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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서목 일본서(日本書) 목록(目錄)
효경범례(孝經凡例) : 등익근(藤益根)이 지은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記) : 일본 나라조[奈良朝]의 황족(皇族) 궁신(宮臣)인 사인친왕(舍人親王) 등이 편찬한 현존하는
일본의 첫 관찬 사서(史書)이다. 총 30권이며, 이른바 ‘신대(神代)’ 때부터 지통천황(持統天皇)까지의 역사를 중국의
정사체(正史體)를 모방하여 한문(漢文)으로 기술하였다.
고대의 일본 문화나 한일(韓日) 관계를 밝히고,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정치와 불교(佛敎)의 전래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일본기(日本紀) : 안마려(安麻呂)가 찬한 것이다.
속일본기(續日本記) : 관야조신진도(管野朝臣眞道) 등이 편한 것으로, 40권이다. 문무천황(文武天皇) 즉위년부터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10년까지를 편년체로 기술하였다.
일본일사(日本逸史) : 압우지(鴨祐之)가 찬한 것으로, 40권이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빠진 부분을 보충한 것
으로,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11년 정월부터 순화천황(淳和天皇) 천장(天長) 10년 12월까지 기술하였다.
강호(江戶) 시대의 역사서이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 대장선행(大藏善行)이 찬한 것이다.
일본문덕실록(日本文德實錄) : 도량향(都良香)이 찬한 것이다.
제왕편년집성(帝王編年集成)
유취일본국사(類聚日本國史) : 관원도진(管原道眞)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200권이며, 별도로 목록 2권,
제왕계도(帝王系圖) 3권이 있는데, 지금은 산실되고 61권만 남아 있다. 《육국사(六國史)》에 실려 있는 기사를
신기(神祇), 제왕(帝王), 후궁(後宮), 인(人), 세(歲) 등의 부문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양안상순(良安尙順)이 찬한 것으로, 105권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모방하여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사물을 모은 다음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였다.
천부(天部), 천문(天文), 천상(天象), 시후(時候) 등 105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찬한 것이다.
무림전(武林傳)
정벌기(征伐記)
모리씨가기(毛利氏家記) : 모리대장(毛利大藏)이 찬한 것이다.
유마회연기(維摩會緣起)
시학침열(時學鍼焫) : 고지(高志)가 찬한 것이다.
백석여고(白石餘稿) : 실직청(室直淸)이 찬한 것이다.
조래집(徂徠集) : 물무경(物茂卿)이 찬한 것이다.
남포문집(南浦文集)
봉도유주(蓬島遺珠) : 조문연(晁文淵)이 찬한 것이다.
일본명가시선(日本名家詩選) : 등원병(藤元昺)이 찬한 것이다.
객관필담(客館筆談) : 목실문(木實聞)이 찬한 것이다.
[주C-001]일본서(日本書) 목록(目錄) : 이 해동역사(海東繹史) 인용 서목(引用書目)은 원문의 인용 서목에 역자가
해설을 덧붙인 것이므로 영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였다.
제1권 세기(世紀) 동이총기(東夷總記)
○ 군자국(君子國)이 북쪽에 있으니, 관(冠)을 쓰고 검(劍)을 차며, 짐승을 먹는다. 두 마리의 문호(文虎)를 곁에 두고
있다. 사람들이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가 있어서 아침에 피어났다가 저녁에 죽는다.
《산해경(山海經)》
○ 군자국은 땅이 사방 1천 리이고 목근화(木槿花)가 많다. 《고금주(古今注)》
○ 공자(孔子)가 구이(九夷) 지방에 살려고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누추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니, 공자가 말하
기를,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누추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논어(論語)》
○ 《설문(說文)》에는,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띄워 바다로 나가 구이(九夷)가 사는 곳으로
가고 싶다.’ 하였다.” 하였다.
동이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군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 동방(東方)의 오랑캐를 이(夷)라고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몸에 문신을 새겼으며,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 자
가 있다. 《예기(禮記)》
○ 《이아(爾雅)》에는, “구이(九夷)ㆍ팔적(八狄)ㆍ칠융(七戎)ㆍ육만(六蠻)을 일러 사해(四海)라고 한다.” 하였다.
