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연습이니까, 두려움도 괜찮아
“제대로 못 불러서 속상하지! 나도 정말 속상하구나.”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 하나. 라디오 방송국에서 학교마다 찾아다니며 노래 대항을 하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전 학년 반별 대표들 중에서 다시 선발한 학교대표들이 실제 무대에 나갔으니 그 열기는 대단했다. 난 우리 반 대표로 독창에 출전하게 되었다. 한 명, 한 명 순서대로 노래를 하고, 내 순서가 가까워지자 콩당콩당 가슴이 뛰고 열이 나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드디어 순서가 되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노래를 불렀지만 중간에 그만 가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회자는 괜찮다며 다시 하라고 했고 처음부터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무슨 마법의 덫에 걸린 듯, 같은 곳에서 또 노래를 멈추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이 내 옆으로 오셔서 격려해 주셨고, 아이들도 더 큰 박수를 쳐 주었다. 세 번째라도 성공적으로 노래를 끝까지 불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노래를 시작하고 얼마 후, 난 그 자리에 서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때, 무대까지 올라오신 담임선생님은 노래자랑이 계속 되는 무대를 벗어나 조용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계속 닭똥 같은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나를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번 방송은 연습경기라고 생각하자. 연습에서는 모두 두렵고 틀리는 거란다. 열심히 연습해서 이다음에 우리 TV에 나가서 불러보지 않을래?”
그 뒤로 참 열심히 노래 연습을 했었던 것 같다. TV에서 노래를 불러 보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항상 아픔보다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나는 미리 실전 같은 연습을 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이번 가족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 여행을 위해 인도, 네팔 연습 여행을 시도했다.
“드디어 출발이다. 아싸, 출발이다.”
뭐가 그리 좋은지 공항을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힘차 보였다. 연습 여행이 때로는 더 긴장되는 법,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고 준비할 것도 많았다. 경비 절감한다며 저가항공을 타고 두 번의 경유를 거쳐 인도로 갔다. 이전까지 한 번도 경유 비행기를 타보지 않았기에, 중간에 짐은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인지, 탑승은 또 어떻게 하는지 걱정이 앞섰다. 그동안 제법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다녀 온 경험이 있건만, 편하게 그냥 따라 다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
인도 뉴델리 공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 9시 30분. 시계를 보는 순간 마음이 바빠졌는지 남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빨리 뛰어 가자. 10시가 넘으면 안 될 것 같다.”
밤 10시가 그렇게 두려운 것은 처음이었다. ‘만약 당신이 밤늦게 인도에 도착한다면 위험하니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여행 책자의 한 구절! 우리 같은 왕 초보 배낭 여행자에게는 절대 어기면 안 되는 불문율이었다. 그 한 구절로 인해 우리 가족은 10시 이전의 공항탈출을 꿈꾸며 수화물 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웬걸? 어느새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짐은 나오지를 않았다. 10시를 훌쩍 넘겨, 짐을 찾고 입국 수속을 위해 배낭을 메고 또 뛰었다.
무슨 공항 입국수속장이 이렇단 말인가? 공사 중인 것을 충분히 감안해도 이렇게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공항을 본적은 없었다. 차례를 지키며 서 있다 보니, 대 여섯 명이 동시에 나가서 수속을 하기도 하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예사로 새치기를 했다. ‘인도라서 그런 거야.’ 라고 위로해 보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인도 땅을 밟는 순간 영혼의 고향에 온 것처럼 영감이 떠올랐다는데, 나는 인도 땅을 밟는 순간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해졌다.
입국 수속을 하고 나오니 10시 30분, 모든 사람들이 나간 뒤에도 우리 가족은 30m도 안 되는 거리의 입국장 문만 바라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저 문을 통과하면 모든 보호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함으로 감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막내가 멋진 제안을 했다.
“아빠, 차라리 나가지 말고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게 어때요? 저 문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이 안이 더 안전할 것 같은데요?”
모두 막내의 기특한 제안에 탄복하며, 안에서 밤을 새울만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한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알아듣기 힘든 인도식 영어였지만 분명한 것은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나갈 수 없으니 이곳에서 한 밤만 자게 해 달라고 애원 할 수도 없는 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없이 바깥 대합실로 나왔다.
