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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집’에 대한 어휘사적 고찰
1. 서론
2. ‘겨집’에 대한 연구사
1) ‘겨’에 체언성을 부여하는 분석
2) ‘겨’에 용언성을 부여하는 분석
3. ‘겨집’의 생성 시기
4. 결론
참고문헌
1. 서론
‘겨집’은 이른 시기부터 국어사와 어원론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어온 어휘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어휘에 대한 통시적 연구는 특정한 의미역을 가지는 어휘 집단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겨집’의 경우는 그 자체만으로도 독립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 그동안 적잖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와 같이 ‘겨집’이 독립적인 연구 대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초기에 제기된 어원 분석의 특이성 때문
이다.
金亨奎(1949:194)에서 ‘겨집’을 ‘겨-’[在]와 ‘집’[家]의 결합으로 분석한 이후 이러한 분석의 타당성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집중되면서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된 것이다.
金亨奎(1949:194)의 분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겨-’[在]와 ‘집’[家]의 결합이 다른 합성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론적 구조와 의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용언 어간과 체언이 순차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용언 어간이 부사어 논항에
선행하여 결합하는 구조는 국어의 다른 합성어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매우 특이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겨집’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형태론적인 면에 치우쳐 어원 문제와 함께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살펴본다면, 의미적 특성이나 형태적 특성 외에, 기존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의미 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기존의 연구가 다소 제한된 부분에 한정되어 진행된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겨집’에 대한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겨집’은 어원적인 특이성 때문에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 어휘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정리해 놓은 연구사가 제시되지 않아 그동안의 다양한 논의를 접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본고는 그동안 ‘겨집’의 어원적, 형태론적 분석과 관련하여 어떠한 논의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한편, 이와 더불어 기존의 논의가 어떠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 세밀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둘째는 어휘사적인 측면에서 이 어휘의 생성 시기를 추정하는 것이다.
‘겨집’의 생성 시기는 이전의 논의에서 간단하게 언급된 바 있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로까지
발전되지는 못했다.
본고는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음운적, 형태적 단서들을 제시하고 이를 의미 있게 해석하는 방법
으로 어휘사적인 측면에서 좀더 복합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이 어휘의 생성 시기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2. ‘겨집’에 대한 연구사
‘겨집’에 대한 연구는 조어론적인 측면에서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어휘의 구조를 체언과 체언이 결합한 구조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이 어휘의 구조를 용언
어간과 체언이 결합한 구조로 보는 것이다.
즉 첫째 부류는 ‘겨집’의 ‘겨’가 체언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고 둘째 부류는 ‘겨집’의 ‘겨’가 용언
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1) ‘겨’에 체언성을 부여하는 분석
‘겨’가 체언성을 갖는다고 주장한 논의로는 洪起文(1934), 白南雲(1937:53), 이탁(1967), 徐廷範(1969),
徐在克(1968)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이른 시기의 논의인 洪起文(1934)는 ‘겨집’을 ‘제’[自]와 ‘집’[家]의 결합으로 보았다.
‘제 아비, 제 어미’에서 ‘제’가 ‘지’로 변할 수 있는 것같이 ‘제’가 ‘게’로 변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1).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어원적으로 두 어휘를 비교할 때는 접근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이른 시기의 어형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洪起文(1934)는 고어가 아닌 현대국어로서 ‘제’와 ‘게’를 단순하게 비교한 것이다.
‘제’와 ‘게’를 중세 국어에 대응시키면 ‘제’와 ‘겨’가 되므로 어원론적인 비교 대상은 실제로는 ‘제’와 ‘겨’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중세 국어에서 ‘저’의 주격과 소유격이 모두 ‘제’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이 ‘제’가 주격으로 사용된
것인지 소유격으로 사용된 것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1) ‘제’가 ‘게’로 변할 수 있다고 본 것은 당시의 표기법 때문이다.
지금은 ‘계집’이라고 표기하지만 당시에는 ‘게집’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에 ‘제’가 ‘게’로 변할 수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다행히 이 둘의 방점 표기가 달랐기 때문에 방점 표기를 통하여 격의 차이를 쉽게 구별할 수 있는데,
중세 문헌에서 주격의 ‘제’는 점이 두 개인 상성으로 실현되었고 소유격의 ‘제’는 점이 없는 평성으로
실현 되었다.
그런데 洪起文(1934)에서 제시한 ‘제’는 소유격이므로 비교 대상인 ‘겨’도 평성을 가지고 있어야 관련
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국어에서 ‘겨집’의 ‘겨’는 일관성 있게 상성으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처럼 ‘제’와 ‘겨’가 성조면에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중세 국어 시기에 ‘제’가 이중모음을 가진 /cǝj/였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ǝj/가 /jǝ/로 변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래에서 徐廷範(1969)의 논의를 살필 때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중세 국어 이전 시기에는 이러한 변화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외에 초성 ‘ㄱ’과 ‘ㅈ’이 교체되는 문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洪起文(1934)의 분석은 선구자적인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뒤를 이어 白南雲(1937:53)은 ‘씨집’[種巢]이라는 단어가 전와(轉訛)되어 ‘게집’이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 국어에서 [種]을 의미하던 어휘는 ‘’였는데, 이 ‘’와 ‘겨’를 대응시키는 데 상당히 많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金亨奎.1949:196).