○ 동이(東夷)에는 9종이 있으니, 견이(畎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
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가 그것이다. 《후한서(後漢書)》
○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도록 하니, 바로 양곡(暘谷)이란 곳이다. 떠오르는 해를
공손하게 인도하여 봄농사를 일과로 삼게 하니 날은 춘분이오 별은 주조(朱鳥)라. 이로써 중춘(仲春)에 맞게 한다.
《상서(尙書)》
○ 살펴보건대, 《사기(史記)》에는 우이(嵎夷)가 욱이(郁夷)로 되어 있다.
○ 우(禹)가 9주를 평정한 다음 각각 그 직책으로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황복(荒服)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산융(山戎)ㆍ
발(發)ㆍ식신(息愼)을 무마하고, 동쪽으로는 장이(長夷)ㆍ조이(鳥夷)를 살펴보건대, 《사기정의》에는 조이(鳥夷)가
혹 도이(島夷)로 되어 있는데, 백제(百濟) 서남쪽의 바다에 있는 여러 섬에 사는 사람들을 도이라고 한다.
다음에 상세하게 나온다. 무마하여 모두 순 임금의 공을 떠받들게 하였다. 《사기》
○ 기주(冀州)의 도이(島夷)는 가죽 옷을 공물로 가지고 오는데, 오른쪽으로 갈석(碣石)을 끼고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상서(尙書)》 ○ 삼가 살펴보건대, 도이가 《사기》에는 조이(鳥夷)로 되어 있다.
○ 바다와 대산(岱山) 사이에는 청주(靑州)가 있다. 우이(嵎夷)가 이미 평정하였다. 《상서》
○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에는 양주(揚州)가 있다. 도이(島夷)는 초복(草服)을 입는다. 《상서》
○ 하(夏)의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구이(九夷)를 가르쳤다. 《묵자(墨子)》
○ 후상(后相)이 원년 무술에 즉위하여 상구(商邱)에 살면서 견이(畎夷)를 정벌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2년에 풍이(風夷)와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 《상동》
○ 7년에 우이(于夷)가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견이가 와서 조공하였다. 《통감전편(通鑑前編)》
○ 소강(小康)이 즉위하고 2년이 지난 뒤 방이(方夷)가 와서 조공하였다. 《죽서기년》
○ 살펴보건대, 《회기(會紀)》에는 원년의 일로 되어 있다.
○ 제저(帝杼) 8년에 살펴보건대, 《통감전편》 및 《회기》에는 5년으로 되어 있다. 동해(東海) 및 삼수(三壽)를 정벌
하여 여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꼬리가 9개였다. 《상동》
○ 제분(帝芬) 3년에 동쪽의 구이(九夷)가 와서 복속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사기》 본기(本紀)에는 제분이 제괴(帝槐)로 되어 있다.
○ 후망(后芒)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뒤 구이가 와서 조공하였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후설(后泄) 21년에 살펴보건대, 후설은 16년간 재위하였는데 이곳에서는 21년이라 하였으니, 상세하지가 않다.
《통감전편》과 《회기》에는 모두 원년 을사로 되어 있다.
견이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를 명하였다. 《죽서기년》
○ 후발(后發)이 즉위하였다. 원년에 제이(諸夷)가 왕문(王門)에 조공하면서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죽서기년》
○ 제계(帝癸) 3년 갑오에 삼가 살펴보건대, 《회기》에는 갑오가 을사로 되어 있다.
견이가 기(岐) 땅에 들어와서 반란하였다. 《상동》
○ 탕(湯)이 걸(桀)을 정벌하려고 하자, 이윤(伊尹)이, 공물을 저지하고 줄여서 그가 하는 짓을 보기를 청하였다.
걸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안 됩니다.
걸은 아직도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죄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탕이 걸에게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다음해에 또 공물을 바치지 않자 걸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이윤이, 이제 된다고 말하였다.
