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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속가 연구
속가 형성배경론
Ⅰ. 속가 형성과정의 역사적 배경
1. 문학과 사회
문학은 사회와 역사를 완전히 떠나서는 생성될 수도 없고 존립할 수도 없는 하나의 유기체다.
문학이 당대의 사회. 역사적 상황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그것의 변화와 발전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간단한 논의로 밝혀질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사회. 역사적 상황과 전혀 무관하게 형성될 수 없으며 또 그것 없이는 존속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문학 작품이 사회.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에 의하여, 사람에 관하여, 사람을 위하여
의지적으로 창작된 사건이라는 점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문학 작품은 역사성과 사회성을 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학 작품은 이 보편성으로 인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여 생명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과 사회와 역사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고, 그 속에서 전체적인 것을 획득하므로 이간이 영위하는 문학은 아무리
독창적이라 하더라도 사회나 역사와는 별개일 수 없다.
따라서 어느 시대의 문학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문학이 탄생된 그 시대의 사회. 역사적 특성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개별적인 작품 출현은 그 시대 문학의 전 체험을 통하여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 속에는
당연히 한 시대의 의식을 통하여 수렴된 기원과 소망, 사건 등 사회 전반적인 현상이 투영되어 작품의 어딘가에
나타나게 된다.
종족과 환경과 시대는 문학을 존재하게 하는 직접, 간접의 동기가 되므로 어느 시대의 사회. 역사적 배경의 특성이나
상황을 고려하여 문학 작품의 내용에 효과적으로 접근해서 그 작품이 갖고 있는 여러 중요한 문제를 보다 쉽게 파악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보면 문학 작품에 나타나 있는 제반 요소와 현상을 통하여 문학이 생성된 당대의 사회.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까지 해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특히 고려시대에 생성된 속가는 <정과정곡>과 같은 개인 창작의 작품도 있지만 대체로 민중계층이 향유했던 저층의
문학, 즉 민요였던 것이 악장으로 승화된 작품도 많기 때문에 이것에는 애초부터 당대의 사회성과 역사성은 물론,
다른 시대의 사회. 역사성도 짙게 침투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2. 형성의 역사적 배경
속가는 고려의 사회. 역사적 상항에 깊게 관련되어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를 들면서 속가의 역사성.
사회성에 대해 서술해 보기로 하자.
첫째, 현존하는 속가 중에는 개인이 창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노래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이 작자를 알 수 없고, 그것의
내용이나 다른 정황으로 보았을 때, 민요성이 짙은 노래라는 점이다.
원래 민요는 공동작이며, 이것이 민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기도 하다.
공동작이라 함은 그 노래 속에는 개인적 정서가 주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보편적임여 구체적인 정서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백성들의 노래임을 말하는 것이 된다.
민요는 민중에 의해 생산된 심리적. 체험적 결과의 가요로서, 이 속에는 대개 하층민중의 현실적 삶에서 생겨난 비극적.
부정적 양상이 희망적. 긍정적 양상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남이 특색이다.
<청산별곡>. <서경별곡>. <만전춘별사>. <정읍사>등의 노래도 형태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민요로서의 제반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 노래들은 상실의 비애를 주로 읊고 있어 고려 시대의 비극적. 역사적 상황이 형성배경으로 작용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속가 중에는 <정과정곡> 등을 비롯, 개인에 의하여 창작된 노래도 물론 여러 편 있지만 그것의 많은 수가 처음의 발생
적 측면에서 볼 때는 분명 서민 대중의 노래인 민요였다.
그러나 그것이 향유계층이나 가창자, 가창 내지 연향된 공간이 민요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악장으로 승화된 뒤부터는
왕을 중심으로 한 향유계층의 욕구와 궁중 악장으로서의 체제와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노래 자체의 내용과 형태 증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면서 민요적 색체가 많이 퇴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들 속가를 순수한 민요 그 자체로 보기는 어렵다.
둘째, 속가는 대부분 그 내용이 鄙俚한데, 이는 속가가 민중의 삶과 그것에서 유로도니 애한을 바탕으로 해서 생성되
었음을 드러낸다.
『고려사』편찬자들은 속악의 내용이 속되고 천박하다고 했으며, 그 중 비속의 정도가 심한 것의 내용은 문헌에
기재하지도 않고 다만 곡명과 지은 뜻만을 적는다고 밝히고 있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갖고 있는 여러 문화계층은 그것에 부합이 되는 수준과 성향의 문화와 예술을 창출해 냄이 보편적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질과 수준에서, 또는 내용면에서 층위가 생기게 되는 것이라 보겠다.
셋째, 많은 속가들에 이별의 모티브가 있고, 또 이들 노래의 대부분이 상실하는 데서 오는 한의 정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별의 한을 주된 정서로 한 속가는 고려사회에 대한 고려 민중들의 거부적 대응심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 시대는 중세의 암흑기라 불릴 만큼 비극적 정황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이별의 아픔과 한을 감상적인 노래가
자위적 도구로 이용되어 특히 많이 불려졌던 것이다.
이는 문학의 기능을 혼란된 심리 상태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파악하는 보편적 입장과 일치한다.
넷째, 속가 중에 <정과정곡>과 같은 작품은 개인 창작가요이긴 하지만 당시의 사회. 역사적인 상황이 가요 생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앞에서 누차 언급했다.
상층계층과 서민계층의 목적하는 바가 다르고 문학적 표현 양태가 동일하지는 않다 하더라고 상황이 같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자로 작용하면 시대상황과 관련된 동일 의미차원의 작품이 두 계층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상층계층은 농촌 농민 등 일반 서민의 어려운 생활상을 중심 제재로 하여 한시문을 많이 창작했다.
즉, 상층계층조차도 사회 현실에서 취재를 했거나 그것에 바탕을 둔 시문을 많이 창작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고
상층계층보다 고난을 더 많이 겪었던 민중계층에서 발생한 속가가 당시의 역사와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거나 관련을
맺어 생성되었다고 추론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어쨌든 상층계층의 한시문 중에는 속가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삶의 불행, 특히 피폐된 농촌의 참담한 정황을 제재로
하여 창작된 시편이 많은데, 이는 평민층에서 생겨난 속가가 사회.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생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하나의 증좌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속가에 미친 송가의 영향
1. 서론
속가는 우리말의 미감을 가장 잘 살린 시가 유산 중의 하나이다.
속가는 3구6명의 사뇌가 형식과 상통되기도 하고, 또 시조나 가사 등 다른 국문 시가와도 맥이 닿기도 하나 그것들과는
다른, 그 나름의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2. 송사의 고려 유입과 속가에의 영향
1) 송 문물의 도래와 송사의 유입
사문학은 비록 송으로 대표되는 송대에 처음 발흥하여 존속되어 온 것이 아니고, 당 나라 때부터 많은 문인들에 의하여
창작된 ‘樂歌文學’의 일종이다.
사는 광으로는 시문학에 포함될 수도 있겠으나 제언체인 일반 한시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사는 처음에는 악곡의 가사로 시작되었으나 악가문학이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曲譜위주이므로 가사보다는
노래가 중심이며, 문학적인 면보다는 음악적인 면이 오히려 더 많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사를 ‘曲’이나 ‘曲子’, 혹은 ‘曲子詞’라 부르기도 한다.
사는 당송 양대에 걸쳐 창작된 작품만도 2만여 수가 훨씬 넘는다.
송이 960년에 건국되자 고려는 2년 뒤인 962년 광종 13년에 본격적으로 송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거란과 여진 등의 흥성과 이들의 연이은 침구로 고려는 송과의 국교를 유지함이 쉽지 아니하고 이들 나라 사이에서
고려의 입장도 미묘하게 된 적도 있으나, 두 나라의 관계는 계속 긴밀하였다.
그 이유는 고려가 송의 선진화된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던 때문이기도 했으나, 송이 자기 나라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 거란과 여진 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바다 건너 있는 고려를 이용하려는
목적 아래 적극적으로 포용하면서 그들의 문물을 고려고 많이 보낸 것 또 하나의 주용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2) 문인계층의 송사 수용과 속가에 미친 영향
송의 사문학이 어느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려에 전해졌는지는 문헌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알기는 어렵다.
고려초기나 훨씬 그 뒤에까지도 고려의 유명 문인들은 송의 사에 경도되기보다는 오히려 성당, 만당의 시인들을 흠모
하면서 그들의 문풍을 본받으려는 경향이 짙었다.