이 때문에 이 견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이탁(1967), 徐廷範(1969)이 ‘겨집’을 ‘갓’[妻]과 ‘집’[家]의 결합으로 분석하는
주장을 펼쳤다. 이탁(1967)은, 결혼할 때 여자가 부모로부터 집을 받아 그 집에서 배우자를 맞이하던
모권 시대(母權時代)의 사회상이 이 단어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갓집’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면,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갓의 집’[妻家], 즉 ‘처갓집’
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구성이 단순히 [妻]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갓집> 겨집’에서 발생하는 음운 변화 역시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이러한 음운론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徐廷範(1969)는 ‘*거시집> *거이집> 겨집’의 변화를 추정하였다.
모음 도치에 의해 ‘겨> 게’의 변화가 발생하듯 ‘거이> 겨’의 변화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통시적으로 하향이중모음이 단모음화되는 근대 국어 시기에 남부 방언을 중심
으로 주로 발생한 현상이다.
‘ㅔ’가 단모음화되지 않은 중세 국어에서는 ‘ㅕ’와 ‘ㅔ’의 교체 현상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하향이중모음의
음가가 유지되었던 그 이전 시기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현상은 단순한 음운 도치가 아니라 이중모음의 단모음화 현상에 의해 나타나게 된 근대 국어 시기의
새로운 변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妻]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갓’에 ‘집’[家]이 결합하여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妻]라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설명은, 이 단어가 아무리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형태․의미적인 면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분석으로 徐在克(1968), 李元祚(1977)등의 논의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2).
2) 李元祚(1977)은 필자에게 굉장히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 논문의 내용이 徐在克(1968)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두 논문의 차이점이 있다면 제목이 다르다는 점, 徐在克(1968)에서 인용한 姜吉云(1959)의 ‘겻’을
李元祚(1977)에서 ‘껏’으로 잘못 베꼈다는 점, 李元祚(1977)이 徐在克(1968)을 베끼면서 이 논문의
4.4.3 첫 단락과 4.4.4, 4.5 부분은 제외했다는 점뿐이다.
徐在克(1968)은 ‘겨집’을 ‘결’[族]과 ‘칩’[篋]의 합성으로 보고 그 원래 의미를 ‘혈족을 생산하는 주머니’
로 보았다3).
이처럼 ‘결칩’이 ‘겨집’이 되기 위해서는 ‘ㄹ’이 탈락하는 현상과 ‘ㅊ’이 유기성을 잃는 현상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徐在克(1968)은 ‘ㄹ’이 탈락하면서 보상적으로 장음화가 되어 ‘겨’가 상성이 된 것으로
보고, 그 예로 ‘돌-’[廻]이 단음임에 비해 ‘ㄹ’이 탈락한 ‘도다녀오다, 도지다, 도서다’ 등에서는 ‘도’가
장음임을 들었다4).
이 어휘들은 중세 국어 이후의 문헌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성조를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후대에 장음
으로 실현된다는 점을 참조한다면 원래 상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때 실현되는 상성이 일반적인 상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金完鎭(1973:53∼56)은 자음 앞에서는 상성으로 실현되고 모음 앞에서는 평성으로 실현되는 성조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성조를 ‘유동적 상성’이라 하였다.
그런데 ‘돌-’[廻]은 이와 같은 유동적 상성을 가진 용언 어간이다.
따라서 ‘도다녀오다, 도지다, 도서다’의 ‘도’에서 실현되는 장음은 보상적 장음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조 본래의 특성에 의한 현상일 뿐이다.
이처럼 ‘ㄹ탈락 현상’이 장음화, 즉 상성을 유발한 것이 아니므로, 결국 성조가 일치하지 않게 되어 ‘겨’와 ‘결’[族]을 관련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문제는 어휘적인 면에서도 발견된다. ‘결’[族]이란 단어는 친족어 중에
3) 徐在克(1968)은 그 기저형을 /kjǝɮV-ʧip/으로 보았는데, /r/과 /l/이 고대에 설단유성측면마찰음 /ɮ/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ㄹ’의 기저 표시를 /ɮ/로 하였다.
이처럼 ‘ㄹ’을 유성마찰음으로 본 것은 ‘ㅊ’ 앞에서 ‘ㄹ’이 탈락하는 현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ㄹ’이 아무리 유성마찰음이라고 해도 치경음 앞에서 탈락하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설명하지는
못하므로 ‘ㄹ’에 대한 음가 추정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4)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겨레’의 ‘겨’가 평성이기 때문이다.
서도 상위 개념에 속하므로 어느 정도 사회 의식이 발달된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위 개념어가 출현하기 전에 이미 보다 구체적인 친족어들, 즉 [男], [女], [父], [母], [夫],
[婦], [妻], [子]의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겨집’을 ‘결’[族]과 ‘칩’[篋]이
결합한 합성어로 보더라도 이 단어가 생성되기 이전에 [女]나[妻]를 의미하는 별도의 단어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
그런데 이렇게 어느 정도 의식이 발달된 사회에서 여성을 ‘혈족을 생산하는 주머니’란 의미로 불렀으리
라고는 쉽게 생각하기 어렵다.
게다가 고대 사회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이전 사회가 지금과는 달리 모계중심의 사회였던 점을 감안
한다면 여성을 단순히 도구로 보는 이러한 명칭이 가능했다고 보기 어렵다.
같은 인식이라 하더라도 ‘혈족을 생산하는 어머니’라는 의미를 살려 단어를 만들었다면 모계 중심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지만, ‘주머니’란 도구를 사용하여 의미를 만들어 냈다면 이는 남성 중
심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계 사회의 전통이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어휘의 생성 시기와 의미 해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문제가 발견되는 것이다.