탕이 이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다음 걸을 남소(南巢)에다가 옮겨 살게 하였다. 《설원(說苑)》
○ 태무(太戊) 61년에 동쪽의 구이가 와서 조공을 바쳤다. 《죽서기년》
○ 중정(仲丁)이 즉위하였다. 6년에 남이(藍夷)를 정벌하였다. 《상동》
○ 하전갑(河亶甲) 4년에 남이를 정벌하였다. 《상동》
○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드디어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에 길을 통하였다. 《상서》
○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양이(良夷)로, 재자(在子)이다. 《급총주서(汲冡周書)》
○ 주공(周公)이 은(殷)을 이기고 나서 상합(商蓋)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신공 갑(辛公甲)이 말하기를, “큰 나라는 공격하기가 어렵고 작은 나라는 복종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여러 작은 나라를 복종시켜서 큰 나라를 위협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구이(九夷)를 공격하니, 상합이 복종하였다. 《한비자(韓非子)》
○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성왕(成王)이 서자 상(象)이 동이(東夷)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이에 주공(周公)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축출하였다. 강남(江南)에 이르러 삼상(三象)을 만들어서 그 덕을 기렸다.” 하였다.
○ 성왕이 제후들과 기양(岐陽)에서 맹세하면서 초(楚)를 형만(荊蠻)으로 삼은 다음 띠풀을 엮어서 자리를 만들고
망표(望表)를 세워서 표시를 하고는 선모(鮮牟)와 더불어 횃불을 지키게 하였다. 《국어(國語)》
○ 제(齊) 환공(桓公) 23년에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영지(令支)를 제압하고 고죽(孤竹)을 참수하자 동이
들이 비로소 복종하였다. 《책부원귀》
부록(附錄)
○ 청구국(靑邱國)이 그 북쪽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오곡을 먹으며 사백(絲帛)을 입는다.
혹은 조양(朝陽)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 청구(靑邱)의 나라에는 여우가 있는데, 꼬리가 아홉 개다. 태평 시절에는 나와서 상서를 알린다. 온순하고 소박한
백성들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영토(嬴土)의 나라이다. 영(嬴)은 비옥하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 《이상 모두 산해경》
○ 찬하기를,
하였다. 《산해경찬》
○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청구에서 죽이고 강고곡(棡鼓曲) 10장을 만들었다. 《귀장(歸藏)》
○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에 도착해서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이로써 만신(萬神)을 불렀다.” 하였다.
○ 《회남자(淮南子)》에는, “요 임금이 예(羿)를 시켜서 청구의 못에서 대풍(大風)을 돌리게 하였다.” 하였다.
○ 《여씨춘추》에는,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큰 나무가 있는 곳, 구진(九津)에서 해가 떠오르는 청강(靑羌)의 들판,
나무가 모여 있는 곳, 하늘까지 닿은 큰 산, 조곡(鳥谷) 청구(靑邱)의 향(鄕), 흑치(黑齒)의 나라에 이르렀다.” 하였다.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청구는 고려의 경계 안에 있다. 자허부(子虛賦)에, ‘가을에 청구에서 사냥한다’
하였으니, 대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복건(服虔)이 말하기를, ‘청구국은 해동 3백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고,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청구 칠성(靑邱七星)은 진수(軫宿)의 동남쪽에 있는데, 청구는 만이(蠻夷)의 나라
이름이다.’ 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토벌하고는 청구도 행군총관(靑邱道行軍摠管)을 두었다고 한다.” 하였다.
○ 한안(韓雁)은 바다 가운데 도주(都州)의 남쪽에 있다. 《산해경》
○ 한안과 시구(始鳩)는 바닷가에 있다. 《산해경찬》
○ 《산해경》에서 이른 바 한안은 바로 지금의 요동인 듯하다. 《산해경석의》
[주C-001]동이(東夷) : 동이라고 하는 명칭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동방 민족, 즉 산동반도(山東半島)와 회하(淮河)
유역 및 발해(渤海) 연안과 그 이동(印)의 민족을 지칭하고 있다. 대개 한(漢)나라를 전후로 하여 동이의 지리적인
위치가 약간 다른데, 은주(殷周) 시기의 동이는 산동반도 및 회하 유역의 민족을 지칭하였고, 그 후 전국 시대와 한(漢)
나라 이후의 동이는 발해 연안 내지 그 이동의 여러 민족을 지칭하였다.
[주D-001]문호(文虎) : 얼룩무늬가 있는 호랑이를 말한다. 최남선(崔南善)은 군자국의 이러한 정경을 우리 민속 가
운데 산신(山神)이나 혹은 독성(獨聖)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D-002]훈화초(薰華草) : 무궁화 꽃을 말한다.