송사가 송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고려전기에 그렇게 흥성하지 못했던 한 이유는 이와 같이 고려 문인들이 만당의 풍조에
탐닉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사는 비제언체로서 제언체인 시보다는 그 형식, 율조 등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고려의 문사들이
그것을 소화하여 창작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사문학에 익숙해진 왕과 고려 조정의 행신이나 일부 문인들이 결국은 속가의 창작이나 취택에 관여한 부류들이
거나 주된 향유층이므로 궁중가악인 속가는 사의 영향을 어떻게든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17대 인종은 수사공참지정사 윤보에게 명하여 고사 3백 수를 찬집케하여 『당송음악일부』라 명명했는데,
이러한 일은 더욱 고려의 속가가 사의 내용과 형식을 본뜨게 되는 촉진제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때 조정관리 출신의 문인이 아닌 민간 문사인 황보약수 같은 이도 사를 창작하였는데, 이는 사 창작에 대한 관심이
일부 특수계층에만 한정됐던 것이 아니며, 사에 관한 열기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고조되어 결국은 궁중의 속악가사로
사를 취하게끔 했다고 여겨진다.
특히 23대 고종 때의 이규보는 서거정이 찬탄하여 말한 것처럼 ‘동방의 시호’로서 일세를 풍미했던 문인이었으며,
7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주로 최충헌, 최우 막하에서 그의 문재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당백이라 칭할 정도였으며, 말년에는 상국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최충헌 저택의 왕을 영접하는 연회석상에서 시일장의 형식으로 구호를 짓는 등 『고려사』악지 당악의 대곡에
사용된 것과 흡사한 것을 창작했으며, 특히 직접 6조 11편의 사를 짓기도 했다.
특히 이규보는 속가가 흥성하게 된 충렬왕 때와 맞물린 시기의 사람이므로 송사가 속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누구
보다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사작에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하여 사의 창작과 보급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이제현을 들 수
있다.
그의 문집 『익제난고』에는 시. 기. 비명. 표. 논. 사 등 다양한 양식의 글이 실려 있는데, 특히 그의 사 작품은 전부
15조 53편으로서 작품 수로 볼 때 그가 고려 전체를 통하여 사의 제일인자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제현은 그가 살았던 당대의 문인들에 의햐여서 뿐만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찬탄과 숭앙을 받은 인물이다.
한의 사마천에 비유되기도 했던 그는 이색이 찬한 묘비명에서는 도덕과 문장의 수종으로 받들어 지기도 했다.
특히 그는 『소악부』에 11수의 우리말 가요를 한문으로 번역해 놓았다.
이들 중 7편만이 『고려사』 악지에 있으므로 이제현이 이들 한역가를 전부 속악에서 취했다고 단정하기는 지금으로
서는 무리이다.
그러나 11편 중 7편은 확실히 악지에도 있는 것이므로, 그는 악장으로 사용된 속악을 늘 접했거나 이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교방기녀들의 송악 습득과 주변 상황
송의 음악으로 고려에 들어 온 것은 송의 교방악과 대성악이다.
이 중 송의 교방악은 송대에 들어와서 새로 만들어진 대성악과는 달리 당 나라 때에 창작된 당악도 많으며, 그렇게
때문에 당대의 음률 체계를 송에서도 대개 습용하였다.
이것의 일부가 고려로 전래되어 고려의 궁정에서 사용됐고, 이 위에 송대에 새로 만들어진 교방악이 수용, 첨가되어
현전의 『고려사』 악지 당악조에 실려 있는 고려당악으로 형성된 셈이다.
그러므로 『고려사』악지 당악조의 당악은 명칭만으로 볼 때 오로지 당 나라의 음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기실은 송대까지 써 오던 음악의 통칭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악지에 게재되어 있는 고려 당악은 당악정재인 헌선도. 오양선. 연화대등을 제외해도 43편에 이른다.
이는 『고려사』악지 삼국속악조에 있는 삼국속악까지 합친 속가의 수와 비슷하지만, 고려 속악의 수보다는 많은
편수이다.
이처럼 악지에 실려 있는 가요의 편수만 볼 때에도 송악이 고려 조정에서 중히 여겨졌고, 또 많이 사용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송 초기부터 당악기와 당악이 고려로 들어 왔으며, 이들 송의 교방악인 포구악이나 구장기별기 등이 연등회나 팔관회
에서 대악서나 관현방 소속의 교방여기에 의하여 연주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교방여기들이 송의 교방악사들을 스승으로 여기면서 송 교방악을 교습받은 실정이고 보면 교방기녀들의 송악에
관한 관심도 또한 컸을 것이며, 송악을 배우는 긍지와 자부심도 상당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교방에서 이들에 의한 송악의 연주를 허락해 주도록 주청하자 궁정에서는 팔관회 석상
에서 연주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송 교방악인 송악의 가창, 그리고 연행 방법을 습득하고 궁중 연회석상이나 팔관회 등 여타의 실연 장소
에서 송악의 실제 연주를 맡은 교방여기들은 속악의 가창과 연행을 맡은 부류들이다.
이와 같이 송의 교방악이나 속악의 가창과 연행 담당층이 같다는 점은 결국은 송악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연행 방법
등이 속가에로 이행, 접목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음을 보여 준다.
충렬왕과 그 이후의 왕들은 원에 질자로 있으면서 원의 궁중 풍습을 익혔고, 그들이 뒤에 고려로 돌아와서 왕이 된
이후에는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고려 궁정에서 행했다.
그런데 원 시대는 천박한 예술이 성행했으며, 원의 궁정에는 탄트라 의식 등 성적 의식들이 많이 행해졌는데 이와
같이 궁정의 성 풍습은 대단히 문란하다 할 정도였다.
따라서 원 황실의 이런 분위기를 닮으려 했던 원 복속기의 고려 왕과 왕후들의 해이한 성적관념이 속가를 송 교방악,
특히 남녀 애정에 관련된 송 교방악의 내용을 닮게 하는 데에 상당한 부추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3. 형성배경과 내용의 유사성
먼저, 발생과정 면에서 이 둘의 유사성을 살펴보겠다. 속가는 삼국시대부터 궁중에서 사용된 삼국의 속악들이 고려로
넘어 오면서 흡수 변형되어 계속 사용된 것과 고려에 들어와서 개인에 의하여 새로 창작된 가요, 그리고 민간 가요에서
취택하여 사용한 것들의 혼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속가들의 면면을 보면 고려시대의 민간 유행 가요에서 취택한 것이 주종을 이룬다.
발생 초기의 사는 농촌이나 산촌 등 지방적인 특색을 갖고 지방의 여러 곳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이는 속가가 대개 여러 지방의 유행 민요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상당히 통한다고 하겠다.
어쨌든 사의 발생과 발달이 속가의 그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몇 가지 면에서 견주어 볼 때 그것들
사이에 유사성 내지 동질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노래 사이에 발견되는 유사성은 별개의 상황에서 발생한 우연한 결과라고도 하겠으나 사의 형성과정과
배경, 창작 방법 등이 속가의 형성과정과 창작 방법 등에 영향을 준 때문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사의 형성과 발생, 발달이 속가의 형성과 발달에 한 본보기나 틀이 되어 고려에서도 속악을 민요에서 취택하고, 또
음악적 소양과 재질이 있는 폐행들이 직접 이들 노래의 가사는 물론이고, 음곡에까지도 손을 대어 악장으로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속가는 내용에 있어서도 송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이 많은데, 속가의 내용 특성을 하나로 가닥을 잡아서 결론 내리
기란 어렵다.
그런데 궁중악이란 대개의 경우 송도나 송수가 주된 내용이요, 흐름이다.
그런데도 많은 속가는 그 내용에서 남녀상열로서 음설스럽기까지 하며, 또 그것의 주된 정서가 한이라 해도 좋을 만큼
체념적이고 소극적이며, 암울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비극적인 면모가 두드러짐이 하나의 특징이다.
〈만전춘별사〉〈가시리〉〈정읍사〉〈쌍화점〉〈청산별곡〉등 대부분의 현전 가요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사가 전하지 않으면서 창작동기등 관련 기록만이 남아 있는 속가들의 많은 수도 비극적 정서인 한을 노래하고 있다.
