러웠지만 병자들을 방문하여 자기 손으로 그들을 직접 간호해 주기도 했다.
그녀와 그의 남편은 대림절과 사순절에 무릎을 꿇고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지저분한 애덕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이야기에는 지헤의 소금으로 간이 배어 있다. 그녀가 침묵할 때에는 그녀의 침묵이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의 훌륭한 행동은 그녀의 착실한 성격과 너무나도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덕을 갖춘 생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터고트, 마르가리타의 고해 신부)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