[주D-003]자허부(子虛賦)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부이다.
[주D-004]발(發)ㆍ식신(息愼) : 이 부분이 《관자》 권23 규도편 경중갑에는 ‘발조선(發朝鮮)’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발(發)의 조선(朝鮮)’으로 해석하는 설과 ‘발과 조선’으로 해석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 경인문화사에서 영인한 《표점 교감 사기》에는 ‘발’과 ‘식신’을 두 종족으로 구별하여 해석하였다.
김정학(金廷鶴)은 “숙신과 조선은 고대의 음이 약간은 차이가 있으나, 《관자》에서는 ‘발ㆍ조선’이라고 한 것을 《사기》
에서는 ‘발ㆍ식신’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같은 부족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숙신과 조선을 동일한 부족
으로 보았으며, 발과 식신을 두 개의 부족으로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다.《한국 상고사의 제문제, 정신문화연구원, 1987》
천관우(千寬宇)는 “《일주서(逸周書)》의 ‘발인(發人)ㆍ녹인(鹿人)’의 예로 보아 ‘발조선’도 역시 ‘발과 조선’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하여 두 종족으로 보았다.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77쪽 주》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옛날 책들에 고조선족을 ‘발조선’
이라 한 것은 고조선족을 박달족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박달에서의 ‘박’은 백악산(白岳山)이나 태백산(太白山)에서의 백(白)과 같은 뜻으로서 그 어원은 ‘밝다’이며, ‘밝’은 ‘박’
이나 ‘발’로 발음된다.
따라서 ‘발조선’의 ‘발’은 고조선족이 자기족을 표시하여 부르던 박달에서 온 이름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여 ‘발조선’을
하나로 보았다.《조선전사 권2 고조선사》 이 ‘발식신’ 부분은 《관자》의 ‘발조선’ 부분과 함께 신채호(申采浩) 등 ‘막ㆍ
진ㆍ번 삼조선(莫眞番三朝鮮)’ 논자들의 중요한 논거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북한의 이지린은 “어떤 자는 ‘발ㆍ조선’
을 ‘발조선’으로 해석하여 조선을 국호가 아니라, 그것이 마치 종족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나는 이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12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발과 식신으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주D-005]갈석(碣石) : 갈석은 조선 후기 실학파(實學派) 이래로 ‘조선’과의 관련 가능성이 지적되어 왔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큰 혼란이 있어 왔다. 《통전》에는 고구려 구계(舊界)인 낙랑군(樂浪郡) 수성(遂城)이라는 설, 난하
(灤河) 하류의 노룡(盧龍)이라는 설, 상곡군(上谷郡) 역현(易縣) 방면의 수성(遂城)이라는 설을 열거하고 있으며, 국내
에는 갈석산이 한반도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예로부터 있어 왔고, 또 그와는 반대로 낙랑군
이 본래부터 평양이 아니라 난하 하류였다고 하는 견해가 있어 왔다.《천관우,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20
쪽 주》 북한의 이지린은 산해관(山海關) 부근이라 하였다.《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210쪽》
[주D-006]의무려(醫無閭) : 산의 이름으로, 광녕우위(廣寧右衞)의 서쪽 5리에 있는 산이며, 사산(蛇山), 반산(盤山),
첨산(添山), 백운산(白雲山), 안산(鞍山) 등 12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讀史方輿紀要 卷37 山東條》
[주D-007]성주(成周)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전국 시대 때에는 낙양(洛陽)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주D-008]기양(岐陽)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부풍현(扶風縣) 서쪽에 있던 옛 지명이다.
[주D-009]산융(山戎) : 춘추 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방 천안현(遷安縣)의 산간 지대에 살던 오랑캐의 족속
으로, 바로 후대의 흉노족(凶奴族)을 가리킨다.
[주D-010]영지(令支) : 춘추 시대 때 산융(山戎)의 속국(屬國)으로 있던 종족이다. 지금의 하북성 천안현 일대에서
살았다.
[주D-011]고죽(孤竹) : 상(商)나라 때의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에서부터 열하성(熱河省)
조양현(朝陽縣) 일대에 있었다.