〈사리화〉〈제위보〉등이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송사도 속가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일반적으로 규정이나 이별에서 비롯되는 애한과 애상, 그리고 춘원과 규정
등으로 비극적, 감상적인 것이 주조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렇기 때문에 시가 장중전아하며 씩씩한 문학인데 반하여 사의 체재는 오히려 아름답고 날씬한 여자와 같아서 싸우고
고함치는 것은 잘 못하지만 가냘픈 노래와 부드러운 춤에는 뛰어나며, 또 깊고 섬세한 미인의 문학이므로 내면에 감추
어진 슬픔과 원망을 서사하는데에도 뛰어나다고 했다.
그리고 송사의 내용에는 비극성이나 우환의식 등이 많이 드러나는데 이것도 우리의 한에 비견될 수 있으며, 그런 비극
성은 개인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주로 당대의 사회,역사적 상황에서 연출된 것으로 집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북송의 사나 남송의 사에 다 통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회적 위기와 통치집단 내부의 모순과 대립이 주요 기반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사인들도 대부분
우수 때문에 사를 지었다 할 정도였다. 그래서 당송사는 내용에 있어서 이별의 슬픔이나 세상살이의 험난함,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등이 주요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당송사에 출현하는 인물의 대부분은 사랑에 신음하고 그리
움을 호소하는 남녀이거나 실의에 찬 떠돌이 및 길 잃은 호걸들이며 그들은 외롭고 적막하며 고민하고 슬퍼한다고 했다.
연정가요 속가로는 <정읍사>. <가시리>. <서경별곡>. <이상곡>. <만전춘별사>. <쌍화점>. <정석가>. <동동>이 해당
된다.
이들은 상열의 노래이며, <제위보>. <예성강>등은 속악조에 창작 동기만 밝혀져 있을 뿐 가사가 전하지 않는 남녀
상열에 관계되는 노래이다.
그런데 『고려사』당악조에는 당악정재인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악, 연화대를 제외하면 송사는 43편이다.
이 중에 내용이 남녀연정인 것은 대개 16편 정도이다. 물론 고려대에 들어 온 송악 중에는 송축 등의 내용을 제외한
남녀상열이 그 수에 있어서 상당했으리라 여겨지나 지금 『고려사』악지 당악조에 실려 있는 것으로는 이정도다.
어쨌든 이들 송사는 주로 북송의 사가 주를 이루며, 이 중에서도 유영한 사람의 작품이 4편이나 된다.
원래 사 중에서도 북송의 것이 춘원과 연정, 그리고 이별의 정한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개인 작가별로는 유영의 작품이 소식 등 다른 작가의 작품보다 남녀상열적이며 환락과 성색에 관계되는 것이 많다.
그런데 당,송 양대의 사람들이 쓴 2만여 수의 사에는 봉건사회의 기본 모순이랄 수 있는 농민과 지주 계급 사이의 갈등
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사의 현상은 속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적 특징이기도 하다.
즉, 현전 속가 중에는 당대의 제도나 사회 병리현상에서 야기된 모순과 구조적인 비리로 인한 백성들의 폐해와 고통에
관한 내용을 노래한 가요가 <사리화>를 제외하고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 가는 일반 대중들은 어떤 몸짓이나 또는 다른 여러 표현
양태나 수단을 빌려 그들의 삶의 모습을 곡진하게 드러내려 한다.
그러므로 급박한 역사적 상황속에서는 애한을 읊은 많은 수의 민중적 노래가 생성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속가에 이와 같은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가 거의 없는 것은 송사의 제재가 극히 제한적이며 광범하지 않은
특성을 갖고 있는데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결론
고려와 송과는 국교가 긴밀했으며, 문물교류도 굉장히 활발했다. 따라서 선진화된 송의 문물이 고려로 많이 유입되었
으며, 이 중에 서적류는 중요한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송의 사문학이 일찍부터 유입되었다. 송사가 속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몇가지 사항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첫째, 송에서 유입된 사문학에 대하여 예종 등의 왕과 고종대의 이규보, 이제현 등 몇몇 문인 귀족들이 관심을 가져 이를
창작하기도 했다.
둘째, 속가에 대한 송사의 영향이 어느 정도 불가피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은 고려의 교방기녀들이 송에서 파견한 악공과
악사들에 의하여 송의 교방악인 송사를 직접 교습받았다는 사실이다.
셋째, 속가와 송사는 발생과정과 내용면에서 유사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도 속가에 대한 송사의 영향을 생각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속가와 송사는 대개 민간의 노래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다 같이 민요가 갖는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이 속가가 송사의 영향을 아주 쉽게 받을 수 있는 친화적 여건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Ⅲ. 조선 건국 초 속가의 수용 상황과 변개
1. 서 론
『고려사』 권 71 악 2에 제목과 함께 창작 동기와 내용의 개요만 한문으로 소개되어 전하는 가사 부전의 고려 속가
수는 겨우 30 여 편 뿐이며, 조선에서 악장으로 사용된 고려 속가로 『악장가사』나 『악학궤범』,『시용향악보』
등에 내용이 국문으로 기사되어 전하는 노래는 더욱 적어 20편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이들 속가 중 <쌍화점>을 비롯하여, 음설지사로 지목되어 세종 이후 조선 유학자들에 의하여 배척
받았던 일부 고려 속가의 가사 내용이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 창업자들과 『고려사』편찬자들에 의하여 조선 건국
초에 왜곡 변조된 후에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내재함을 주로 논급하려 한다.
고려 속가들 중에서 왕과 상층계층에 대해 고발성이 짙은 음설의 노래는 고려 궁중에서 악장으로 사용될 때의 내용과는
다르게 조선 건국 초에 그 내용이 바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쌍화점>,<후전진작> 등과 같이 가사가 음설하다 하여 지탄을 받았던 남녀상열의 노래 중 일부는 고려 궁정
에서 악장으로 불려질 때와는 내용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2. 조선 건국에 따른 반 고려적인 조처와 제도의 개혁
건국 초 창업자들이 착수한 모든 제도개혁이나 조처는 조선 건국의 완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이념의 가치로 내걸었던 유교의 정명사상이나 인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치, 사회적인
개혁조처나, 역사 왜곡 등의 여러 극단적인 처방까지도 서슴지 않고 획책, 실행했던 것이다.
그만큼 국가의 창업과 수성이라는 대명제를 능가하는 절대적 과제나 명분은 그들에게 결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왕조는 창업의 필연성과 정당성에 대한 논거를 면밀하게 개발하여 민중들에게 널리 유포, 주지시켰다.
이런 까닭으로 태조 원년 10월에는 태묘조성도감을 설치, 고려의 종묘를 헐어버리고, 새 왕조의 종묘를 세우는 일을
시발로 본격적인 신구 대체작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명으로부터 국호의 승인을 받고, 대내적으로는 고려의 부정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극대화하여 이를
선전하였다.
즉, 고려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가치를 희석시키거나 지워버리면서 다른 의미나 새로운 ‘대체가치’로 치환시키는 데 혼신
의 힘을 다했다.
원래 조선 건국의 중심 세력은 앞 왕조의 중심 세력인 상층 사대부나 유신들이 아니라 사대부 대열에서 낙오될 위기에
처한 하층 사대부들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새 왕조는 각계각층의 보다 넓은 지지와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인책이나 새로운 제도의 창안은 물론, 그것이 설령 혁명의 논리에 맞지
않아 배제의 대상이었던 것들이라도 새 왕조의 체제 확립과 유지에 필요하다면 일단 수용하여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은 철저히 배격하든지 왜곡하면서 고려에로의 회귀심리를 민중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차단, 봉쇄
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3. 조선 건국 초 통치계급의 속가 이용과 그 배경
왕조 교체기에는 정치와 경제의 직접적인 개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민심의 향방을 돌리는 일이다.
이는 민심 향배의 중요성을 논한 『관자』의 목민편에도 나오는 것으로 모든 군주들이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고려를 와해시킨 조선 건국자들에게는 마지막으로 민심의 효과적인 수습과 다스림이 큰 과제였다.
민심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전조의 음악인 고려 속악에 관하여 이들은 필연적으로 여러
조처들을 취하여 이를 이용했다고 믿어진다.
즉, 이들은 고려 속악의 내용을 왜곡 변개하든지 정치 목적에 부합되는 노래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정략적으로
이용했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려 멸망의 필연성을 잘 드러내주는 고려왕들의 퇴폐적 면모와 사회 부패상이 중심인 내용의 민요를 취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기존의 속가를 그와 같은 내용으로 변개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음악의 대중 교화성이나 효용성에 대한 관념은 고대 우리나라 선인들의 음악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편이다.
