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상인들과 협상하는이이들의 모습
1-6 아이들의 가슴 속 힘을 느끼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시니? 하여튼 너희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여행을 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하여 하루 이상을 묵게 되면, 아이들은 신기하게 속도가 가장 빠른 PC방을 곧바로 찾아내곤 했다. 잠시만 하고 온다고 했지만, 한참을 자다 보면 밤늦게 살금살금 자신들의 숙소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여행자가 많은 곳이라고 해도, 도저히 그냥 넘어 갈수가 없어 또 잔소리를 해댔다. ‘여행을 나와서까지 이런 잔소리를 해야 하다니?’ 하는 마음이 들면서, 괜히 식구들 주렁주렁 달고 나왔다는 후회마저 밀려 왔다.
90살 노모가 70살 아들에게 ‘길 조심하거라.’ 라고 한다지만, 부모 눈에는 왜 그리 간섭해야 할 일이 많은지? 클 만큼 컸다고 해도, 왜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지? 이런 나에게 직격탄을 날린 아이들의 무용담이 있다.
인도, 네팔 여행이 끝나 갈 즈음, 아이들이 친구들의 선물을 사야 한다며, ‘코넛 플레이스’에 가겠다고 했다.
“엄마, 아빠는 숙소에 쉬고 계세요. 저희들끼리 다녀 올 게요.”
인도가 어떤 곳인데 본인들만 가겠다니, 황당한 마음이 들어 물었다.
“왜 그렇게 멀리 가려고 하니? 그냥 이곳 여행자 거리에서 사면 될 것을...”
솔직히 우리 두 사람은 4월말이 되면서, 40도를 웃도는 인도 날씨와 그동안의 여행으로 지쳐 더 이상 꼼짝하기가 싫었다.
“이곳 여행자 거리는 가격이 비싸요. 코넛 플레이스는 우리나라 동대문 같은 재래시장이 이라서 실제 인도사람이 사는 가격으로 살 수 있어요.”
세 명이 돌아가며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를 말하고, 2,000루피(5만 원 정도)씩만 주면, 그 안에서 선물을 사오겠단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조목조목 말하는 아이들을 내 보내고 남편과 의논을 하니, 남편이 정곡을 찌르며 말했다.
“꼭 자기들이 필요한 것은 말 안 해도 잘도 알아 오는구먼!”
나보다 훨씬 꼼꼼한 남편의 눈에는 아이들이 더 못 미더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한 정보를 수집했더라도 안전문제가 걸리니, 결국은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괜찮다며 본인들만 갔다 오겠다는 아이들을 보며 ‘겨우 한 달 여행했다고 너희가 완전 어른이 다 된 줄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아빠,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으니 비싼 택시 타지 말고 지하철을 타고 가요.”
지하철역이 근처에 있다고? 정말 지하철역이 우리 숙소가 있는 빠하르 간지 바로 옆에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나 할까? 이렇게 가까이 두고 그동안 비싼 택시만 타고 다녔다니, 웃음이 나왔다.
표를 사러 간 아이들이 직원과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보였다.
“잔돈이 모자라요. 5루피(125원 정도) 더 주세요.”
막내가 직원을 향해 따지듯이 말하고 있었다. 여행객은 잘 모르는 줄 알고 잔돈을 엉터리로 준다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계산을 해 보니 정말 틀려서 돌려받았다고 한다.
‘어쭈 이 녀석들, 잔돈을 제대로 챙기기까지 하네...’
우린 아직도 인도사람들과 영어로 인사하는 것도 두려운데, 역시 아이들이 빠르긴 빠른 것 같다.
인도 지하철은 들어 갈 때 마다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고,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몸 검사와 소지품을 검사했다. ‘무슨 대통령 만나는 것도 아닌데 이러냐?’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가방 안을 다 뒤졌다. 지하철 내에서도 TV를 통해 미국의 9.11테러 영상을 보여주면서 신고하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불안한 인도사회를 보는 것 같아 재래시장을 간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를 않았다.
드디어 코넛 플레이스에 도착하여 아이들에게 5만원씩을 주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따라 다니며 상황을 살폈는데, 생각보다 사람도 많고 관광객도 보여, 최종적으로 만날 장소만 정하고 우리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4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돌아 왔다. 물건은 하나도 사지 않은 채... 그러면서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말하는데 모두 신이 난 표정들이었다. 가장 먼저 막내가 말했다.
“엄마, 아빠! 내일 저희들 한 번 더 와야겠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아이들을 쳐다보니, 둘째가 상황 설명을 했다.
“인도 상인들은 가격을 정말 터무니없이 많이 불러요.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많이 물어보고 깎아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안낸다는 거예요.”
상인들이 화를 안내는 것과 내일 다시 와야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인도상인들은 화를 잘 안 내요. 대신 정말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에 제대로 협상을 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만 손해를 보게 되요. 그래서 내일 다시 와서 사 보려고요.”
이런 아이들의 제안에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너희들이 4시간 동안이나 인도 상인들과 협상하며 다녔다는 것이 정말 장하다. 좋아, 내일 다시 한 번 와 보자. 내일은 꼭 성공할 수 있겠지?”
아이들은 천하를 얻은 듯 기뻐했다. 그런 이유로 다음 날 다시 똑 같은 장소에 5명이 갔다. 우리 부부는 또 같은 의자에 앉아 오가는 인도사람들만 쳐다보고 있는데, 인도 모기는 연신 온몸을 공격하며 괴롭혔다. 남편도 괴로운 듯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어 대며 말했다.
“이 놈들이 우리가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 챘나? 왜 이리 몰려들지?”
도착 첫날의 헌혈식이 다시 재현되는 듯, 인도사람들은 멀쩡한데 우리만 팔 다리가 또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이틀 만에 모두 해결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날도 역시 아이들은 빈손으로 돌아 왔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가격이 아닌 것 같다며...
‘무슨 애들이 이렇게 독종인가?’
모기 때문에 힘들었던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은 팔을 긁적이면서도 또 한 번의 투쟁을 계획하는 아이들과 같은 편이 되어 버렸다. 결국 삼일 째도 우리는 코넛 플레이스로 출동했다. 4시간이 지난 뒤 아이들이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야호, 엄마! 이것 보세요! 정말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사는데 성공했어요.”
아이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자신들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빠, 인도 상인도 별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결국은 화를 내던데요?”
결국 아이들이 인도상인을 화나게 한 것이었다. 유들유들한 인도 상인보다 더 독한 놈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십대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들은 1/5 가격으로 물건을 샀다. 열 명 넘는 친구들의 선물을, 삼만 원 정도에 해결하고 남은 2만원을 돌려주는 순간, 인도에서 한강변의 기적을 만들어 낸 강인한 한국인의 탄생을 보는 듯 했다.
인도인들은 어릴 적부터 토론은 얼마든지 하되, 화를 내는 것은 곧 지는 것으로 교육 받는다고 한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더운 날씨에도 화를 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만약 이들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을 아이들이 해냈다. 아이들에게는 잠재된 힘이 있는데도, 엄마인 나는 여전히 내 품 안의 잔소리 대상으로만 여길 때가 많았다. 이런 자신이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아이들은 가슴 속에 무한한 힘을 지니고 날개 짓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