[주D-012]숙신(肅愼) : 만주 동쪽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고조선 때 만주 동쪽에서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때 종족의 일부가 병합되었고, 광개토왕 때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숙신의 후예로 추정되는
말갈(靺鞨), 읍루(揖婁)의 종족이 일어났다. 식신(息愼), 직신(稷愼) 등으로도 표기된다.
[주D-013]석노(石砮)와 고시(楛矢) : 석노는 돌화살촉이며, 고시는 고나무로 만든 화살이다. 고나무는 백두산에서
나는데, 견고하고 곧아서 그것으로 화살대를 만들면 습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석노와 고시는 모두 고대에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공물로 바쳤다.
[주D-014]회이(淮夷) : 주나라 때 회수(淮水)의 남쪽과 북쪽에 있던 동이(東夷)로, 서이(徐夷)와 함께 산동(山東) 해안
지역에 할거하면서 노(魯)와 주(周)를 침공하는 일이 잦았다.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소공(召公)이 보(保)가 되고
주공(周公)이 사(師)가 되어 동쪽으로 회이(淮夷)를 정벌하였다.” 하였고,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관숙(管叔),
채숙(蔡叔), 무경(武庚) 등이 과연 회이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성왕(成王)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정벌하였다.” 하였다.
[주D-015]위만(衞滿) : 《사기》에는 만(滿)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위만(魏滿)으로 되어 있다.
위(衞)가 만(滿)의 씨성(氏姓)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이를 씨성으로 간주하여 그의 나라를 위씨조선
(衞氏朝鮮)이라 명명하고 있다.
[주D-016]팔조(八條)의 금법(禁法) : 이른바 기자(箕子)가 지었다고 하는 고조선의 법률을 말한다. 고조선에는 일찍
부터 8개의 금법이 있어 각종 범죄를 처벌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재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相殺償以命],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 보상한다[相傷以穀償],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相盜者沒爲其家奴婢]
는 3개 조항만이 전하고 나머지는 전하지 않는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 권2 제국부(諸國部)
본국조(本國條)에서 “오륜(五倫)을 합해 8조목인 듯하다.” 하였고,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기자조
(箕子條)에서 “팔조는 아마도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였다. 이병도(李丙燾)는 “오늘날 기자의
동래(東來), 동봉설(東封說)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볼 때 소위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의 범금팔조(犯禁八條)란 것은
기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선의 본유본래(本有本來)의 법금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
史硏究, 박영사, 1976, 58쪽》 북한(北韓)의 이지린은 “범금팔조는 고조선 국가가 실시했던 역사적 사실이며, 기자가
팔조의 금법을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은 고조선의 범금팔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반고(班固)의 주관인 것이다.”
하였다.《이지린, 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353쪽》
[주D-017]치우(蚩尤) : 황제(黃帝) 때의 제후(諸侯) 이름으로, 《상서(尙書)》 공안국전(孔安國傳)에서는 옛 구려국
(九黎國)의 임금이라고 하였고, 《예기》 정현(鄭玄)의 주(注)에서는 삼묘(三苗)를 치우라고 하였으며, 응소(應邵)는
옛날의 천자(天子)라고 하여 그 설이 서로 다르다. 《사기(史記)》 오제기(五帝紀)에는,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제후들에게서 군사를 징발하여 치우와 더불어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하였다.
[주D-018]강고곡(棡鼓曲) : 악곡(樂曲)의 이름으로, 《구당서(舊唐書)》 음악지(音樂志)에는 “진뢰경(震雷驚),
맹호해(猛虎駭) 등 10개의 곡이 있는데, 그 내용을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주D-019]풍산(風山) : 청구국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이곳에는 항상 뇌성벽력이 치며, 자부궁(紫府宮)이 있어 천진
선녀(天眞仙女)가 그곳에서 노닌다고 한다.
[주D-020]수해(竪亥) : 하(夏)나라 사람으로 걷기를 잘했던 사람의 이름이다. 우 임금이 그를 시켜서 거리를 재게
하였다 한다.