후덥지근한 아열대 날씨가 그대로 느껴지는 바깥 대합실로 나오니 불안이 덮쳐 왔다. 쌍꺼풀 진 부리부리한 눈망울의 인도사람들만 가득한 공항 대합실은 안에서 본 무질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혼잡했다. 이곳에서 밤을 보내야만 한단 말인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데, 첫째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기 좀 보세요. VIP Room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마 외국인을 위한 곳인가 봐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VIP Room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입구에서 직원이 티켓을 보자며 우리를 제지했다. 서투른 영어와 손짓발짓으로 우리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다고 얘기를 하자 이곳은 비행기 티켓이 있어야 한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즈니스 석 티켓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 갈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부터 당치도 않은 장소였건만, 마치 손에 들고 있던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항상 돈에 민감한 막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낮에 다녀도 위험하다고 하는데, 이 밤에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면 어떡해요? 숙소비도 아끼고 여기서 잡시다.”
더 이상 다른 묘수가 있겠는가? 만장일치로 첫 숙박지를 인도 델리 공항 대합실로 정했다. 도착을 알리는 싸인 보드에는 밤새 수많은 비행기의 예정 도착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대합실에 밤새 사람들이 오간다는 말인데... 배낭은 어떻게 하고, 어디에 잠자리를 만들어 잔다는 말인가? 뉴델리 공항 대합실이 숙소로 결정 된 순간, 가장 안전하고 편한 곳을 찾기 위해 자그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지만,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대합실인데 그 시설인들 오죽하랴?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던 남편도 뾰족한 묘책은 없는 듯 이런 제안을 했다. “일단 빈 의자를 찾으면 가방을 체인으로 의자에 묶어라. 불편하더라도 오늘 하룻밤만 고생하자.”
남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모두 의자에 배낭을 묶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힐끗힐끗 우리를 쳐다보았다. 겁먹은 배낭여행 초보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이미 인도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 절대 넘보지 마라.’는 듯, 그들과 눈길이 마주치는 것은 피하면서, 그저 익숙한 듯 배낭을 의자에 칭칭 감아 매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산 자물쇠를 굳건히 채운 뒤,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인도인들은 우리와 눈이 마주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대로 더 빤히 쳐다봤다. ‘우리 물건을 노리는 걸까?, 예의도 없이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등등 온갖 생각들로 인해 딱딱한 의자만큼이나 마음도 불편해 졌다. 불편하다기 보다는 불안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어! 어! 어! 이게 뭐야?”
잠에서 막 깨어 난 둘째 아들은, 울긋불긋 솟아 오른 자신의 몸에 난 자국을 가리키며 탄식했다. 밤새 시끄러운 공항 의자에 앉아서 누워 잤으니, 잠을 잤다고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피곤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졸다가 아침을 맞이했건만... 그런데 웬걸? 인도 모기가 우리 다섯 명의 온 몸에 앉아 포식을 한 흔적들이 역력했다. 아들은 자신의 몸에 난 자국을 헤아려 보더니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100개가 넘는단다. 한국산 모기는 물어도 얌전하게 조그만 자국만 내는데, 이놈의 인도 모기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왕방울만 했다. 방금 해협을 건너 온 싱싱한 한국산 별식이니 신이 났을 것이다.
헌혈까지 해야 했던 인도의 첫 신고식을 마치고, 여행자 거리인 빠하르 간지로 무사히 입성했다. 숙소를 잡은 뒤 모두 넉 다운 되어 누웠지만, 가려운 모기 자국 때문에 잠도 오질 않았다.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있으려나?’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다가 혼자 중얼중얼 거렸다.
“연습이니까, 두려움도 괜찮아. 열심히 연습해서 본 경기에서 잘하면 돼.”
바로 40년 전 울고 있던 나에게 해 주시던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두렵지만 터널을 통과하다보면, 어느 순간 처음과 다른 익숙함을 얻게 되고, 그 익숙함이 쌓이면 스스로 헤쳐 나갈 힘도 얻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긴 여행을 위해 예방주사를 맞은 것 같은 든든한 마음... 그때의 기억이 아픔보다는 감동으로 남아있듯이 앞으로의 여행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