5) 金亨奎(1949:192)는, ‘가시’와 ‘겨집’이 다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그 중 가시 계통의 말은 차차
세력이 약해지고 겨집 계통의 말은 보편화해 가는 것을 통해 ‘가시’가 오래 된 것이고 ‘겨집’은 그 이후에
나온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이것만 가지고는 전후 관계를 결정지을 수 없다며 Gilliéron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정치 문화
의 중심지인 중선(中鮮) 지방에서 사용되는 어휘 ‘계집’보다 변방인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북부에서 사용
하는 ‘가시’ 계통의 말이 더 오래 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논의 중에서 방언을 근거로 한 주장은 오히려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어휘의 세력만을 두고
봤을 때에도 ‘겨집’이 비교적 후대에 생성되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한편 劉昌惇(1954)는 ‘겨집’의 의미를 ‘在家人’으로 보고, 이 어휘가 남녀의 활동 범위가 각기 외부와 가내
(家內)로 고정화된 이후에 생겨난 칭호이므로 이 어휘를 원시어(原始語)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2) ‘겨’에 용언성을 부여하는 분석
‘겨’가 용언 어간이라고 주장한 논의로는 姜吉云(1959b), 金亨奎(1949,1956), 劉昌惇(1954, 1966),
崔昌烈(1986:298) 등이 있다.
먼저 姜吉云(1959b)의 견해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姜吉云(1959b)는 ‘겨집’을 ‘겻-[在] + -이-(매개모음) + -ㅂ(명사전성어미)’의 결합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분석을 위해서는 몇 가지 사항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첫째로 ‘ㅅ’이 ‘ㅈ’으로 바뀌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며,
둘째로 매개모음 ‘이’와 명사전성어미 ‘-ㅂ’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언 어간 ‘*겻-’을 재구해 내는 일이다.
姜吉云(1959b)는 「三國史記」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토대로 ‘月城’과 ‘在城’을 대응시키고 이를 통해
용언 어간 ‘*겻-’을 재구해 냈다.
(1) 初赫居世二十一年 築宮城 號金城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步
新月城北有滿月城 周一千八百三十八步又新月城東有明活城 周一千九百六步 <三國史記 34: 雜志3 地理1>
姜吉云(1959b)는 ‘月’의 음가를 /giɒt/로 재구하고, 이를 [在]의 의미를 갖는 용언 어간의 발음으로 보아 ‘在’를 ‘*겻-’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때 과연 ‘在城’을 차자표기로 볼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三國史記」에서 ‘或號’라는 표현은 위의 예문 외에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개 지명에 대한 차자표기가 제시될 경우 다음과 같이 ‘本’을 사용하거나 그 외의 경우에는 ‘一云, 或云,
一作’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2) 永同郡 本吉同郡 <三國史記 34: 雜志3 地理1>
買忽 一云 水城 <三國史記 37: 雜志6 地理4>
居柒夫 或云 荒宗 <三國史記 47: 列傳4>
習比谷 一作 呑 <三國史記 37: 雜志6 地理4>
李炳銑(1982a)는 ‘一云, 或云, 一作’이 복수 지명을 보여 준다 하여 이들을 복수표기라고 하였는데,
이 복수표기들은 한자식 지명과 고유어 지명을 대응시켜 보여 주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이 동일 지역에
대한 단순한 발음 차이나 명칭 차이를 보여 주는 경우가 더 많다.
(3)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 一云 鄒牟 一云 衆解 <三國史記 1: 高句麗本紀1>
祇摩尼師今立 或云 祇味 <三國史記 1: 新羅本紀1>
客連郡 客 一作 各 <三國史記 1: 新羅本紀1>
따라서 (1)의 ‘號月城 或號在城’은 당시 사람들이 두 가지 명칭을 가지고 있어서 ‘月城’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在城’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月城’을 한자식 표기로 보고 ‘在城’을 차자표기로
보아 이 둘을 대응시켜 용언 어간 ‘*겻-’을 재구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姜吉云(1959b)는 다음과 같은 「鷄林類事」의 내용을 통해서도 ‘*겻-’이라는 용언 어간을 재구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4) ㄱ. 日曰 姮
ㄴ. 月曰 契 黑隘切
‘月’의 국어음과 중국음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月’에 대한 당시 고려시대의 발음인 [겯]을 ‘契’로 표기
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契’에 대한 당시 중국 발음은 [겯]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黑隘切’이라는 반절 표시를 토대로
음가를 재구하면 ‘契’의 발음은 [겯]이 아닌 []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발음의 불일치는 ‘姮’과 ‘契’를 맞바꿀 때 간단하게 해결된다.
즉 (4ㄱ)과 (4ㄴ)의 전사 표기가 서로 뒤바뀐 것이다(陳泰夏. 1974:250,姜信沆. 1980:31). ‘日’에 대한
전사 표기가 ‘契’이고 ‘月’에 대한 전사 표기가 ‘姮’이라고 보면 그 해독이 중세 국어 및 현대 국어와 일치
하게 된다.
이처럼 용언 어간 ‘*겻-’의 존재가 불명확하므로 ‘겨집’의 ‘겨’가 용언어간 ‘*겻-’에서 유래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ㅅ’과 ‘ㅈ’의 교체나 매개모음 ‘이’와 명사전성어미 ‘-ㅂ’의 존재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
하다6).
다음으로 ‘겨집’을 ‘*겨-’[在]와 ‘집’[家]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견해는 金亨奎(1949:194, 1956), 劉昌惇(1954,1966), 崔昌烈(1986:298) 등에서 제시되었는데,
이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형태론적인 결합 방식이다.