이에 대한 예로는 먼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선사의 기술과 , 같은 책 권2 가락국기조나 권5의 월명사 <도솔가>
조나 융천사의 <혜성가> 등의 많은 관련 기록을 들 수 있다.
가락국기조의 <구지가>는 주술에 능한 김수로가 노래의 주술적인 효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이 등극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특히 <도솔가>조의 부대기록에 “향가는 천지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라고 한 점으로 볼
때 음악으로써 천지의 신명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교화하거나 정치적으로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후대인 고려의 태조 왕건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이나 이성계 등 조선 건국자들에게도
기본적인 면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음에 조선 초 지배계층들의 음악관을 한 번 보기로 한다.
『고려사』 권 70 악1에 “음악은 그것으로 순미한 풍속과 교화를 수립하고 조종의 공훈과 은덕을 형상화한다.”라고 한
사관들의 생각이나, 『악학궤범』 서문에 “같지 않은 소리를 합해서 능히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임금의 지도 여하에 달
렸다.
지도함에는 정과 사의 다름이 있으니, 풍속의 성함과 쇠함도 여기에 달렸다.
이러므로 악의 도가 정치와 크게 관련을 갖는 것이다.”고 한 기록 등도 그들이 음악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음악관의
일단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정도전은 악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까지도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의 존엄과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고 보았으며, 자신이 태조 3년에 저술한 『조선경국전』 상 악조에서 공덕이 이루어지면 악이 지어
지고 악을 보면 공덕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악에 대하여 말했다.
그런가 하면 앞서 언급한 『세종실록』 권61, 15년 9월 신묘조 또한 세종 때 위정자들의 음악에 대한 생각이므로
참고로 할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정도전이나 뒷시대 세종 때 위정자들의 음악관은 새 왕조의 기반을 다지거나 민심을 회귀시키기 위하여
조선 건국 초 새로운 악장의 창작은 물론이고, 고려 노래들의 내용을 왜곡하여 수용했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확신을
주는 한 근거가 된다.
이태조의 위화도 회군 후 고려 조정에서 내용이 비리한 속악을 연향에 사용하는 데 대한 논란도 이미 있었다.
조준 같은 사람의 시무소가 있었는가 하면, 조선 건국 초기에도 기악을 혁파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건국 직후에는 음설한 속가에 대하여 보다 더 구체적인 개찬논의나 산개를 하지 않은 채, 연향에서 영인들로 하여금
그런 부류의 노래를 계속 부르도록 한 것은 고려 멸망의 필연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선 개국 초에도 고려의 부패가 적나라하게 노래된 고려 속가들을 당분간 사용할 뿐, 오히려
물리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사가 전하는 고려 속가 가운데 남녀상열 내지 음설지사로 볼 수 있는 <서경별곡>. <정읍사>.
<쌍화점>. <만전춘별사>. <이상곡>과 가사 부전의 <후정화>, 그리고 불교 내용의 무애정재 등 고려 음악들은 조선
건국 초에는 별 말없이 불려지다가 세종 때부터 가사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배척되기 시작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조선의 창업자들은 조선 건국 직후에는 주로 고려 속가의 기존 음률과 내용, 형식을 그대로 두거나, 또는 음률은 원래
대로 보존한 채 내용이나 형식을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변개하거나 다시 짜서 악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신도가>. <정동방곡>. <납씨가> 등 새로운 악장을 다수 창제하여 사용하거나, 더러는 민간의 노래를
가져다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이러므로 고려 속가 <쌍화점>이나 <후정화>처럼 고려의 왕과 상층계층의 도덕적 타락상과 부패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들어 있는 많은 노래나, 음설지사로 알려진 <만전춘별사>나 <이상곡> 등은 고려 궁중에서 실제로 불려진 것이라기
보다는 조선의 건국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게끔 원래 속가의 내용을 수정했든지, 고려
때 민간의 유행가요 중에서 취택하여 악장으로 사용한 것 중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조선의 창업자들을 중심으로 여말이나 조선 건국 초에 음란성이 짙은 내용이 담긴 고려 속가를 배척하자는 일부의
논의가 잠시 제기되었음에도 건국 초에는 오히려 이들 노래가 계속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목적과 필요성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4. 조선 건국 초 속가의 변개 내용과 방향
조선 창업자들이 고려 속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활용함에는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에는 고려 속가의 내용을 변개하여 이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가창케 하거나, 아예 제외하는 등의 방법이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노래의 내용을 왜곡 변개시키는 데에는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모든 속가의 내용을 왜곡 변개하는 것은 오히려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왕에 대한 송축이나 문물제도의 찬양에 관한 노래는 왜곡, 변개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편찬한
악지의 수록에서 제외하는 방법을 썼으며, 고려의 치부를 드러내거나 사회 고발성이 짙은 고려 속가나 민간의 노래는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내용을 변개하든지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건국을 전후해서 유행했던 예언적 성격의 민요나 시도 정권 탈취에 적절히 활용했다고 여겨진다.
다음에 이런 문제들을 몇 갈래로 나누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첫째, 『고려사』는 고려 말 반 고려적 정서가 가장 강한 소유자로 과격한 개혁논자이며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과 조준 등이 태조 원년 10월에 왕명을 받아 동왕 4년(1395) 정월에 완성한 『고려국사』를 준거로 삼아 편찬
되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태종이 우왕 이후의 이 사서 기록이 특히 부실하다 하여 하륜과 남재, 이숙번 등을
시켜 수정케 한 것을 시작으로, 세종 때 정인지, 김종서 등에 의해 본격적인 개찬을 거친 뒤 조선 건국 59년만인 문종
원년(1451)에야 비로소 『고려사』란 이름으로 편찬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려사』는 『고려국사』의 내용이나 기본적 서술 방향, 그리고 그것의 편찬 정신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원천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또 『고려사』 권 71 악 2 속악 조에 “고려의 속악은 여러 악보를 참고로 해서 실었다.” 고 했는데 이 기록의 ‘참고
하다’는 말에는 ‘살펴서 생각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편찬자들의 주관에 따라 기존의 악보나 이에 관한 기록이
왜곡 내지 변개, 또는 삭제되거나 선택적으로 취택되었을 수 있는 정황이었음을 어느 정도 시사한다.
둘째, 조선 건국자들이 고려 속가 중 어떠한 성향이나 내용의 노래를 제외했는지에 대하여 한번 살펴본다.
고려 4대 광종은 왕권의 강화와 지방호족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노비안검법이나 과거제를 실시하는가 하면 화엄의
성상융회사상까지도 이용하는 등, 전에 없던 특단의 여러 조치를 강구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광종은 왕의 절대적 권위와 위업을 강화, 고취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의 하나로 송축의
노래를 창작하여 궁중 연향시에 악장으로 사용하도록 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 악지 등에는 이런 종류의 속가가 전혀 없다. 이도 속가에 대한 조선 시대의 왜곡 상황을 짐작케 한다.
왕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 왕 본인을 기리는 내용의 노래보다 더 적당한 것은 없을 것이므로 남녀상열의 노래와 함께
왕의 덕을 송축하는 속가도 연행되었을 것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왕의 비리를 드러내는 내용의 노래만 존재할 뿐 군왕의 공덕을 칭송한 송축가가 한 편도 없음은 조선에 들어
와서 조선 창업자들이 이런 것들은 말살했을 것으로 봄이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셋째, 아무리 고려 궁중이 도덕적으로 문란하여 정도가 극에 달했다하더라도 왕을 위시한 상층계층이 향유했다고 보기
에는 무리인 노래가 가사 현전 고려 속가 중에 있는데, 이들 노래 역시 조선의 창업자들에 의하여 가사가 변개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고려 속가의 경우가 <쌍화점>인데, 이 노래가 고려 궁중에서 연향 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왜냐하면 충렬왕 등 고려왕들이 아무리 황음연락에 빠졌더라도 왕 자신의 성적 비행이 대상으로된 노래를 왕 자신이
그냥 듣고 즐긴다는 것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쌍화점>은 고려의 상층 내지 지배계층의 고질적 성적 비행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건국과 그것의 완성에 도움을
받으려고 조선 창업자들이 원래 있었던 동명의 속가를 지금 내용의 노래로 변개했든지, 아니면 새로 창작한 신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넷째, 세종과 성종, 중종 대에 몇 차례 논의되었던 가사 현전 속가의 변개 상황과 그 실정에 대하여 한번 살펴본다.
