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 수는 존재자체로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수학이다. 인간은 수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소수의 수학자들을 위해 다수의 학생들이 희생되어야 한다. 수는 인간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획일화하면서 삶을 경쟁과 파국으로 몰아간다.
유클리드 : 수학 공부로 불행해진다는 이야기는 스스로의 나태와 게으름을 방증할 따름이다. 소수의 수학자들을 탓할게 아니라 공부하지 않은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수를 뿌리면 인간 행복이라는 열매를 거둘 수 있다.
2. 수는 인간을 불행하게 하였다.
모모 : 시간저축 은행의 사원들이 시간을 수량화한 시간 계산표를 보여주면서 시간을 아끼고 일을 더 빨리 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라고 조언했다. 시간을 계산하여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은 시간을 아껴야 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수가 핵심이었다. 예전에도 시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시간을 숫자화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어떤 대상을 그냥 바라보는 것과 수를 통하여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마을 사람들은 분명 더 바빠지고 분주해지만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없어졌고 불행하게 변했다.
유클리드의 반론 : 웃고 즐기는 것만이 행복의 정의에 따라 행복한 모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진리나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하나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어린왕자 : 어른들이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단순함,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그 무식함이 생기게 된 이유는 바로 수 때문이다. 수는 사람을 단순하고 무식하고 무료하며 불행하게 만든다. 어른들은 수 때문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신비함도 잃어버리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알만큼 안다고 생각한다. 수는 사물의 내용물이 없는 껍데기만 보여줄 뿐이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모자라고 하는 것처럼.. 수는 이처럼 사람들을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게 만든다. 모든 대상들의 내면과 깊은 곳보다는 겉모습만 보게 해서 결국 오해하고 질투하고 분쟁하게 만든다. 수는 사람에게 두가지 착각을 심어주는데 첫 번째 착각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두 번째 착각은 사람들이 불행해 하면서도 행복해 지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는 거다. 행복은 환상일 뿐이고 실상은 불행이다.
유클리드의 반론 : 어른들이 단순하다고 했는데 불행이라는 y값이 x만으로 결정된다는 너의 진술 또한 너무 단순하다. 자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보이지 않는데 뭔가가 있다고 어떻게 아냐?
투이아비 : 빠빠라기들은 수(동전, 시간, 나이)를 쫒아 사는 인생이었다. 항상 큰 수를 좋아하고 더 큰 수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더 큰 수를 위해 웃음가 기쁨과 즐거움을 과감하게 버렸다. 수가 삶의 목표였다. 수 없이 살 수 없고 수를 통해 관계를 맺고 관계를 통해 수를 얻는다. 사람, 자연, 위대한 마음은 사라지거나 밀려나 있다. 우리 마을에 수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수가 없는 세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수 없이도 빠빠라기들보다 행복하게 살기 때문이다.
니체의 보충 : 사회에 따라 수와의 거리가 달라질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여러 부족들의 예화를 들면서..)
3. 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였다.
갈릴레오 : 고대, 중세, 근대의 사상들이 혼란한 시대에 살았던 나 갈릴에오는 과학만이 당대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음을 확신했고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수였다. 수는 크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정확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는 수학의 언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수 없이 사람은 우주의 단 한 단어도 이해할 수 없다. 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주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수학의 확실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항상 혼돈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수는 우리가 원하는 구원의 세계를 보여주는 유일한 언어였다. 모든 대상은 수를 통해 명확해 졌으며 모든 갈등은 수를 통해 조정되었다. 수에 다다른 인식만이 온전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측량해야 하고 측량할 수 없는 것은 측량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수를 보급하고 사용했다. 수학,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정치 등의 전 영역에서 수와 사회의 관계는 더욱 기밀해졌다. 시간을 숫자화 함으로써 시간의 은밀하 속성들이 드러난 것을 본다면 수는 우리의 인식 영역을 확대해주고 풍부하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반론 : (자연수와 제곱수의 예를 들면서..) 수학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수는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질들이 사고방식에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 고로 수는 새로운 문제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
에셔 : 나는 수학공부가 싫었고 수학은 나에게 고통이었다. 수학을 다시는 만나기 싫었다. 하지만 수학과 질긴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수학자들은 내 작품을 보면서 수학적인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수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생각의 지평이 열리고 자극을 받아 여러가지 상상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난 작품을 수학과 무관하게 구상하고 제작하였지만 내 작품은 철저히 수학적이었다. 수학을 싫어하고 어려워했지만 수학적인 작품이 되어버렸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수학적인 개념과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작품화하였다. 니체측 증인들의 모든 진술에 공감하지만 우리는 수에 이미 익숙해져있고 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미 충분히 수학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 수는 이미 우리 아에 들어와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간트의 선고 : 선고포기를 선언한다. 인간불행죄라 할 만한 사실적 증거와 정황은 존재한다. 하지만 수가 인간을 행복하게 했다는 증거와 정황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유죄, 또는 무죄라고도 할 수 있다. 본사건을 미해결 문제로 역사에 남겨두고자 한다.
4. 그러면 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셔 : 모든 존재는 내 판화작품(악마와 천사)에서와 같이 결국 대조와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결국 수도 대조다. 관계다. 하나의 양이 다른 양과 비교될 수 없다면 양의 개념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 수란 양의 비교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비교의 세가지 방법은 ① 대상들 간의 크기를 직접 비교한다. ② 제 3의 물건을 가지고 대상들의 크기를 측정한다. ③ 특정 단위를 선택하여 그 단위로 대상들의 크기를 측정한다.
세가지 모두 비교의 방법이란 점에서 같지만 직접비교에서는 대상들을 전체적으로 비교하여 어느 것이 크고 작은가 하는 결과만 남는다. 그러나 나머지 방법은 크기 비교의 결과뿐 아니라 다른 또 하나가 남는데 그것은 제 3의 물거이나 특정 단위가 몇 개나 들어갔는가를 나타내주는 ‘뭔가’가 남게된다. 그게 바로 수다. 그래서 세다와 숫자의 뜻까지 확실해진다. 세다의 의미는 사물의 수효를 헤아리거나 꼽다이고 다른 말로 하면 센다는 것은 대상안에 특정 단위가 몇 개 들어갔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에서 중요한 것은 단위이다.
5. 생각해 볼 문제
1. 어떤 대상을 그냥 보는 것과 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2. 수는 모든 것을 파헤쳐 신비감을 사라지게 한다는 어린왕자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3. 수가 인간을 더욱 불행하게 한다거나 행복하게 한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또 다른 근거나 예가 있나요? 4. 빠빠라기의 생활에 대한 투비아비의 묘사가 적절한가요? 아니면 너무 극단적인가요? 5. 에셔의 작품을 보고 수학적으로 해석해보세요. 이상한 공간은 수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간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수학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하기 때문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6. 수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크기비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떤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요? 7. 중고생들 중 많은 학생들이 수학포기자, 수학부진아라는 기사를 최근에 접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수학교육의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8. 1장을 읽으면서 느끼거나 생각한 것, 교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