이에 대해 김형규(1956)은 스스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5) ㄱ. 용언의 어간이 그대로 체언 앞에 올 수 있는가?
ㄴ. 용언이 앞서고 체언이 뒤에 따르는 언어 구성이 우리말에서 가능한가?
ㄷ. ‘계집’(女子)이란 말을 ‘在’와 ‘家’의 뜻을 가진 말에서 이루어진 ‘계집’과 연결시킬 수 있는가?
이 중 (5ㄱ)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뜨물, 꺾쇠, 닿소리, 접칼, 덮밥, 튀밥’ 등 많지는 않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러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어휘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6) 姜吉云(1959b)는 명사전성어미 ‘-ㅂ’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로 ‘[結子], 가깝[鬱, 疲勞],
트집’ 등을 제시했는데, 이에 대해 徐在克(1968)은 두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첫째는 ‘겻+이+ㅂ’의 결합이 ‘겨습, 겨십, 겨, 겨, 겨즙, 겨집’ 등 다양한 이형태를 가질 수 있는데,
현대 국어의 방언에서조차 이러한 이형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둘째는 ‘-Vp’가 결합할 때 폐쇄음의 영향으로 선행하는 음절의 mora에 영향을 주어 그 음절의 길이를
위축시킬 수 있는데, ‘겨집’에서는 ‘겨’의 상성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문제는 (5ㄴ)과 (5ㄷ)을 종합하여 ‘VStemN’이 ‘N에 VStem하는 것’이란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위에서 제시한 어휘들은 각각 ‘뜬 물, 꺾어진 쇠, 닿는 소리’와 같이 ‘∼하는 N’이나 ‘∼한 N’의 의미구조를
가질 뿐 ‘N에 ∼하는 것’이란 의미 구조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이러한 문제는 姜吉云(1959b), 徐在克(1968) 등에서 이미 심각하게 제기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劉昌惇(1966)은 ‘신발, 감발’ 등의 어휘를 근거로 제시하였다.
‘신발’은 ‘발에 신는 것’, ‘감발’은 ‘발에 감는 것’으로서 모두 ‘N에 ∼하는 것’이란 의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徐在克(1968)은 ‘신발, 감발’도 ‘신은 발, 감은 발’에서 축소되어 만들어 진 것이라고 반박하였지만, 이는
적절한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신은 발, 감은 발’에서는 핵이 ‘발’에 있기 때문에 뜻하는 바가 ‘발’의 일종이 되어야 하지만, ‘신발, 감발’은 ‘발에 ∼하는 것’이란 의미를 가질 뿐 발의 일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발, 감발’은 형태, 의미면에서 ‘겨집’과 같은 유형에 속하는 어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어휘는 ‘겨집’을 ‘*겨-’[在]와 ‘집’[家]의 결합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예가 극히 드물고 ‘신발, 감발’이 모두 특정한 어휘인 ‘발’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구성상의 보편성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무언가 다른 근거 자료가 보충되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세 국어에서 다음과 같은 통시적인 변화가 눈에 띈다.
(6) ㄱ. 남진과 계집과 서르 호미 綱이니 <蒙山和尙六度普說諺解 9a>
림시 락안군 최극부의 계지비러니 <三綱行實圖 烈女圖:33a>
ㄴ. 須슈彌미山산 우 테 忉利天에 계신 帝釋과로 사홈 사호거든 <蒙山和尙六度普說諺解 10b>
셕연분이 님금 계신 듸 고의라 사 브려 님금 엳오<三綱行實圖 忠臣圖:17a>
(6ㄱ)과 (6ㄴ)은 각각 ‘계집’과 ‘계시다’가 중세 국어 문헌에서 발견되는 예이다.
그러나 1460년대 이전의 문헌에서는 ‘겨집’, ‘겨시다’와 같은 표기만 발견될 뿐, ‘계집’, ‘계시다’와 같은
표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460년대 무렵에 ‘겨집> 계집’과 ‘겨시다> 계시다’와 같은 변화가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문헌 표기상의 차이이기 때문에 시기를 정확히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겨집, 겨시다’가 구형이고
‘계집, 계시다’가 신형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이모음역행동화 현상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모음역행동화 현상은 개재 자음이 치경음이나 경구개음일 경우에는 적용되지 못하는데, 이들 어휘의
개재 자음은 ‘ㅅ’과 ‘ㅈ’으로서 이모음역행동화 현상이 봉쇄되는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7).
게다가 이모음역행동화 현상은 하향이중모음이 단모음화된 이후에야 가능한 현상이기 때문에 중세
국어 시기에 이러한 현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적용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도 이모음
역행동화 현상이 적용된 것처럼 보이는 어휘로 ‘귀더기, 굇고리’ 등이 존재하는데, 이모음역행동화 현상이
적용된 것이 아니라면 현재로서는 단순하게 /i/가 첨가된 현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동석.
2002a:229∼245).
7) 치경음이나 경구개음 중 유일하게 ‘ㄹ’은 움라우트 현상의 적용을 봉쇄하지 않는다.