고려 말에는 음란성과 석교가 주 내용인 궁중 노래에 대한 질타와 비판이 일다가 조선 건국 초에는 오히려 이 내용에
대한 논란은 희미해지면서 상기에 언급한 것과 같은 방향의 속가 왜곡과정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세종,성종 대에 이르면서 그것의 왜곡 변개 방향과 양상은 건국 초의 입장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윤리적인
기준을 적용하면서 다르게 전개되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친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한 후 결국 자신이 왕 위에 오른 태종
때에는 이미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 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향수나 회고는 더 이상 조선의
존립에 위험이 될 수 없었다.
풍교에 도움이 되는 속가는 가려서 다시 쓰되, 그렇지 않은 것은 악장에서 제외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시기는 이성계가 나를 세운 1392년 전후가 아니라 국가의 체제와 기반이 확고하게 잡힌 세종이나 성종, 중종
대에 이르러서라 할 수 있다.
5. 결 론
조선의 창업자들은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고려 속가를 물리치지 않고 계속 악장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전래의 악장을
갑자기 혁파하기 어려운 사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정치적 활용과 필요성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성계와 정도전 등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들은 건국 후 고려 속가의 원래 내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건국과 수성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것을 왜곡 변개하거나,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했다고 여겨진다.
조선 창업자들이 건국 초에는 오히려 입부 고려 속가의 내용을 변개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나 조선의 국기가 튼튼
하게 다져진 세종이나 성종과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인 잣대가 아닌, 엄격한 유교적인 기준이나 도덕률에 의하여
변개나 폐지가 논의 되었다.
조선 건국 초 음설의 내용 쪽으로 산개가 가능하였고, 그 결과 고려왕과 관료층의 성적부패가 중심소재인 음설의 노래
<쌍화점>이나 <후전직작>과 같은 가요가 유교의 이념을 표방한 조선건국 초에 불려질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종과 성종, 그리고 중종 이후에는 오직 유교의 도덕률이 가치 결정의 잣대가 되었기 때문에 건국 초에는 별
시비 없이 사용된 음설의 노래가 배척의 대상이 되어 결국 다른 노래로 대체되거나 산삭 내지 변개를 당했다 할 수 있겠다.
Ⅳ. 속가의 애정 편향성과 그 배경
1. 서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속악의 가사’들, 즉 속가의 내용들은 보면 그 주체가 애정 편향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상대 가요들도 찬신적. 기원적인 내용이 아니면 거의가 남녀 연정을 노래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고려는 상대가요 시기보다 뒤인 향가시대의 신라보다도 더욱 뒷시대다.
인문의 발달은 문화적인 체질을 변전시켜 고대적 속성이나 성향을 벗어나게 했으므로, 고려시대의 속가가 애정 편향
적인 특성을 뛸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속가 내용이 어떤 까닭으로 애정 편향성을 띠게 되었으며, 그 주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몇 갈래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2. 속가와 민요 취택
속가는 아악. 당악과 함께 고려시대 악장으로 사용된 ‘속악의 가사’다.
아악과 당악이 중국의 음악인데 비하여 속악은 고려 자체의 음악으로 향악이며, 이를 토풍이라 하기도 했다.
속가의 내용이 애정 편향성을 띤 이유 중의 하나는 이것의 많은 수가 전문적인 개인 창작자에 의하여 지어지지 않고
애정요가 주류를 이루는 일반 민요에서 많이 취택되어 속악의 가사로 승화된 점을 들 수 있다.
고려는 역사 사회적 상황이나 구조, 그리고 고려 백성들의 성 의식상 특성 때문에 어느 시대보다 애정 민요가 많이
유행할 수 있었던 실정이었으며 이런 내용의 민요 중에 많은 수가 궁중 악장의 가사로 전용되었던 것이다.
민요 중에는 남녀상열의 노래를 취하여 속악의 가사로 사용함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위험부담도 없고, 무리도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사로 사용하기에 적당한 민단의 유행요를 즐겨 취택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충렬왕은 관현방 소속 태악재인을 갖고도 오히려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도에 생신을 파견하여 자색과 기예가 뛰어난
관기를 고르고, 또 가무에 능한 성중의 관비와 무당을 골라서 궁중에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가무를 담당케 했던 것이다.
이런 기녀들이 궁중으로 선발되어 왔기 때문에 대악서나 관현방의 악사와 악공들에 의하여 기예를 지도받기도 했으며
이런 기녀들이 잘 아는 각 지방의 애정요가 자연 궁중연행 때 많이 불려졌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이런 노래들은 궁중의 분위기나 기호에 부합되고, 악장에 알맞도록 가사의 내용과 형식을 손질하여 사용됐음이 분명
하다.
그러니 자연 고려의 속악들은 지금과 같은 애정 편향성을 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사』권71 악2 속악조에서 거론되고 있는 속악들의 명칭과 관련 기록을 보면 중앙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민요보다는 지방에서 불려진 유행요가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3. 왕과 嬖倖들의 연정가요 선호 경향
고려 후기 원 복속기의 왕들은 대부분 정도 없는 생활로써 왕의 체면을 잃고 있었다.
충선왕과 충혜왕은 이 방면에서는 너무 심했다. 충선왕은 성도착까지 한 왕이며, 충혜왕은 서모인 수비권씨를 강제로
간음하기도 했다.
왕들의 절도없고 문란한 행위는 궁의 분위기를 극단의 퇴폐적 경향으로 흐르게 했으며, 그래서 <이상곡>. <만전춘별사>.
<쌍화점> 같은 음설의 노래가 악장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원상. 석천보. 오기 같은 무리들은 성색으로 왕을 기쁘게 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들 자신이 필요에 따라 가요를 짓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각지의 애정요를 수집하여 악장으로 변개시켜 사용했던
것이다.
원래 속악의 악곡은 앞 시대로부터 계속 내려오는 것을 사용함이 일반이며, 가사는 새로 짓거나 유행하던 것을 취택하여
씀이 예사다. 이럴 경우 가사는 곡조에 의하여 제약될 수밖에 없으므로 취택된 가사의 변개는 필연적이다.
가요나 시 내용에는 어느 때나 사회생활의 중대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내용이 당연히 들어 있다.
가요나 시의 경향도 크게 보면 사회현상이며, 또 사회현상은 당시의 역사적인 현상의 한 반영이므로 속가가 고려의
당시 생활과 현실을 반영함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방의 기녀들이 익히 알던 지방의 노래들 중에는 애정요뿐 아니라 고려사회의 전반적 특징을 드러
내 주는 여러 방면의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왕의 성색을 맞추려는 위도에 의해 행신들의 주로 여정요만을 선택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4. 송 문화의 영향과 지배계층의 모방의식
속가가 애정 편향성을 띠게 된 가장 밑바탕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송 나라에 대한 고려의 초종 내지는 모방 정책의
성향을 들 수 있으며, 또 지식계층인 문인들까지도 이런 역사적인 추세나 흐름에 편승하여 그것을 본뜨려고 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래로 문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 문물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의 것을 많이 받아들였으며, 그것의 영향을
크게 입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고려초기에는 주로 당의 문물 제도가 들어왔으나, 중국 대륙의 판세에 따라 그 다음에는 송의 문물이 고려로 많이
유입되었다. 특히 고려 광종 때 봉책사를 따라 왔다가 고려에 머물게 된 후주인 쌍기의 진언에 따라 과거를 실시한
것은 고려의 문화적 특징을 고착시키는 데 획기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 고유의 국문학이 많이 위축되
었다.
과거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됨으로써 詩. 賦. 頌. 策과 易. 書. 詩. 春秋 등과 관련된 한문학이 일시에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은 성종 때는 중국 문화가 대거 수입되었으며, 이의 영향으로 국자감이 설치되어 한문학은 더욱 융성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나 상황은 그와 같은 흐름이라 하더라도 일부에서는 우리의 문학에 관심과 긍지를 갖고 이것을 영위
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 <보현십종원가> 11수를 지은 균여대사 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고려시대 국문학은 일부 특수계층이나 민중계층에 의하여 명맥이 유지됐을 뿐이다.
이런 고려의 전반적인 추세와 분위기에 반하여 균여대사가 향찰로 향가를 지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그 의의가 크다.
애호정신과 국문문학의 창작은 한문문학의 거대한 흐름에 견주면 대단히 미미했다 할 만하다.
