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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6강
하나님 나라의 비밀
말씀 / 마가복음 4:1-34
요절 / 마가복음 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오늘은 약간 덥기까지 합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들녘에선 파릇파릇 싹이 돋고, 농부는 땀 흘려 땅을 가꾸고 씨를 뿌립니다. 이제 곧 모내기 철도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이런 농사에 비유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또 우리 인생의 신앙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큰 무리가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떠 있는 한 배에 올라 앉으십니다. 주위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멀리서는 땀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이 보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가르치기 전에 “들으라” 말씀하심으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말씀을 다 마치실 때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라는 얘깁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농부가 밭에 나가 씨를 뿌렸습니다. 씨는 네 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몇몇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부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는 곧 싹을 냈지만, 돌 때문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시들시들 마르고 결국 타져 죽었습니다. 일부는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씨는 싹을 내고 잘 자라는 것 같았지만, 막상 가시떨기가 몸을 감고 힘을 못쓰게 하자, 누렇게 낯빛이 뜨고 비실비실거리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세 종류의 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들은 싹을 내고 쑥쑥 자라 결국에는 30배, 60배, 100배나 되는 풍성한 결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혼자 계실 때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열두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 이 비유의 의미를 묻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여러분! 비밀이 무엇입니까? ‘비밀’은 감추어진 것입니다. 숨겨진 기밀 정보입니다. 감춰진 채로 있으면 알기 어렵지만, 일단 공개되면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통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려 주시는 정의와 평강과 기쁨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통해 ‘외인’과 ‘내인’을 구별합니다. 여기 ‘외인’은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자들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는 무관심하고 기적에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리송합니다. 또 여기 ‘너희’는 예수님이 혼자 계실 때 비유의 의미를 알고자 영적 소원을 가지고 찾아온 제자들과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나아온 자들, 말씀의 의미를 알려고 영적 소원을 가지고 나아온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예수님이 알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은혜를 삶 속에서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과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의 뜻을 해석해 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가 떨어진 곳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앗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씨앗이 심겨져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어떤 마음에 떨어지는가가 중요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첫째, 길가와 같은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듣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 강합니다. 말씀에 비판적입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을 가지고 나름의 결론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그 사람 속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봉하는 것 중에 ‘무신론’ 또 ‘상대주의적 가치관’으로 ‘절대 진리는 없다는 말이 유일한 절대 진리’라는 말을 믿고 따릅니다. 이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신자들도 영적 생활 없이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금새 마음이 딱딱해집니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이자, 유명한 설교가였던 헬무트 틸리케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날마다 많은 차량이 통행하는 도로와 같고, 사람들이 시간마다 바삐 지나가고 쉴 사이가 없는 분주한 거리와 같다면 그는 영원한 씨앗이 자랄 수 있는 땅을 마련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 가는 약탈자입니다. 사탄은 이런 사람들을 금방 알아보고는, 말씀을 그 마음에서 쏙 빼앗아 가버립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둘째, 흙이 얕은 돌밭과 같은 마음 밭에 심겨졌습니다. 돌밭은 씨가 뿌려지면 처음에는 싹이 납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려야 할 때 돌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뿌리가 짧습니다. 바람이 불면 쉽게 넘어져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완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말씀도 잘 듣고 은혜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시련의 때에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바로 뿌리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세상적인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절대 회개하지 않고자 하는 남모르는 죄가 숨겨져 있습니다. 또 지극히 편한 신앙만을 추구합니다. 이와 같은 돌멩이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더 이상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얕으니 시련의 바람이 불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욕망이 깨어질 때 신앙을 저버립니다. 자기의 죄가 드러나게 될 때 인간적인 자존심을 지키려고 신앙을 저버립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꿈과 이상의 돌멩이를 깨고 드러내면 죽는 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이런 돌멩이들을 깨고 드러내 말씀이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때에 말씀이 나를 지탱해주고 말씀이 내 인생을 인도해줄 것입니다. 