‘데리다, 내리다, 채리다’ 등에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崔明玉
(1989)는 개재 자음이 조음시에 ‘i, j’ 앞에서 동화주와 동일한 [+high, -back] 자질을 가질 때 움라우트
현상이 저지되는 것으로 보았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현상은 중세 국어에서 매우드물게 발견되는데, 이렇게 드문
현상이 ‘겨집’과 ‘겨시다’에 모두 적용되었다는 점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두 어휘에서 동일한 현상이 적용되었다는 것은 곧 두 어휘의 ‘겨’가 화자들의 인식 속에서 밀접한 관련
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겨집’의 ‘겨’가 ‘겨시다’의 ‘겨’와 동일한 형태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중세 국어에서 용언 어간 ‘*겨-’가 단독으로 쓰인 예가 없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그러나 金亨奎(1949:194)는 이두에서 ‘在’가 ‘견’으로 읽히는 점, ‘겨시-’를 용언 어간 ‘*겨-’에 주체
존대선어말어미 ‘-시-’가 결합한 것으로 분석 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용언 어간 ‘*겨-’를 재구해
냈다.
이에 대해 姜吉云(1959b)는 용언 어간 ‘*겨-’의 존재를 부인하며 그 재구 방법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중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두에서 ‘在’가 왜 ‘겨’로는 나타나지 않고 ‘견’으로만 나타나는가?
둘째, 문헌에서 ‘결, 겨는’과 같은 활용형이 왜 나타나지 않는가?
셋째, ‘겨시-’의 어간을 ‘겨시-’로 보지 않고 ‘겨-’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이제 이러한 지적의 타당성을 검토해 가면서 용언 어간 ‘*겨-’를 재구해 내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姜吉云(1959b)는 ‘在’가 ‘견’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용언 어간 ‘*겨-’를 재구해 낼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이두의 ‘在’를 ‘*겨-’에 관형사형 어미 ‘- ㄴ’이 결합한 것으로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姜成一.
1958, 이강로. 1984). 다음과 같이 ‘在’가 체언에 선행하는 구성을 통해 ‘在’에 관형사형 어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7) 生存爲在祖父母及父母乙身故爲乎樣以 <大明律直解 1:5>
有大才爲在人亦軍衆乙能整爲旀 <大明律直解 1:7>
이러한 예는 ‘*겨-’의 활용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반례가 된다.
굳이 이러한 예가 아니더라도, ‘이시-’와의 경쟁, ‘겨시-’의 존칭 의미 확보 등에 의해 용언 어간 ‘*겨-’가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면, 이 때문에 중세 국어 시기에 이 용언의 활용형이 발견되지 않고 그
화석형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중세 국어 화자들이 ‘겨집’과 ‘겨시-’의 관련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필요하므로, 이 어간의
소멸이 중세 국어 시기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겨시-’의 어간을 ‘겨-’로 보아야 하는 증거가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해답을 제공
한다.
게다가 ‘겨시-’의 주어가 항상 존칭의 대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통시적으로 용언 어간 ‘*겨-’에 선어
말어미 ‘-시-’가 결합하여 ‘겨시-’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주어가 존칭의 대상일 때 사용되는 ‘뫼시-’와 목적어가 존칭의 대상 일 때 사용되는 ‘뫼-’의 경우에도
정작 용언 어간 ‘*뫼-’는 발견되지 않지만, 이들은 ‘겨시-’와 마찬가지로 선어말어미와의 결합으로 존칭의
용법이 굳어지면서 원래의 어간이 소멸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겨집’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이 어휘에 대하여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져 왔는데, 이들 논의를 점검해 본 결과 ‘겨집’의 통시적인
구성을 ‘*겨-[在] + 집[家]’으로 보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문제점이 적은 해결 방안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기존의 분석들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분석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이루어져 왔던 다른
의견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초창기 논의의 문제점에 대해 이렇다 할 지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논의
전개 과정에서 다른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특히 姜吉云(1959b)에서 ‘*겨-[在] + 집[家]’으로 분석하는 방안에 대해 적극적인 반례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논의에서 이에 대한 반박이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계집’에 대한 논의는 일부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미 논쟁이 끝난 낡은 주제라고 볼 수 없는, 오히려 보다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한 연구
대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본고는 객관적인 접근을 통해 ‘*겨-[在] + 집[家]’의 분석이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한 분석임을
제시하는 한편, 초창기 연구의 문제점을 비롯하여 姜吉云(1959b)에서 제기된 근거의 문제점을 지적함으
로써 연구사적인 관점에서 ‘계집’에 대한 연구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물론 이러한 분석도 아직 보완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남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중세 국어 이전 언어 자료에 대한 한계를 감안한다면,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을 수용하고 이를 검증해 나가는 단계를 밟는 것이 가장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3. ‘겨집’의 생성 시기
앞 장에서 ‘겨집’의 연구사를 정리하면서 많은 논점들을 다루었는데, 이들을 체계화시켜 종합해 보면
어휘사적으로 의미 있는 해석을 내릴 수 있다.
기존의 어휘사적인 연구는 주로 어원이나 의미 변화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는 경향이 있어, 어휘 개별적
으로는 다소 단편적인 논의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본고는 의미면에 초점을 두는 접근 방법을 탈피하고 어휘의 형태적 특징과 음운적 특징, 다른
어휘와의 관계 등을 폭넓게 검토하여 어휘사적인 연구가 종합적인 연구 방법이 될 수 있도록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어휘들끼리 개별적인 차이를 많이 보이기 때문에 어휘에 따라 그 결과의 성격과 범위 등이 다르게
나오겠지만, 방법론적인 발전을 꾀하게 되면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더욱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산출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구체적으로 ‘겨집’에 대한 어휘사적 고찰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이 어휘에 대한 연구는 주로 어휘의 생성 시기로 귀결될 것이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겨집’은 통시적으로 ‘*겨-[在] + 집[家]’의 구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겨집’은 실사끼리 결합한 합성어라는 형태론적인 특징을 갖는다.