특히 예종과 의종을 위시한 왕들이 빈번하게 벌인 시회 등으로 인하여 그나마 일부 상부계층에 의해 유지되던 국문학에
대한 관심은 끝없이 쇠미해져 국문학은 주변문학으로 역할하기도 어려운 반면, 한문학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더욱
흉성했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속악가사의 내용이나 성격. 새로운 가사의 창작에 관심이 있는 문인이나 혼탁한 사회분위기를 염려
하는 상층계층까지도 국문문학에 관심을 보일 수 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문문학의 성격과 내용 형성은 왕의 성색을 맞추려는 행신들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에
의하여 속악가사의 성격이 자연스레 애정 일변도로 굳어 갔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고려 궁중에서 사용한 악장 중 당악은 고려초기에는 좌부악에 속하여 있었는데 우부악에 소속된 향악과
더불어 고려 궁중음악의 2대 주류를 형성해 왔다.
이 당악은 송나라에서도 교방의 음악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의 당악이 고려에 전승됐을 것이므로 그 시가가 상당히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이 당악은 고려가 건국된 후 송과의 빈번한 문화 교류로 새로 등장한 송의 교방악을 도입함으로써 다른 양상으로 확대
전개된 것이라 보여진다.
송 교방악의 주류적인 내용과 분위기가 남녀의 애정 등 음설스러운 것이 많으므로 자연 이들의 지도를 받은 교방여기도
향악의 내용을 그런 쪽으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려 궁중에는 중국에서 도입된 구장기별기 등 당 가무악들의 내용이 유흥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비속한 내용을 많이 띠고 있으므로 이들의 직. 간접적인 영향으로 고려 궁중의 속악가사도 애정 편향성으로 많이 기울
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5. 당악의 영향
『고려사』악지 당악조에 나오는 당악정재 중에는 북송 시대의 사람으로 사 제작에 특히 뛰어난 우영의 작품이 8수나
들어 있다.
유영은 사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은 사람으로 그의 작품은 연정과 이별이 주를 이루며, 송 교방악의 가사로 많이 취택
되었다.
유영은 문재가 특출한데가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가무음곡과 술을 좋아한 사람이다.
그의 사 작품은 태평과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 성색을 주로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그는 교방에서 상연하는 노래 중 황제 송축의 악무에 사용되는 악곡의 가사를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앞에서의 언급과 같이 유영의 사 작품 내용은 북송 인종 때의 사치와 환락 풍조를 반영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사』 당악조에 보이는 유영의 사 작품 내용은 평소 그의 노래 분위기와 다리, 남녀의 애정만을 그린 음설스러움
일변도는 아니다. 이 중에 <하운봉>만의 일부가 염정과 취락에 대한 것이며, <우림령> 만의 가사 한 부분이 이별의
아쉬움에 대하여 노래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려사』 악지 당악조의 당악 내용을 보면, 유영의 사 작품보다는 다른 당악의 가사들이 오히려
남녀연정을 노래한 쪽으로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당시 중국이나 고려나 할 것 없이 교방악은 그 특성상 대부분 이와 같은 내용으로 경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고려의 조정은 그런 쪽의 내용들은 더욱 선호했을 가능성이 많다.
당악 <취태평>은 고려 속가의 중요한 모티브의 하나인 이별이 그 제재다.
자신을 떠나간 임을 못 잊어하면서 괴로워하는 심정은 <가시리>나 <동동> 등 이별의 한을 읊은 속가들과 같다.
단지 <가시리>나 <동동>처럼 시적 화자의 한을 승화시키려는 지극한 노력이나 애절함의 정도가 덜하다면 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이 갖고 있는 몸의 특징을 그려 내고 있는 이 <해패>영은 남자들이 여인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해학적으로 농지
거리를 늘어놓은 내용이다.
그 분위기가 마치 속가의 쌍화점과 같으며, 그것에 사용된 언어도 속어적인 맛이 크고 음설스러우며 표현수법은 직설
적이다.
6. 결론
속가의 애정 편향성과 그 배경에 관하여 논급한 것을 요약하여 결론으로 삼는다.
첫째, 속사는 정서 들 상층계층의 소수 인물이나 충렬왕조의 김원상을 비롯한 일부 폐행들이 창작한 것과 삼국 이래로
전래해 온 것 외에는 일반 민중계층들이 부르던 지방 민요에서 주로 취택되었다.
둘째, 고려후기 즉, 원 복속기에 지금의 속가가 집중적으로 생성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속가의 주된 향유층인 왕과 폐행들이 남녀상열적인 왕실 분위기를 조장하면서 그런 내용의 속가를
즐겼는데, 이와 같은 퇴폐적이고도 문란한 궁정의 분위기와 상황이 속가의 내용을 애정편향 쪽으로 많이 기울어지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셋째, 예부터 우리나라는 중국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려 때의 사정도 그와 같았다.
고려초기 광종 때의 과거제도 실시, 안향에 의한 성리학의 수입, 예종 때의 대성악의 전래 등이 그것이다.
문화나 사상면에서의 추종 내지 모방 의식도 강해 고려초기에는 성당이나 만당의 분위기에 경도되었고, 중기나 후기로
내려오면서는 위진 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을본받으려는 경향까지도 팽배했다.
그리고 송의 사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이규보. 이인로. 최자 등 문인들이 사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그런데 사문학은 송의 교방악인 당악이 주류이며, 이들의 내용은 남녀애정 쪽이 대부분이다.
이의 영향으로 속가도 애정편향성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넷째, 송의 사 작품 외에는 고려사 악지 당악조에 나오는 당악들의 내용을 보면 남녀상열인 것이 많은 편이다.
특히 <천추세>영은 만전춘별사와 그 내용이 아주 흡사하다.
그리고 <취태평>은 속가의 중요 모티브의 하나인 이별이 그 제재인데, <가시리>나 <동동>과 정서적으로 일치한다.
<해패>영도 속어의 사용이나. 해학적으로 농지거리를 늘어놓은 표현수법 등 여러 면에서 속가 <쌍화점>과 같다.
Ⅴ. 속가에 나타난 한의 양상과 형성배경
1. 서론
본고에서는 속가 중 <청산별곡>. <쌍화점>. <정읍사>. <정과정곡>. <만전춘별사>. <사리화> 등 여섯 작품을 대상
으로 하여 이들 작품에 응축되어 있는 한의 양상과 그 형성배경을, 그리고 그 한이 속가가 탄생하는 데 어떤 동력원
으로 작용했는가를 고구해 보고자 한다.
2. 한의 개념과 발생
역사와 무관한 대중현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 대중적 현상에서 비롯된 정서와 심리가 무학현상, 특히 민요의 내용을
많이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지에 국문학 작품 속에는 한이 주요 정서로 자리잡아 왔으며, 더구나 우리 민족
심성의 원형을 이루어 오면서 작품 형성의 동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예컨대, 상대의 가요인 <공후인>과 같은 고대 시가 등에는 잃어버린 임에 대한 개인의 아픔이 哀와 恨으로 응결, 승화
되어 우리들의 심성을 감발시키고 있다. 이 한의 정서가 속가인 <가시리>. <정읍사>. <서경별곡> 등 다수의 작품에
원형을 유지해 오다가 현대의 민요인 <아리랑> 등에 뿌리를 내려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속가가 악장이긴 하지만 원래는 대부분이 민요였으며 대체로 원 복속기에 집중적으로 취택되어 다양한 재창조
과정을 거쳐 악장으로 승화되었으므로 작품 속에 한이 많이 스며 있음은 필연적인 일이라 하겠다.
원래 한의 사전적. 외연적인 의미는 원한과 한탄이라고 볼 수 있다.
원한은 원통한 생각이며, 한탄은 원통하거나 뉘우침이 있을 때 한숨짓는 탄식이므로 한이란 말에는 원한. 한탄. 뉘우침.
한숨. 탄식. 소원. 불평. 허무감 등의 다양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한은 마음속에 응어리로 풀리지 않은 채 머물러 남아 있는 설움의 덩이이기 때문에 소극적인 정신작용만으로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 해소되지 않고 퇴적되어 있는 마음의 앙금이 여진처럼 폭발하여 예술로 승화된 것 중의 하나가 문학예술이다.
이는 한의 승화과정에 따른 바람직한 결과인 것이다.