[주D-021]한안(韓雁) : 명나라 왕숭경(王崇慶)은 지금의 요동 부근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보았으며, 최남선(崔南善)
은 한안이 한(韓)ㆍ한(寒) 등의 글자와 마찬가지 글자로, 동이(東夷)의 국가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주D-022]시구(始鳩) : 옛 나라의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새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제2권 세기(世紀) 단군조선(檀君朝鮮)
살펴보건대,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조(朝)의 음은 조(潮)이고 선(鮮)의 음은 산(汕)이다.
조선에는 산수(汕水)가 있으므로 그렇게 명한 것이다.” 하였고,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이르기를,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달아나자 무왕(武王)이 이를 듣고는 그곳에다 봉(封)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기자 이전에도 조선이라는 칭호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단군 시대 때의 조선을 칭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분명하지가 않다. 《여사(麗史)》에서 단군 시대를 전조선(前朝鮮)이라고 하고 기자 시대를 후조선이라 하였
기 때문에 지금 그대로 따른다.
○ 당요씨(唐堯氏)가 천하의 임금으로 있은 지 29년째인 무진(戊辰)에 단군씨(檀君氏)가 서서 처음으로 도읍을 다스
렸는데, 평양(平壤)에다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환웅(桓雄)은
천신(天神) 환인(桓因)의 아들이다. 태백산(太白山)의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熊女)와 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박달나무 아래에서 낳았으므로 인하여 단군이라고 하였다. 단군의 이름은 검(儉)으로, 나면서부터
신명하여 구이(九夷)가 임금으로 삼았다. 은씨(殷氏) 무정(武丁) 8년 을미에 단군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가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1천 48세였다. 《조선세기(朝鮮世紀)》
○ 기자(箕子)는 주(紂)의 친척이다. 주가 처음에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가 이를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였다. 주가 음란한 행실을 하자 기자가 이를 간하였으나 주가 따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떠나는 것이 옳다.”
하니, 기자는,
하였다. 그러고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여 남의 종이 되었다가 마침내 숨어 버리고는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는 이를 ‘기자조(箕子操)’라고 전한다. 《사기》
○ 《고시기(古詩紀)》의 기자조(箕子操)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아, 주왕이 무도하여 비간을 살해했도다.
아아, 어찌하여 홀로 옻칠을 해 몸을 헐게 하고 머리를 풀어 헤쳐 미친 체하였나. 지금 종묘를 어찌하리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돌을 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아아, 사직을 어찌하리오.
[嗟嗟 紂爲無道殺比干 嗟復嗟 獨奈何漆身爲癘 被髮以佯狂 今奈何宗廟 天乎天哉 欲負石自投河 嗟復嗟 奈社稷何]”
○ 제신(帝辛) 51년에 기자를 가두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살펴보건대, 제신의 재위는 32년밖에 안 되니, 여기에서 말한 51년은 잘못된 것이다.
《회기(會紀)》에는 3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정사를 뒤엎고는 정사를 예전대로 회복한 다음 기자를 석방하였다. 《상서(尙書)》
○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서 기자를 찾아와 물으니, 기자가 홍범(鴻範)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다가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 《사기(史記)》
○ 기자가 중국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갔는데, 시서(詩書), 예악(禮樂), 의약(醫藥), 복서(卜筮)를 하는
자들이 모두 따라 갔다. 시서로써 사람들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 예악의 제도를 알게 하였으며 위문(衞門),
관제(官制), 의복(衣服) 등의 제도를 모두 중국의 것을 따랐다. 《삼재도회(三才圖會)》
○ 은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사기》에 ‘무왕이 주를 정벌하고서
기자를 조선에다가 봉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과 다르다.” 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에게 예의와 누에 치는 법과 직조술
(織造術)을 가르쳤으며, 낙랑ㆍ조선 백성들의 범금팔조(犯禁八條)는……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한서》
○ 풍속지(風俗志)와 형지(刑志)에 상세히 보인다.
