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입니다. 남쪽으로 난 창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창 밖으로 떠오른 달을 보았습니다. 창살 너머 맞은 편 사동 건물 위로 떠오르는 이지러진 달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더군요. 밤 9시, TV가 꺼지고 다같이 이불을 펴고 눕습니다.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온전히 제 자신에게 집중을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제 의식은 이제 비로소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 바깥의 가족, 친구들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지난 주 월요일 헤어지던 날의 풍경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움이 몰려오는 순간입니다. 잠시 이 감정들에 젖어있다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간혹 들리는 코 고는 소리 외에는 조용해진 이 시간을 감사히 여기며 고도의 집중력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구속되기 전날 서점에 들러 사왔던 소설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어느 새 11시가 되어있습니다. 졸리진 않지만 눈을 붙여봅니다.
시즌 2까지는 아니고, 게임으로 치면 1탄을 깨고 2탄에 돌입한 기분입니다. 신입방에서 지낸지 5일 째 되던 지난 금요일 이곳 3상 3방으로 옮겨 왔습니다. 3동 2층 세 번째 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제가 그동안 수백 번도 넘게 들어왔던 징역 생활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분입니다. 물론 여전히 제가 상상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해 아껴둔 에너지는 아직 충분한 편입니다. 왜 그런 게임 있잖아요. 떨어지는 미션들을 수행하지 못하면 에너지 칸이 떨어지지만, 잘 수행하면 오히려 칸을 가득 채워서 해당 스테이지를 마칠 수 있는. 신입방에서 보낸 지난 5일을 ‘퍼펙트’ 수준은 아니어도 ‘A’정도로 무사히 마치고, 연료를 충분히 채운 상태로 이곳 2탄을오 넘어온 것이죠.
이 곳에서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제가 붙들고 있는 화두 중 하나는 이 곳 질서에 대한 ‘존중’과 ‘자기표현’ 사이의 균형을 스스로 맞추는 부분입니다. 상시적인 노출과 감시라는 이곳의 질서를 이미 알고 있었고 기꺼이 감수할 생각을 하고 왔기에 제게 반말을 뱉는 교도관이나 방 안에서 나이 드신 분들의 반말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큰 자극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방 사람들이 TV를 보면서 “여자”가 화제가 될 때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곳에서 만난 분들은 그동안 제가 믿던 가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이 사회의 딱 평균적인 가부장적 의식을 내보입니다. 이 때는 제가 함께 맞장구를 치거나 대화에 참여하기가 힘들어지죠. 듣기 불편하긴 하지만, 이 분들의 수준과 생각을 최대한 존중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제 생각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불쑥 올라오기도 합니다.
이 곳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 결코 저를 굽히거나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저는 이 분들을 존중하면서 저의 ‘평탄함’과 ‘자기보호’를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직까지 크게 힘들거나 불편한 일이 없었던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친구가 넣어준 전자서신을 통해 최근 유엔 자유권위원회에서 또 다시 반가운 권고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인통보를 청원한 한국 병역거부자들의 케이스에 대해 예전의 권고처럼 이번에도 한국정부를 향해 즉각 병역거부자들을 석방하고 구제해야 한다는 요지의 권고였습니다.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옆방에 여호와의 증인 신자도 저보다 며칠 더 일찍 들어온 분이 계시는데 이 소식을 들었는지, 혹시나 모른다면 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줘야겠습니다. 한국정부가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병역거부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 있는 방에서는 설거지를 돌아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혼자 시간을 가지며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저는 설거지를 할 때가 좋습니다. 여기 온 이후로 매일 스트레칭도 하고 술도 안 먹으면서 먹는 것을 조절했더니 몸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이제 달리기와 근력운동을 꾸준히 해서 ‘빨래판’ 몸을 벗어나보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바깥에 계신 분들도 몸 관리 잘 하시면서 이 봄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럼 또 소식 전할게요.
2011. 4. 17.
첫 번째 맞는 주말에, 날맹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