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이 있다
5월이 가까워 오자 40도를 넘는 인도날씨를 인내심만으로 참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이 어디 없을까?’
모두 숙소에 앉아 여행책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둘째가 가장 적당한 곳을 찾았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진짜 좋은 곳을 찾았다!”
‘맥그로 간지!’, ‘예전 인도인들의 여름 휴양지였던 곳’
이 두 문구만으로도 분명 이곳 델리보다는 시원할 터... 만장일치로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다. 그때 첫째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아빠, 왜 인도 땅에 티베트 사람들이 살고 있나요?”
딸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지 나도 그곳에 티베트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것을 몰랐다. 책에는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었다. ‘아 여기였구나. 인도를 오면서 이런 사실도 모르고 왔다니...’ 이전 여행지와는 다른 기대를 가지고, 다음 날 바로 20시간의 버스를 타고 여름 휴양지인 맥그로 간지로 달려갔다.
새벽에 도착해 보니, 여름휴양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약간 쌀쌀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정말 순박하고 음식도 푸짐했다.
“와 진짜 맛있어요. 꼭 우리나라 음식 같아요.”
우리 입맛에 맞는 만두와 비슷한 모모, 수제비와 비슷한 뗌뚝 그리고 샌드위치를 시켜 먹었다. 한마디로 따봉이다. 모두 게걸스럽게 뚝딱 먹어 치우고 한숨을 돌리는데, 막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전혀 인도사람들과 닮지 않았네요?”
정말 그랬다. 인도 땅임에도 인도인들이 없는 곳, 오히려 우리와 닮은 것 같은 티베트인들만 모여 사는 곳이 맥그로 간지였다. 외모만큼이나 아픈 역사도 비슷한 것 같아 묘한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1959년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있는 포탈라 궁을 중국군이 대포를 앞세워 포위했었고, 그 당시 18세의 소년이었던 달라이 라마는 험준한 산길을 타고 인도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인도정부가 티베트에게 초기 망명 정부지로 허락했던 ‘다람살라’에 정착했고, 그 후 현재의 ‘맥그로 간지’로 옮겨 왔다고 한다.
아침을 먹은 뒤, 이곳에 있는 남갈 사원과 티베트의 망명 정부를 보러 길을 나섰다.
“엄마, 저곳이 어디예요? 왜 저런 사진이 붙어 있는 거죠?”
아이들이 놀라며 가리키는 곳을 보니, 처참한 살상의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벽면을 따라 쭈욱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은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지난 3월 19일에 발생한 독립운동의 현장들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인들이 반 중국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현장을 담은 사진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눈길을 계속 보내기가 힘든 사진들 앞에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조금 더 가다가, 남갈 사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티베트 승려들이 독립을 위한 기도문을 낭송하고 있었는데, 단식 35일째라고 적혀 있다. 모두 할 말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도네이션 통에 막내가 가족을 대표해 지폐를 넣고 나왔는데, 그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진지했다. 사원 안에서는 오체투지를 하는 일반인들과 승려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조국을 빼앗긴 저들의 힘겨운 몸짓을 소용없는 헛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아픔을 눈앞에서 보니, 나 역시 그들의 고행에 함께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정녕 저들의 아픔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겠는가?
길을 걸어 가다보니 입구에 ‘쭐라강과 코라(Tsuglakang and Kora)’라는 팻말이 보였다. 망명정부를 중심에 두고 시계방향으로 산을 한 바퀴 빙 돌도록 만들어진 오솔길이 ‘코라’이고, 사원이 ‘쭐라강’이다. 겨우 30분 정도면 돌 수 있는 이 오솔길의 담장 너머에, 한나라의 임시 정부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하긴 우리나라 상해 임시정부는 이보다 훨씬 더 작은 건물 한 채였다. 현장을 직접 목격해서일까? 아이들도 이곳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티베트인들이 돌리는 경전 통인 ‘마니차’를 돌려보고, 바위에 적힌 기원문을 염원하듯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특별한 한 사람을 만났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들어갔는데, 벽에 탁아소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식당 주인에게 물어 찾아 간곳은, 바로 티베트 아이들을 돌봐주는 ‘록빠 탁아소’였다. 그곳의 책임자로 보이는 티베트 청년과 인사를 나누는데, 이 청년이 한국말을 술술 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자신의 부인이 한국 사람이고, 지금은 행사관계로 한국에 나가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충격적인 말을 해주었다.
“한국에 6.25 사변이 터졌을 때, 티베트도 중국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국제 정치의 요충지라고해서 유엔군이 도와주었고,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티베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티베트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의 30분 동안, 열변을 토하는 청년을 보면서, 몇 해 전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화려한 상해의 아파트촌을 지나, 좁고 초라한 골목길을 따라 가니 작은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좁은 출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가슴이 먹먹해 졌다.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의 사진, 임시 정부 때 사용했던 태극기 앞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김구선생님의 목소리가 가슴에서부터 메아리 쳐 왔다. 거사직전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 결연한 유언을 남긴 윤봉길 의사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아비가 없음을 서러워하지 말라.”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그분들의 고단하고 위대한 삶에 머리를 조아렸었다. 그러나 현실이 편안하고, 나라를 생각하기보다 내 안위가 먼저였기 때문일까? 기억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졌었다.
히말라야 중턱의 인도 땅에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나라 잃고 쫓겨난 아픔 속에서도, 힘없는 자국의 사람들을 위해 탁아소를 만들었다는 청년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히말라야를 넘어 자유를 찾아 왔지만, 자립하지 못하면 이곳에서도 라싸보다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기에, 그들이 자립할 때까지 아이들을 돌봐준다고 했다. 뜻을 정한 한 젊은이의 삶을 보며, 그래도 티베트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보았다.
아직도 록빠 탁아소에서 만난 티베트 청년의 애끓는 한마디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우리가 이 맥그로 간지에 살고 있지만, 이곳 땅도, 건물도 우리 소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인도 정부에서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투제체(고맙습니다)”라고 말하던 인도 속 티베트인들은 참 순하고 밝았다. 그러나, ‘Free Tibet'이라 적힌 곳곳의 깃발처럼 그들의 내면은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다. 그들의 작은 몸짓과 주변의 관심이 모이고 모여, 하루 빨리 자유의 날이 오기를 소원해 본다. 오늘은 유난히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의 후손이라는 것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