승화가 어떤 충동을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간접적인 만족으로 옮겨 주는 요인으로 이해된다면 이 한의 승화도
하나의 심리적 충동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겠으며, 자기 구원을 위한 방어기제로 볼 수도 있다.
그만큼 한은 우리 민족에게만 국한된, 제한적이면서도 독특한 한국의 정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속가에 나타나는 한의 발생 원인을 기계적이며 단순한 사고의 틀로써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이 겪어 온 불안과 위축의 역사적 상황과 여러 환경적 요소, 그리고 이것들에 부수되는 여러 여건 등 복합적
요인에서 찾아야 되리라 본다.
3. 작품에 나타난 한의 양상과 형성배경
고려는 중세의 암흑기로 표현되듯이 실로 비참의 극을 달리던 시대였다.
특히 속가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여 악장으로 승화된 원복속기를 전후한 80여 년 간은 절망적이었으며 자주성을 상실한
암담한 시기였다.
고려 초부터 빈번한 외침과 내란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거란과 여진의 침략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도 컸지만 몽고군의 수차례에 걸친 친구는 큰 재앙이었다.
굶어 죽는 사람까지도 빈발하고 해골이 들을 덮었으며, 또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수탈이 극심하여 자식을 팔아 조새를
납부하는 일까지도 발생했다.
고려가 몽고의 속국으로 된 후에 고려의 여자를 강제로 징발해 가서 이것이 큰 사회의 문제가 되었는데,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에 이르기까지 80여 년 간 사적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 해도 진공회수가 50여 회에 달했다 하니 실제로 원에
공여로 끌려 간 고려의 처녀들은 더 많은 수에 달했다.
이런 사회와 역사적 배경 속에서 고려의 속가들이 집중적으로 형성되었으니 이는 테느나 생트 븨브가 밝힌 문학의 3
대 요소 중의 하나인 환경이 속가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러므로 속가에는 필연적으로, 한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통받는 민중은 한으로 맺혀 있는 그들의 절통하고 통분한 마음을 자위적 수단인 민요를 통해 삭일 수밖에 별다른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반항하고 저항하면서 열악한 삶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서양인들의 정신 구조와는 달리, 우리 민족은 반항하
거나 저항하지 않고 한을 품거나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속성이랄 수 있기 때문에 속가와 같은 ,한이 주조를 이룬
노래가 많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빈번한 내우외한과 지배계층의 혹독한 가렴주구 등으로 인하여 떠돌아 다녀야 했던 유민들과, 공녀제도라는 비인간적
인신착취 행위에 의하여 강요된 이별을 많이 당해야 했던 고려후기 민중계층의 비극적인 정서가 깔려 있던 민요에
기반을 두 속가가 주류를 이루므로 필연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1) <청산별곡>과 막힌 현실로 인한 백성들의 한
<청산별곡>에는 고려 백성들이 겪은 절대 고독과 비극적 상황이 배어 있는데 이 점에서는 가시부전의 속가인 <사리화>와
도 통한다.
그러나 <사리화>는 이민족의 침략에 의한 통고를 표출하려는 작품이 아니라, 탐관오리의 수탈과 탐학을 참새가 다 지어
놓은 곡식을 WH아먹는 것에 비유한 노래인 점에서 <청산별곡>과 다르다.
먼저 1연을 보자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일랏다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에서의 청산과 바다는 고난스러운 현실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이상향과 같은 곳이 못 되며, 오히려 현실의
열악함을 강조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주려 죽을지도 모르는 청산이나 바다로 가야 될 만큼 현실은 절박했던 것이다.
<청산별곡>의 전 내용이 어둡고 비극적인 사회. 역사적인 상황을 읊고 있지만 그 중 5연은 더욱 그렇다.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체계가 허물어진 파행적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 불행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와는 전혀 무관
하게 오직 사회 상황에 의해서만 좌우될 뿐이다.
그 예로 고려후기의 사회가 가장 좋은 본보기인데 당대의 이런 사정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연이 5연이라 볼 수 있다.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
은원의 관계도 없는 처지인데, <청산별곡>의 화자는 구가 어디서 던진지도 모르는 돌에 맞아서 울어야 한다.
돌은 고려의 일반 민중들에게 위해적 요소가 되는 불합리한 제반 여건과 열악한 사회. 역사적 상황 등을 지칭한다.
난이 중첩되었던 고려시대에 민중들에게 엮이어진 삶의 여건은 당대의 민중들에게 한스러움의 감정을 충분히 야기
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이 노래의 화자는 어쩔 수 없이 삶의 현장을 떠나 청산과 바다에라도 가고다 한 것
이다.
따라서 <청산별곡>의 5연도 비참한 고려 민중의 삶을 대유적으로 표현한 가요의 한 연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청산별곡>은 개선할 수 없는 현실에서 발생한 한의 정서가 기저를 이룬 고려 백성들의 절규의
노래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현실이 개선되고 그들 자신도 구원되기를 바라는, 절실한 염원이 응축된 가요라 볼
수 있다.
2) <쌍화점>과 성적 희생으로 인한 여성들의 한
이 노래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방일했던 고려시대 여러 계층의 남성들에 의하여 성적으로 착취되고 희생된 고려 여성
들이 부른 한의 노래로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의 희생자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몸짓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을 품고서도 인고하며 살든지,
아니면 자결하는 등의 적극적인 도피행위를 통해 그저 세상에서 사라지는 예가 많았다.
<쌍화점>의 여성화자는 회회아비로 대표되는 외국인, 승려와 용으로 대유된 왕과 지배계층, 그리고 술지아비로 표현
되고 있는 무뢰배들에 의하여 성적 착취를 당했다.
이렇게 볼 때, 이 노래는 그렇게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졌으면서도 저항하지도 못하고, 또 저항할 수도 없었던 억울한
처지의 고려 여성들이 내지른 자탄의 노래요, 한숨의 가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雙化店에 雙化사라 가고신된
回回아비 내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삼미 이 店밧귀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광대 내마리라 호리라
더려듕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자리에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귀잔듸 가티 덤ㄱ거트니 업다
1연은 이와 같이 고려 여인이 만두집에 가서 외국인인 회회아비에 의하여 성적 수모와 희생을 당한 사실을 암유적
으로 폭로하면서 회학적으로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쌍화점>에서는 이 1연과 같은 성적 수모 현상이 2연과 3연, 4연 등에도 착취하는 대상만 바뀌어진 채 반복적
으로 노래하고 있다.
즉 2연에서는 삼장사에 공덕을 닦기 위하여 연등하러 간 부녀자의 손목을 그 절 사주가 잡았다.
그리고 3연에서는 우물의 용이 비유될 만큼 못된 왕 등 특수계층이 물을 길러 간 여인의 손목을 잡았으며, 4연에서는
술을 사러 간 여인의 손목을 술집아비가 잡은 것이다.
그 외 4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술집아비로 대표되는 무뢰배들에 의한 비행도 잦았다.
그 좋은 예가 충숙왕 때 원윤 신여계의 아내 김씨가 불량배에 의하여 납치된 사건과 충혜왕 때 불량배 몽골의 무리가
주부 공보의 집에 들어가 그 아내를 강탈한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벼슬아치의 아내들도 불량배로부터 이러한 수모를 당할 지경이니 일반 서민 여성들의 경우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위와 같은 비도덕적 반윤리적인, 상도를 벗어난 여러 행동과 상황이 고려 여성들로 하여금 한의 정서를 쌓이게
했으며, 이런 깊은 한이 <쌍화점>을 자연스레 형성하게 했던 것이다.
3) <정읍사>와 행상인 처의 한
<정읍사>의 정서는 이별의 정한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상 간 남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달밤에 산석에
올라가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문헌은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읍사>는 <치술령곡>. <공무도하가>. <가시리>. <서경별곡>. <만전춘별사> 등 이별이 제재로 된
노래와 본질적으로 동궤의 가요인 것이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귀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다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귀야 즌되를 드되욜세라
어귀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귀야 내가논되 졈그랄세라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는 망부석 설화를 수반하고 있다.
여자에게 맺혀 있는 이별의 한이 여자로 하여금 돌이 되게 한 것이다.
한은 그만큼 그것을 간직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변화를 수반케 하는 강렬한 정신적 작용이 된다.
한이 맺혀 죽은 여자가 뱀이 되거나 원귀가 되는 모티브도 우리나라의 설화에 대단히 많다.