‘겨집’의 이러한 형태론적인 특징이 갖는 의미는 다른 친족 어휘와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친족 어휘들은 합성어 구성이 아닌 파생어 구성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비, 어미, 누위/누의, 아, , 아’ 등은 모두 기본 어근에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진 파생어이다.
‘겨집’에 대한 어휘사적 고찰 309
‘아비, 어미’는 ‘압, 엄’이라는 어근에 접미사 ‘-이’가 결합한 어휘이며,
‘누위/누의’는 「朝鮮館譯語」에서 ‘餒必’로 전사된 것으로 보아 어근 ‘*눕’에 접미사 ‘-의’가 결합한 것으로
판단된다8).
‘아’과 ‘’은 음절 구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파생어라는 점이 잘
파악되지 않지만, 「鷄林類事」에서 각각 ‘了妲’, ‘寶妲’로 표기된 점을 통해 각각 ‘*앋 + -’, ‘*받 + -’의
구성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9).
또한 ‘아’는 [小, 初]의 의미를 갖는 ‘*앗’에 접미사 ‘-’가 결합된 형태로 분석된다(남광우. 1957).
물론 친족 어휘 중 합성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자비, 아미, 오라비’ 등 합성어로 된 친족 어휘들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 어휘들은 그 구성 요소 속에 또 다른 친족 어휘가 포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아자비, 아미’는 각각 ‘앚+ 아비’, ‘앚+ 어미’로 분석되어 친족 어휘
‘아비, 어미’를 포함하고 있고, ‘오라비’는 ‘올+ 아비’로 분석되어 친족
어휘 ‘아비’를 포함하고 있다10).
8) 李基文(1972:126)는 ‘餒必’를 ‘*누’로 재구하였으나, 중세 국어의 표기 ‘누위, 누의’와 대조해 볼 때
이 어휘는 ‘*눕’과 ‘-의’가 결합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必’의 음가를 ‘-의’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餒必’를 ‘*누’로 재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餒必’와 ‘누위, 누의’가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단어일 가능성도 있지만, ‘*누’와 ‘*누’가
이형태 관계에 있었거나 둘 사이에 어떠한 음운론적인 변화나 형태론적인 변화가 발생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9) ‘寶妲’(*)과 ‘’이 음운적으로 대응되지 않는 문제가 있지만, ㅅ계 합용병서를 경음 표기로 보는
입장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서 첫째 음절의 모음 ‘ㆍ’가 탈락하면서 발생한 경음을 ㅅ계 합용병서로 표기했다고 설명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鷄林類事」의 ‘寶妲’과 중세 국어의 ‘’은 ㅅ계 합용병서의 어두자음군설을 부인하는 견해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받아들여진다.
이 외에 ‘하나비, 할미, 아아, 아’과 같이 통사적인 구성에서 유래한 친족 어휘들도 그 내부에
기본적인 친족 어휘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비’와 ‘할미’는 [多, 大]의 의미를 갖는 용언 ‘하-’의 관형사형이 각각 ‘아비’, ‘어미’를 수식하면서
만들어진 어휘이다.
‘할미’의 경우 역시 약간 변형된 모습이 관찰되는데, 「鷄林類事」에서 발견되는 ‘漢了彌’를 통해서 ‘한어미’
와 ‘할미’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11).
‘아아’과 ‘아’은 ‘남자 조카’와 ‘여자 조카’를 이르는 말로서[鮮, 微]의 의미를 갖는 ‘앛-’이 각각
‘아’과 ‘’을 수식하는 구성에서 출발한 것인데, 역시 ‘아’과 ‘’이라는 친족 어휘를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라 친족 어휘의 생성을 단계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8) ㄱ. 1차 단계 : 고유한 의미를 갖는 어근 형성.
ꃚ *압, *엄, *눕, *앋, *받 등
10) ‘아미’에서 ‘어미’를 분석해 내는 데 걸림돌이 하나 있다.
‘’와 ‘ㅓ’의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는, ‘*아저미’가 모음 변화를 입어 ‘아미’가 되었다고 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파생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자다’와 ‘’이 모음에서 불일치를 보이는 현상도 이러한 어휘 개별적인
변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이동석. 2002b).
이와 관련하여 李基文(1983)은, 「鷄林類事」에서 ‘伯叔’과 ‘叔伯母’에 대한 표기가 각각 ‘了査祕’와
‘了子彌’로서 ‘査’와 ‘子’의 차이를 보이는 점을 들어 이러한 모음 변화가 이른시기인 12세기 이전에
발생했었을 것으로 보았다.
한편 오라비에서 분석되는 ‘올’은 현대 국어에서 접두사로 취급되지만, 국어의 접두사가 대부분 실사에서
유래했다(유창돈. 1964:362)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어휘가 최초로 형성되었을 당시에는 합성어의 성격을
가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11) 「鷄林類事」에서 ‘漢了彌’는 ‘祖母’가 아닌 ‘姑’에 대한 전사 표기로 제시되었다.
이때 ‘姑’를 ‘고모’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시어머니’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鷄林類事」에서 ‘姑’의 다음
표제항이 ‘婦’인 점으로 미루어 ‘시어머니’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게 옳다(이동석. 2002b).
「鷄林類事」에는 ‘祖母’ 항목이 아예 빠져 있다.
ㄴ. 2차 단계 : 1차 단계의 어근에 접사 결합.
ꃚ 아비, 어미, 누위/누의, 아, , 아 등
ㄷ. 3차 단계 : 2차 단계의 명사에 다른 명사가 결합하거나 통사적인 구성 형성.