말씀이 깊이 뿌리내리도록 한다는 것은 말씀에 기초해 내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어가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셋째,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에 심겨졌습니다. 가시떨기 밭은 말씀이 어느 정도 뿌리내려 잘 자라는 밭입니다. 그런데 곧 한계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가시도 함께 자라 성장 기운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가시에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는 전공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취업에 대한 염려, 먹고 살아갈 염려, 결혼이나 노후에 대한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등 다양한 염려가 있습니다.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없는 염려도 만들어 합니다. 염려가 시작되면 여기에 온 생각이 집중되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 재물의 유혹은 결국 돈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현실 생활에서 돈은 전능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돈을 많이 소유할수록 더 행복하고 안전할 것이란 생각을 들게 합니다. 하지만 미래의 안전과 행복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로 인해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가시떨기는 기타 욕심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술취함과 음란 정욕을 비롯해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종류의 세상 쾌락의 가시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에 몰두한 나머지 말씀으로 향해야 할 삶의 에너지를 세상 쾌락이 다 빨아들이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우선순위가 잘못되면, 튼실한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공부와 예배를 통해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동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교회 문을 나가는 순간 이런저런 세상 염려와 유혹의 가시밭이 펼쳐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마음에 틈타는 가시들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세상 염려와 유혹들의 가시뽑는 작업을 통해 말씀의 씨앗이 삶의 온전한 열매로 맺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넷째, 좋은 마음 밭에 심겨졌습니다. 여기 ‘말씀을 받는다’라는 말은 ‘말씀을 승인하다’, ‘말씀을 인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전의 생각이나 행동이 틀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실하며 진리임을 인정하고 내 삶의 가치관들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타고날 때부터 좋은 마음 밭은 없습니다. 어느 때는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어 받은 말씀을 사탄에게 빼앗겨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듣고 기뻐하다가도 예상치 않은 힘든 역경이 생기면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세상 염려와 유혹, 욕심들로 인해 마음이 찢어져 분산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말씀을 빼앗아 가려는 사탄의 존재를 인식하고 받은 말씀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생각과 삶 깊은 곳까지 뿌리내리도록, 늘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세상 염려와 유혹과 욕심들이 들어올 때도 이를 차단하고 영적인 힘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람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결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지켜 행하므로, 신앙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들은 말씀을 마음 밭에 간직하고 있습니까?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고 있습니까? 이런 여러분의 삶에 신앙의 풍성한 열매들이 맺게 될 줄 믿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방안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감추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도 감추어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24a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여기 ‘스스로 삼가라’는 것은 말씀을 듣고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소가 여물을 먹은 후,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는 위가 4개입니다. 여물을 씹어 삼키면 그것은 1번 위로 넘어갔다가, 어느 정도 소화되면 2번 위로 넘어갑니다. 2번 위에서 어느 정도 소화되면, 그것을 입으로 가져와 다시 씹어 1번 위로 보내고 2번, 3번, 4번 위를 거쳐 소화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물은 완전히 분해되고 흡수되어 소의 영양분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도 알아야겠지만, 그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하셨는지, 무슨 의도로 하셨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할까 등 다양한 측면에서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데는 우리 모임의 QT책자인 ‘일용할 양식’만큼 좋은 훈련도 없습니다. 하루를 그냥 시작하는 사람과, 일용할 양식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글로 써보고 그 말씀에 기초해 기도하는 사람은 처음엔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늘과 땅의 영적 수준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인터넷 동영상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좋아하지만, 막상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에는 옛날에 비해 그다지 즐겨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상고한다는 것이 별로 인기와 관심이 없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비유의 핵심은 씨앗이 가진 신비한 생명력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농부가 모르는 사이에 농작물이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자고 깨고 하는 부지중에 자라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자람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농사일에 개입합니다. 