그만큼 한의 속성은 내재적이며 여성적인 것이다. <정읍사>에 나오는 행상인의 처도 그렇게 애를 태우며 언제나 기다
림에 지칠 바에야 차라리 한이 맺혀 스스로 돌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에게 자신의 사랑을 영원히, 또는 변함없이 전달할 수 있었을 테니까.
4) <정과정곡>과 정서의 한
속가는 원래 민요적 속성이 짙다. 민요로서의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민중이 갖는 애와 한의 정서가 작품의 밑바탕을
이루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작품의 한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공동적이고 집단적이며
민족적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과정곡>은 상실과 좌절로 인한 개인의 처절한 한의 정서가 작품의 기저를 이루는 점에서 다른 가요들과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정과정곡>을 창작한 정서는 고려 제 17대 인종과는 동서 사이로 궁중에서 막강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 음사로 환로에 나아가 벼슬이 정 5품 현직인 내시랑중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의종 5년 정함과 김존중 등 폐신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동래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사실 그가 동래로 귀양가게 된 이유는 반대파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정서와 위종과의 관계 등 당시의
복잡한 궁정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정서의 유배는 위종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의종이 조정 대신들의 논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보낸 귀양이 아니고 의종 자신이 그와 같은 조정의 사정을 핑계 삼아
정서를 동래로 귀양보낸 것이다.
내님믈 그리자롸 우니다니
산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달 아으
잔월효성이 아라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되 져려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과도 허믈도 천만 업소이다
말힛 마러신뎌
살웃부텨 아으
나미 나를 하마 니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정서는 <정과정곡>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한의 화신으로 변모시켜 원과 한의 대표적 상징물인 ‘접동새’에 자신을 비유했다. 그런데 피눈물을 뿌리면서 절규하는 접동새인 자규는 중국에서도 촉나라 망제의 혼이 변하여 된 새라 하여 비극적인 사연을 간직한 한의 새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한 맺힌 여러 민간 설화에도 자규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 새에다가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5) <만전춘별사>와 堪耐하는 여인의 한
이 노래는 원래 민요인데, 민요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정에 관한 내용을 노래한 게 주류를 이룸이 일반적인 현상이라
고 볼 때, <만전춘별사> 또한 그렇다.
특히 고려와 같이 이완된 성 의식이 풍미하거나 비극적 정황에 의해 강요된 이별이 많았던 시대는 한의 정사가 서린
여정요가 많이 발생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어름우희 댓님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 만뎡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 만뎡
졍둔 오날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이 노래에서 시적 화자는 임과의 헤어짐을 죽음보자 더한 괴로움으로 읊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얼음 위에서 대잎으로 자리를 보아 임과 같이 얼어 죽어도 좋으니 이 밤이 더디 새었으며 좋겠다고 처절
하게 노래한 것이다.
죽음보다 저한 불행과 비극은 없다고 생각함이 일반적인데 이 작품의 시적화자는 임과 이병하느니보다는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와자 혼자의 염원일 뿐이다.
그래서 화자가 이렇게 생각하는데도 임은 자신의 곁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고, 실제로 떠나 버렸다.
이러한 이별의 상황을 대하는 임의 의지는 시적화자와는 아주 다르다.
즉 같이 죽음으로써 영원히 하께 있자는 자신의 바람을 저버리고 임이 자신을 떠나감으로써 일차적으로 한의 정서가
유발된 것이다.
<만전춘별사>의 화자는 둘째 연에서 이별에서 오는 슬픔의 양이 너무 컸으므로 오히려 활짝 핀 복숭아 꽃이 봄바람을
희롱하면서 웃고 있다는 식의 역설적 정서를 나타냈다.
슬픈 감정에 젖은 자신의 처지로 보면 응당 복숭아 꽃이 우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임을 잃은 슬픔의 감정이 극대화
되어 주체할 수 없는 심리적 상태에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6) <사리화>와 과중한 세금으로 인한 백성들의 한
<사리화>의 부대기록을 보면, 이 노래는 무거운 세금과 관리들의 착취에 시달림을 받고, 그들 때문에 재산의 해를
입은 백성들이 부른 노래인데,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 것에 비유해 원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래의 문헌기록이 말해주듯 <사리화>를 부른 백성들은 그릇된 징수제도나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원망했던 것
이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원망이라기보다는 나라나 관리들에 대한 백성 전체의 원망이다.
그런 만큼 <사리화>에서의 한은 집단적이며, 외부의 억압에 의하여 형성된 힘으로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정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려 민중의 가슴 속에 응혈로 잔류하여 결국 한을 형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개인이 창작한 가요가 아니다.
부과되는 세금의 번중함과 재산이 관리들에 의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탈취당함에 한이 응결되어 부른 일반
백성들의 노래다. 그래서 이 노래의 부대 설명에도 그러한 일들을 노래로써 원망했다고 했다.
익재가 시를 지어서 이를 풀이하였다고 했는데, 풀이한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부리 누른 참새는 어디에서 왔다가 날아가는가
일년 농사지은 일 아랑곳 하지 않고
홀아비 늙은이가 혼자 손으로 갈고 매고 했건만
배와 밭 가운데의 수수를 다 없애버렸다네.
<사리화>는 민요이므로 어느 한 시대의 백성들에 의하여 노래로 불려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려후기인 원복속기에 속가의 대부분이 형성되었다면, 이 <사리화>의 형성도 이와 같은 시각에 맞추어서
이해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 과다한 세금에 관한 불미스런 일들이 고려 전 시대에 걸쳐 많았으나 여기서는 고려후기에 국한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왕으로서 재산 모르기에 급급한 왕은 원 지배기이 충혜왕이 으뜸일 것이다.
그는 폐신을 여러 도로 보내어 직세를 과다하게 부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피하여 산과 바다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가 하면 음란하고 방봉하며, 또 무도하면서도 재리를 계산하는 데 치밀하였으며, 남의 토지와 인민을
빼앗아서 그것을 모두 보흥고에 소속시켰다. 이로 인하여 온 나라가 소란했다.
국가에서 부과하는 가혹한 세금과 토호들의 착취가 제도적 장치에 의해 어떠한 걸림도 없이 자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했으므로 결국 고려 조종의 법이 다 무너지고 급기야는 나라가 망하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 시대적 상황이고 보니, 힘없는 백성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사리화>와
같은 노래가 자연스레 형성되어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것이다 생각된다.
4, 결론
한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본래적이며 항구적인 정서의 하나로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어느 한 시대의 특정 정서로 한정시킬 수 없으며, 그 의미를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체질화된 정서 중의 하나로 자리해 오고 있으며, 어떤 억압적 계기나 심각한 갈등과 좌절
등으로 언제든지 촉발되는 성향을 갖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한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공유하고 있는데, 어두운 측면으로는 소극적. 부정적. 체념적. 속성을 들 수 있고,
밝은 측면으로는 적극적. 긍정적. 진취적 속성을 들 수 있다.
전자는 퇴행적. 파괴적이어서 자신과 남을 불행으로 몰라 넣어 파멸시킬 수 있다.
그러함에 반하여 후자는 문학이나 다른 건전한 창조활동을 하게 되어 자신과 남에게 보탬이 되게 한다.
이는 한의 승화로 인한 바람직한 창조의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한의 밝은 면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역동적인 힘의 원천으로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창조적 예술 행위가 한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속가의 대부분도 이와 같은 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속가에는 민요적 색체가 짙은 노래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정서인 한이 중심정서임을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고려시대의 민중들은 질곡의 역사 속에서 한스러운 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쌍화점>은 고려시대 왕과 승려 등 상층계층에 의하여 자행된 성적비행과 그것으로 인하여 성적 수모를 당했던 여성
들의 한이 중심 정서이다.
<정읍사>는 행상인의 처가 작자로 되어 있는 노래로서, 남편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이 밑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노래다.
<정과정곡>은 정서가 의종 5년에 동래로 유배되고, 의종 11년에 거제로 재유배되면서 촉발된 개인의 한이 기본정서다.
<만전춘별사>는 고려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전도된 성 의식과 사회적 혼란 속에 살면서 원치 않은 이별을 당했던 여성의
한의 중심 정서다.
<사리화>는 과중한 세금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한이 기본정서다.
무거운 세금과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림을 받고 피해를 입은 백성들이 부른 노래인데 이런 유형의 민중 노래가 고려
시대에 많았을 것이나 비판적이고 충자적인 내용 때문에 전해지는 것은 극히 적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