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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카페 게시글
★ 북핵-신입회원필독 1 스크랩 ‘越南(월남) 패망의 현장 목격자 李大鎔 (이대용, 당시 駐越대사관 공사)의 惡夢(악몽)’
정론직필 추천 23 조회 861 17.06.16 17:30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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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7.06.16 17:31

    첫댓글 아주 오래전 게시글인데.....
    스크랩으로 다시 퍼올렸습니다.

  • 17.06.16 17:45

    이대용은 육사7기로 중정부소속으로 대외직명 '공사'로 월남에서 있다가 월남이 항복해서 H기로 미국이 도망갈때 그냥 있다가 '월맹군'에 잡혀서 4년인가? 후에 귀국해서 당시에는 박정권때로 그런 소리를 한 것을 기억하지요.

  • 17.06.16 18:23

    노송 님의 생생한 현대사 체험기가 누구의 말보다 귀에 와닿습니다..

  • 17.06.16 19:47

    나는 통일 베트남이 허벌나게 부러울 따름이다, 됐나???

  • 17.07.30 22:09

    조윤선이가 사법연수원 출신 맞지요,, 사법연수원의 필독도서가 정약용선생님의 목민 심서가 아니고 그냥 권장도서랍니다, 썩을.

  • 17.06.16 22:10

    고딘 디엠은 한국의 이승만처럼 미국이 유엔감시 아래 총선을 무시하고 사이공정부를 세울 때 미국에서
    데려온 사람이지요. 저도 1966년에 맹호로 참전했는데 당시 월남인들은 월맹 호지명을 존경했습니다.
    호지명생일날은 가계 문을 닫았어요

  • 17.06.16 22:37

    당시 월남에는 국보법 같은 법이 없었나요?
    없었다고 하더라도 호치민 생일날 대놓고 가게문을 닫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때 우리나라에는 없던 사상의 자유가 있었나봅니다.

  • 17.06.18 10:56

    참전초기에 파월했군요. 사실 베트공(현지 반정부군=게릴라)을 소탕하는 것이 傭兵 한국군이지요. 나는 69년에 파월해서 빈딩성? 송카우 남쪽에서 포병으로 포대를 지휘한 경험이지요. 현지인인 월남사람들이니 주둔지 밖에 나가면 무척 경계태세를 해서 진지 안에만 지내는 처지라 포병이었던 것이 어쩌면 다행이지요.
    보병부대는 정글을 누비며 베트공을 잡는 것이니 참으로 위험했지요.월남사람들이 볼 때는 한국군은 침략용병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 17.06.18 06:54

    @노송 전우님 반갑습니다. 저는66년 1차 보충병으로 참전 했지요.
    군부대에서는 비들기 부대 비전투원으로 파월된다고 모집해서 비들기 마크 달고 오옴리 (1차)에서 교육을 받고, 미군용기로 출국하기 전에 비들기 마크를 떼고 맹호와 청용마크를 달았지요, 훈련기간에 가족면회도 금지 했지요.
    국내에서 선전과는 다르게 아군전사자들이 많아 보충병을 보내면서 속인 것이지요.
    오옴리에서 1차로 교육을 받은 파월장병은 모두 그렇게 속아서 파월 되었지요.
    첫 작전에(맹호 6호 )참전해서 전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보훈처에는 그 기록도 없어요.

  • 17.06.18 11:03

    @wander 그같은 참전과 보훈처에 기록이 없다면, 관할보훈지청에 가서 상담하세요. 비유하면"우는 아기 젖주는 식이예요"
    자기 노력없이 안됩니다. 특히, 국방부, 육본, 보훈처. 모두 완고해요. 내가 국방부. 육본에서 근무해본 경험이지요.
    모든 병적기록(님의 것)을 최대한 청구해서 살피세요. 부실하면 보충기록을 청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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