물도 대주고, 잡초도 뽑고, 비료도 주고, 농약도 쳐서 해충들을 제거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과 수고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 때문에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의 질은 높아졌지만, 복음의 수용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캠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여 한 영혼을 제자양성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말씀의 씨앗을 뿌릴 때,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에 하나님 나라는 자라나고 있고, 때가 되면 뭇 영혼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주께 나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말씀의 씨앗을 심을 때, 제자 양성의 결실을 풍성하게 맺게 될 줄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당장 이루어지기보다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씨가 뿌려지면 싹이 나고, 그 후에 이삭이 되고, 또 시간이 지나면 열매가 맺힙니다. 농부는 씨를 뿌려 놓고 과연 싹이 날까 염려하여 땅을 헤집어 보지 않습니다.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줄기를 뽑아 늘여보지도 않습니다. 농부는 그저 안심하고 밤낮 자고 깨고 합니다. 낮에는 잡초를 뽑고 거름도 주지만, 밤에는 안심하고 잠을 잡니다. 물론 병충해나 가뭄이나 태풍 때문에 소출을 내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에 또 뿌립니다. 우리도 섬기고 있는 양이 빨리빨리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고 조급할 수 있습니다. 진주 캠퍼스에 빨리빨리 제자들이 서지 않는다고 조바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기를 키울 때 조급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아기가 더디게 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엄마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우리 아기가 벌써 뒤집기를 해요. 벌써 엄마라고 말해요. 벌써 아장아장 걸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 내면 안에서, 또 양들 안에서, 또 교회 안에서, 또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오늘도 자라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어떻습니까? 31,32절을 읽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여기 겨자씨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들에서 자생하는 1년생 식물입니다. 5월쯤 노란 꽃을 피우고, 열매는 기름으로 쓰이거나, 냉면 먹을 때 톡 쏘는 겨자 양념으로 쓰입니다. 겨자씨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작은 것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가 자라 상당히 커지고 큰 가지 줄기도 낸다고 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커진다고 합니다. 이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수적, 지역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한 알의 겨자씨처럼 너무나 작고 미약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얼마나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나귀 구유에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복음 사역을 시작할 때도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던 곳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거대한 유대 문화와 종교, 화려한 성전에 비하면, 예수님 당시 기독교는 미미해 보이고 핍박으로 인해 곧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일부인 유대 변방에서 생겨난 신흥 종교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복음은, 하나님 나라는 점점 자라나고 성장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대 거대한 제국 로마를 넘어 오늘날은 전 세계를 뒤덮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와 기도와 일대일 성경공부도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느껴집니다. 당장 눈에 크고 많은 열매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작아 보이는 우리의 사역 속에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함께, 우릴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 비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공중의 새들은 한없이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계속 공중에서 날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깃들일 그늘이 필요합니다. 쉼을 얻고, 먹을 양식을 얻고, 새끼를 낳아 번식할 곳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 영혼들도 마치 공중의 새들과 같이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지치고 피곤해졌을 때 쉴만한 그늘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 준비하고, 사랑하고, 일을 하지만 세상이 내 뜻대로 다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삶의 회의와 허무와 피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깃들일 말씀, 깃들일 목자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 그 무엇이, 어느 누가, 이런 영혼들의 깃들일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그들이 기대도록 어느 누가 어깨를 빌려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줄 수 있고,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임과 우리의 사역이 겨자씨 한알과 같이 작고 미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릴 통해,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와 더 나아가 세계 캠퍼스 영혼들이 말씀 안에 깃들이게 되고,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도 임하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상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좋은 마음 밭에 심겨졌을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씨를 뿌리는 데서부터 시작하며,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우리가 전도하며 뿌린 말씀의 씨앗들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반드시 자라 큰 가지를 낼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 지쳐있는 영혼들이 그 가지에 깃들어 참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더디고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을 영접하는 내면에, 또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성장하고, 우리 눈에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이 밝히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간직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붙들고, 한 주간도 말씀을 깊이 소화하고,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수고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