ꃚ 아자비, 아미, 오라비
하나비, 할미, 아아, 아
그런데 ‘겨집’은 위의 단계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3차 단계의 친족 어휘 합성어들이 2차 단계에서 만들어진 친족 어휘를 내부 구성에 포함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합성어 ‘겨집’은 전혀 관계가 없는 두 어휘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3차 단계의 합성어는 명사끼리 결합하는 통사적인 합성어인 반면, ‘겨집’은 용언 어간과 명사가
결합한 비통사적인 합성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겨집’의 이런한 특성은 결국 이 어휘가 3차 단계 이후에 생겨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정한 패러다임을 따르지 않고 매우 예외적인 구성을 보인다는 것은, 이러한 패러다임이 지난간 이후에
만들어지는 어휘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겨집’에 대응되는 어휘가 「鷄林類事」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鷄林類事」에서는 ‘女子’와 ‘妻’를 ‘漢吟’으로 전사하였는데, 이 ‘漢吟’에 대응되는 어휘가 중세 국어 문헌
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곧 12세기에 [女, 妻]의 의미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漢吟’이란 어휘가 후대의 어느
시기에 사라지고, ‘겨집’이란 어휘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겨집’의 형태론적인 특성이 시사해 주는 어휘 형성 시기와 어느정도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겨집’의 의미론적인 특성 역시 이 어휘의 형성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劉昌惇(1954)는 ‘겨집’의 의미를 ‘在家人’으로 보고, 이 어휘가 남녀의 활동 범위가
각기 외부와 가내(家內)로 고정화된 이후에 생겨난 칭호이므로 이 어휘를 원시어(原始語)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결국 ‘겨집’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를 통해 이 어휘의 형성 시기가 위에서 제시한 3차 단계보다 나중
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겨집’의 이러한 의미는 이 어휘가 생성되던 시기의 사회상을 잘 대변 해 주는데, 이처럼 어휘의 의미와
용법 속에 문화적인 정보가 담겨 있는 경우를 여러 어휘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무지개’는 중세 국어 문헌에서 ‘므지게’로 표기되었는데, 이 단어를 통해 ‘물’로 만든 ‘지게(문)’란
선인들의 비유를 접할 수가 있으며, ‘우레’란 단어를 통해서는 ‘(하늘이) 소리치는 것’이란 선인들의 해석
을 접할 수 있다12).
이처럼 ‘겨집’의 형태론적인 특징과 의미론적인 특징은 이 어휘의 생성 시기를 추정하는 데 큰 실마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 어휘가 생성될 무렵의 사회상도 잘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에 못지 않게 ‘겨집’의 음운론적인 특징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460년대에 ‘계집’이란 이표기와 ‘계시다’라는 이표기가 거의 동시에 문헌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이모음역행동화 현상의 적용 결과로 볼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앞 장에서
설명한 대로다.
이처럼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음운적인 변화가 ‘겨집’과 ‘겨시다’에 거의 동시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겨집’과 ‘겨시다’가 화자들의 인식 속에서 어떠한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12) ‘우레’는 용언 어간 ‘우르-’와 명사파생접미사 ‘-에’가 결합한 것으로, ‘우르다’는 중세 국어에서
‘소리치다, 포효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실마리를 통해 ‘겨집’의 ‘겨’가 ‘겨시다’의 어간 ‘겨-’와 동일한 형태소일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으니, ‘겨집’의 음운론적인 특성 또한 이 어휘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겨집’의 음운론적인 특성은 용언 어간 ‘*겨-’의 소멸 시기를 추정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아무리 ‘겨집’과 ‘겨시다’의 ‘겨’가 같은 유래를 갖는다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지나 어원 의식이 희박해
지거나 형태소 분석을 위한 직관이 사라지게 되면 두 어휘의 관련성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일반
적이다.
예컨대 중세 국어의 ‘한쇼, 한새’가 현대 국어에서 ‘황소, 황새’로 변화를 입게 된 것은, 중세 국어 이후에 ‘한’이 [大, 多]의 의미를 갖는 용언어간 ‘하-’의 관형사형이라는 정보가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겨집’과 ‘겨시다’에서도 이와 동일한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현대 국어 화자들이 ‘계집’과 ‘계시다’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을 매개해 줄 수 있는 용언 어간 ‘*겨-’나 ‘* 계-’가 현대 국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 국어 화자들은 ‘겨집’과 ‘겨시다’의 관련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비록 당시에
용언 어간 ‘*겨-’가 사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바로 직전까지는 용언 어간의 용법이 살아 있어서
당시 화자들이 이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을 통하여 결국 용언 어간 ‘*겨-’의 소멸이 15세기에서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이러한 음운론적인 특징은 오히려 형태론적인 특징이나 의미론적인 특징보다 더 구체적으로 ‘겨집’의
생성 시기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합성어나 파생어는 시간이 흐를수록 발음이 고착화되고 형태소 경계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
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15세기의 화자들은 ‘겨집’과 ‘겨시다’의 관련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이들 통해 ‘겨집’의 생성 시기가 15세기에서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이 ‘겨집’과 대립 관계에 있는 어휘를 통해서도 동일한 추정이 가능하다.
(9) 남진 겨지비 업고 노니 가니 업더니 <月印釋譜 1:42a>
사미 이신 후에 남진 겨집이 잇고 남진 겨집 이신 후에 어버식이 잇고<飜譯小學 7:38a>
중세 국어 문헌에서 발견되는 ‘겨집’의 대립어는 ‘남진’이다.