○ 기자가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초학집시주(初學集詩註)》
○ 무왕 16년에 기자가 와서 조빙(朝聘)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기자가 주나라로 조빙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 도읍터를 지나다가 궁실이 모두 무너지고 그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는 것을 보았다. 기자가 몹시 상심하였으나, 목 놓아 울자니 옳지 않고, 눈물을 흘리자니 아낙네와 같겠기에 맥수시
(麥秀詩)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시는 예문지(藝文志)에 보인다. 은나라 백성들이 그 노래를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기》
○ 기자가 죽은 뒤에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를 높여서 왕이라 하면서 동쪽으로
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나라 왕실을 높이 받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자 중지하였다. 그러고는 예로 하여금 연나라로 가서 유세하게 하니, 연나라도 멈
추고서 공격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에서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어 서쪽 지방을 공격
하여 2천여 리의 지역을 차지한 다음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이에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위략(魏畧)》
○ 조선이 진(秦)나라의 전성기 때부터 복종하여 신하가 되었는데, 뒤에 또 험준한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는 진출하
려고 꾀하였다. 《사기(史記)》 율서(律書)
○ 《사기》의 시황본기(始皇本紀)에는, “26년에 천하를 나누어 36군으로 만들었는데, 지역이 동쪽으로는 바다와 조선
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서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長城)을 쌓아 요동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 왕
비(否)가 즉위하고는 진나라가 습격할 것이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하기는 하였으나 조회(朝會)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가 죽고 그의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는데, 20여 년 만에 진섭(陳涉)과 항적(項籍)이 기병(起兵)하였다. 살펴보건대,
진시황 33년 정해(丁亥)에 진나라에서 장성을 쌓았고, 5년 뒤인 이세(二世) 원년 임진(壬辰)에 진섭(陳涉)과 항적(項籍)
이 기병하였으니, 여기에서 20여 년이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ㆍ제(齊)ㆍ조(趙)의 백성들이 이를 근심하여 점점 도망쳐 조선의 준(準)에게 귀화하였다.
《후한서》에는 도망친 자가 수만 명이었다고 하였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서 살게 하였다. 《위략》
○ 기자가 죽은 뒤 40여 세대가 지나서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였다. 《후한서》
○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서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조선과는 격수(湨水)를 경계로 하였다. 그 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여 흉노(凶奴)로 들어감에 미쳐서, 연나라 사람 위만(衞滿)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격수를 건너와 준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그러고는 준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있는 옛 중국 땅에 살면서 망명해 온
자들과 함께 조선의 번병(藩屛)이 될 것을 청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博士)를 제수하고 규(圭)를 주고
1백 리의 땅을 봉하여 준 다음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도망해 온 무리들이 조금 많아지자 준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나라의 군사가 열 갈래의 길로 나누어 쳐들어온다고 거짓으로 고한 다음, 들어가서 숙위(宿衞)하겠다고 청
하였다. 그러고는 도리어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위략》
○ 삼가 살펴보건대, 격(淏)은 패(浿)의 잘못으로 기자강역조(箕子疆域條)에 상세히 보인다.
○ 조선후 준이 이미 참호(僣號)하여 왕이라 칭하다가 위만에게 공격당하여 나라를 빼앗겼다. 이에 부하들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서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박물지(博物志)》에는, “기자가 조선에 살았다. 그 뒤에 연(燕)을 정벌하고 다시 조선으로 갔다가 도망하여 바다
로 들어가서 선국사(鮮國師)가 되었다. 두 처(妻)는 묵색(墨色)이고, 두 마리의 푸른 뱀을 귀에 걸치고 있으니,
대개 구망(句芒)이다.” 하였다.