이 ‘남진’은 한자어 ‘男人’에서 온 것인데, 다음과 같이 ‘男人’과 ‘겨집’이 쌍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男人’이 ‘남진’이 된 것은 ‘三月三日’에서 ‘三日’이 ‘삼질’로 발음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劉昌惇. 1966).
(10) 優婆塞은 淸淨 男人이오 優婆夷 淸淨 겨지비라 혼 마리니 <月印釋譜 4:18a>
巫 겨집 심이오 祝 男人 심이라 <楞嚴經諺解 8:117b>
그런데 「鷄林類事」에서는 ‘남진’은 물론 ‘겨집’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문헌에서는 대신 각각 ‘吵喃’(沙男)과 ‘漢吟’이란 기록이 보이는데, ‘吵喃’(沙男)은 중세 국어의 ‘’
이나 ‘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 된다.
그런데 중세 국어에서 ‘나’와 쌍을 이루는 단어는 ‘겨집’이 아니라 ‘갓나/간나’였다.
(11) 남지늬 소리 겨지븨 소리 소리 갓나 소리 <釋譜詳節 19:14b>
남지늬 香 겨지븨 香과 香 갓나 香과 <釋譜詳節 19:17b>
나가 간나가 <飜譯朴通事 上:55b>
남진과 겨집이 은혜 이시며 나와 간나 욤이 이시며 <小學諺解 5:34a>
이러한 사실들은 역시 ‘겨집’의 출현 시기가 15세기에서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못함을 의미한다.
‘’의 대립어인 ‘漢吟’이 소멸하면서 생긴 공백을 ‘갓’이 메워 주고 있으며, 이와 별도로 ‘겨집’과 ‘남진’
이라는 대립체계가 새로 발생한 것으로 보이므로, ‘겨집’의 출현 시기를 그만큼 15세기에 가깝게 추정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겨집’의 음운․형태․의미적 특성은 이 어휘의 생성 시기를 일관되게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 어휘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일관된 역사적 사실을 보여 주는 예는 극히 드물다고 판단되
는데, 이러한 점에서 ‘겨집’은 어휘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가치 높은 어휘로 평가할 수 있다.
‘겨집’의 생성 시기를 다소 폭넓게 추정하기는 했지만, 본고는 이 어휘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기존의 논의에서 접근하지 못했던 부분을 밝혀낼 수 있었다.
특히 일반적으로 문헌의 한계 때문에 특정 어휘의 생성 시기를 추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비록 300여 년이라는 넓은 시간대를 제시하긴 했지만, 어휘사 연구에서 조그마한 진척을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3).
13) ‘어휘의 생성 시기’를 ‘어휘가 최초로 문헌에서 발견되는 시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어휘가 최초로 문헌에서 발견되는 시기는 면밀한 문헌 검토를 통해 앞으로 가치 있는 어휘를 발굴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어휘사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4. 결론
중세 국어 ‘겨집’은 단순한 친족 어휘 이상의 의미를 갖는, 국어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가진 어휘
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이 어휘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많은 논의들이 진행되어 온 것만 보더라도 그 가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겨집’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겨집’의 ‘겨’가 체언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겨집’의 ‘겨’가 용언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견해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큰 분류 속에서도 매우 다양한 분석형들이 제시되었는데, 이 중 본고는 ‘겨집’을 용언 어간 ‘*겨-’와
체언 ‘집’의 결합으로 본 金亨奎(1949:194, 1956), 劉昌惇(1954, 1966), 崔昌烈(1986:298) 등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여러 가지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 없지 않지만, 용언 어간 ‘*겨-’의 재구 가능성과 의미적인 상관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분석이 가장 설명력이 높은 분석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여러 논의들을 일일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후행 연구들이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던 점을 발견하고 각각의 논의들이 가지고
있어 충분히 제시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전해지는 문헌의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어휘가 최초로 발견된
문헌의 간행 시기와 그 어휘의 생성 시기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연구사적인 관점에서 기존 연구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아쉬운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본고는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음운, 의미, 형태면의 특성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이
어휘의 생성 시기가 12세기에서 15세
기 사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시기 추정은 ‘겨집’의 구성을 ‘*겨-’와 ‘집’의 결합으로
분석하는 데 좋은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결국 이 어휘와 관련된 모든 국어학적 사실들이
유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 어휘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을 통하여 그 어휘의 통시적인 역사를 재구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어휘사적 연구의 진정한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된다.
참고문헌
姜吉云, 「造語論小考<「계집」을 中心으로>(上)」, 現代文學 55, 1959a.
姜吉云, 「造語論小考-<「계집」을 中心으로(下)>」, 現代文學 56, 195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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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중세 국어 어휘 ‘겨집’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형태론적인 분석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분석은 ‘겨집’을 용언어간 ‘*겨-’[在]와 체언 ‘집’[家]의 결합으로
보는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용언 어간 ‘*겨-’의 실체에 대한 문제는 이두 표기를
통해 해결되고 형태론적인 특성에 대한 문제는 ‘신발, 감발’과 같은 어휘의 예를 통해 해결된다.
게다가 이 어휘의 모음에서 발견되는 ‘ㅕ > ㅖ’의 음운론적인 변화와 형태․의미적 특징은, 이 어휘의
생성 시기를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로 추정하는 데 큰 실마리를 제공하는 한편 ‘*겨-’[在]와 ‘집’[家]의
결합으로 보는 분석 가능성에 대해서도 좋은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시기 추정은 「鷄林類事」를 비롯한 중세 문헌을 통해서도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 어휘의 어휘사적인 특성을 여러 분야의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 접근하는 방법을 통해 어휘사
연구의 활성화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동석 (고려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