[주C-001]기자조선(箕子朝鮮) : 은(殷)나라의 현인(賢人)인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게 되자 조선(朝鮮)으로 동주(東走)
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가 곧 기자조선이다. 이 시기를 고고학적으로 편년하면 대개 청동기 시대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이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고조선(古朝鮮)의 실체가 공허하게 되
므로 한씨조선(韓氏朝鮮)ㆍ개아지조선ㆍ예맥조선(濊貊朝鮮) 등으로 대체(代替)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설도 그 어느 것 하나 꼭 합당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중국 문헌에 수록된 기자와 조선의
관계를 보면 기자와 기자조선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최근 중국 요령성(遼寧省) 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은말
주초(殷末周初)의 청동기(靑銅器)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고, ‘기후(箕侯)’, ‘고죽(孤竹)’이라고 하는 명문(銘文)이
보이고 있어서 중국 사서(史書)에 보이는 기자조선이 이 발해 연안 일대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학설이 나오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정신문화연구원, 1987, 140쪽》
[주D-001]그곳의 …… 범금팔조(犯禁八條) : 원본에는 ‘敎其民以禮義 因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로 되어 있으나,
이는 편찬자가 범금팔조를 기자가 만들었다는 종래의 학설에 구애되어 ‘전(田)’ 자를 ‘인(因)’ 자로 바꾸어서 잘못 기
록한 듯하기에 《한서(漢書)》 권28 지리지 제8연조(燕條)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이병도는 “기자가 조선에 와서 팔조의 금법을 만들어 인민들을 교화시켰다는 전설의 유래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전설의 장본(張本)은 《삼국지》 위지(魏志)의 ‘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 以敎之’와 《후한서》의 ‘昔 武王封
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其人終不相盜’에 있는데, 이는 이 두 책의 찬자(撰者)가 《한서》에 나
오는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의 구절을 ‘敎其民以禮義田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로 오독
(誤讀)하여 생긴 결과이다. 즉 작(作) 자는 위 구절의 직(織) 자와 연결하여 직조(織造)란 뜻으로 사용한 말인데, 작
자를 분리시켜 아래 구절에 붙인 것은 확실히 오독의 탓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위지》의 ‘作八條之敎’나 《후한서》의 ‘又制八條之敎’는 모두 그러한 불정독(不精讀)에서 범한 두찬(杜撰)인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7~58쪽》
[주D-002]스스로 …… 칭하면서 : 조선후가 왕을 칭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燕)나라가 왕을 칭한 것이 역왕
(易王) 10년(기원전 323)인 바, 이와 거의 같은 시기로 보면 대략 기원전 320년경이라고 짐작된다. 왕을 칭한 것은
다만 수장(首長)의 호칭의 변개(變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사회가 분명한 국가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을 선포
하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로 이해되며, 이를 한국사상(韓國史上)의 고대(古代)의 개막으로까지 보려는 견해가 있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쪽》
[주D-003]대부(大夫) 예(禮) : 대부는 고조선의 관직 이름이고, 예는 인명으로 짐작된다.
[주D-004]만반한(滿潘汗) : 만반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며, 요동군의 속현(屬縣)인 문현(文縣)과 번한현
(番汗縣)으로 보는 견해와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으로 비정(比定)하는 설이 있다. 이병도는 “패수(沛水)와 패수(浿水)
양수의 위치를 상고하는 것이 곧 번한현(番汗縣)의 위치와 요동군의 동계(東界)를 밝히는 첩경이 될 것이다.
패수(沛水)는 지금의 박천강(博川江), 패수(浿水)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 따라서 번한현의 위치를 지금
의 평안북도 박천군에 비정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71쪽》
천관우는 문현(文縣)을 태자하구(太子河口)인 영구(營口)의 남쪽, 즉 개평(蓋平)일 것으로 보아 만반한은 만주의 개평
과 평북(平北) 박천(博川)을 연결하는 선으로 추리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쪽》
[주D-005]몽염(蒙恬)을 …… 하였다 : 진시황(秦始皇) 32년(기원전 215)에 진나라 장수 몽염이 군사 30만 명을 거느
리고 융적(戎狄)을 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증축하였다.
[주D-006]격수(湨水) : 패수(浿水)의 잘못이다. 패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달라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은 “여러 설 가운데서 대동강을 패수
라고 칭한 설이 가장 명백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옳은지 모르겠다.” 하여 대동강으로 비정하였으며,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패수에는 네 개의 패수가 있는데, 한나라와 고조선이 경계를 이룬 패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하였고, 이병도는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고 보았고,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선은 시기에
따라 좀 들쭉날쭉하였으나, 대체로 패수 즉 오늘날의 대릉하(大凌河)였다.” 하였다.《조선전사 권2, 93쪽》
[주D-007]박사(博士) : 지방 장관의 직명으로 생각된다. 즉 고조선의 서부 국경 지대에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중국으
로부터의 유이민사회(流移民社會)에 대한 감독과 통솔의 권한을 위임받은 특수 관직일 것으로 생각된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1쪽》
[주D-008]구망(句芒) : 오행신(五行神)의 하나로 목(木)을 주관하는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