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35살의 뒤늦은 사춘기
“진즉 제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방황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참으로 영민해 보이는 한 청년이 힘없이 고개를 떨군 체 말을 이어 갔다.
“제가 과학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입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하는 동안은 실패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35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네요.”
아르헨티나에서 잠시 쉬며 남미여행 계획을 세울 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던 한 청년의 고백이었다. 다른 청년들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한마디씩 위로를 하는데, 그 청년의 다음 한마디에 모두 멍하니 청년을 바라보았다.
“제가 3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사춘기를 앓는 것 같아서,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앓아누우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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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면서 한국 청년들을 많이 만났었는데, 그 중에는 특별히 30살 후반, 심지어는 40살이 넘는 청년들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35살, 40살이면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혹은 가정의 엄마, 아빠가 되어야 할 나이인데, 이들이 배낭을 메고 먼 타국 땅에서 때늦은 사춘기를 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대부분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거의 직장 경험이 있었고,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으며 자신의 앞날에 대해 다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전공학과나 전에 근무했던 직장에 대해 한결같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을 다녔다는 그 청년은 어느 날 문득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라는 회의가 들었단다. 청년을 바라보던 30대 초반의 아가씨가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내가 뭘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해보고, 성적 맞추어 대학만 가면 되는 줄 알았으니 자신의 적성을 알 리가 없지요.”
말을 이어 또 한명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 놓았다.
“저도 직장에서 몇 개월 일하니까 그때부터 회의감이 들었어요.”
“부모님은 내 자식이 대기업 들어갔다거나, 좋은 직장 들어갔다고 좋아하시는데, 정작 본인은 매일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참 우습지요?”
초저녁부터 시작된 청년들의 한숨 섞인 고민은 새벽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이어졌다. 남미의 밤하늘 아래서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나비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비의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오는 과정을 아는가? 단단한 고치 속에서 날개 짓을 하며 그 벽을 깨고 나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과정이다. 참으로 바라보기에도 안쓰러운 몸부림이다. 나비가 좀 더 편하게 빠르게 고치를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살며시 가위로 구멍을 내어 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나비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비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비가 날개 짓을 할 수 있는 힘은 고치를 벗어나려는 필사의 노력 가운데 스스로 날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고 한다. 과학적으로도 나비는 고치 안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칠 때 날개에 단백질이 모아지면서 힘이 생겨서 힘차게 날개 짓을 할 수 있게 된다고 것이다. 즉, 누군가가 돕기 위해 압박을 쉽게 풀어주면 쉽게 고치를 빠져나온 나비는 날개에 힘이 없어 스스로 날지를 못하게 된다. 결국 날수 없는 나비는 결국 죽게 되는 것이다.’
신이 만드신 자연의 법칙에서 때로는 인생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일년생 나비의 짧은 생애에서도 자신 스스로 몸부림쳐야 건강하고 제대로 된 생명을 보장 받을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약 나비를 섣불리 도우는 것이 오히려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가위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긴 인생은 어떠한가? 우리 부모들은 말로는 아이들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신기하게 또래의 아이가 먼저 앞서가는 순간, 그때부터 경쟁의 도가니로 아이를 몰아넣는 경우가 많다.
“일단 대학가고 나서 고민하자. 지금은 공부가 급해.”
“엄마가 좋은 학원 다 알아 놓았어. 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멍하게 고민하는 시간에 책에 있는 글자 한자라도 더 외워. 그게 훨씬 중요하단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조차 아깝게 여기며 오로지 좋은 대학을 위한 엄마 표 스케줄에 기계처럼 움직이도록 강요받은 아이들...... 어느 새 이런 풍경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고, 엄마의 정보력이 없으면 엄마의 역할을 못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 사회...... 사교육에 찌든 한 초등학생의 말이 엄마에게는 흐뭇함이 될 수 있을까?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가야 될 학원과 배워야 할 모든 프로그램을 미리 짜놓고 나를 기다린 것 같아요. 마치 영원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괴물처럼 말이에요.”
부모가 먼저 나서서 모든 어려움에 가위질을 하는 것이 좋은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랑이라 생각하지만, 결과는 내 아이에게 독약을 준 꼴이 되는 경우가 많음을 나비의 교훈에서 배울 수 있다. 상담실을 찾은 한 어머니의 절망스러운 목소리에서도 그런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전 교육에 미친 엄마였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아파하는 줄도 모르고 그놈의 공부가 뭐라고...... 이제는 친구랑 어울리고 밖에 나가서 놀고 그렇게만 해도 소원이 없겠습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엄마의 절규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은둔 족 아이 앞에서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여행지에서 돌아 온 뒤에, 우리 집의 세 아이는 대학을 가지 않고 자녀독립프로젝트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먼저 해 보고 있다. 아이들은 여행지에서 고민 많던 선배들을 만나면서 결코 대학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 것 같다.
우리가 돌아 온지 2년도 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도 청년들의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남들이 정한 기준에 맞춰 살아왔다면,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진짜 내 인생을 꾸리고 싶어 새롭게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2012년 9월에 개교한 국제한식조리학교에 35세의 나이에 한식 세프가 되기 위해 도전장을 내민 한 청년의 말이다. 이 청년은 엄친아의 표본과도 같다. 과학고를 졸업하고 KAIST에서 학사·석사를 받았다. 대기업에서 프로그래머로, 회계 법인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는 동안 연봉도 남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빠진 듯 허전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틀에 박힌 직장에서는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식을 통해 나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구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부모가 들으면 미친 짓이 따로 없을 것 같은 말이다. 부모의 시각에서는 왜 이들의 행동이 미친 짓으로 느껴질까? 부모 세대의 교육은 신분상승 및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해 주는 결정적인 근원이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먹고 사는 일에 걱정 없이 자란 우리 자녀들은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유와 개성발휘와 자아실현일 수 있음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밤늦게까지 아이들은 학원가에서 투쟁하듯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엄마들은 차안에서 김밥을 먹이면서 영어단어를 틀어주며 아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바쁘게 최선을 다하는 그 동작에서 잠시 물러나 먼저 질문해 봤으면 한다.
“네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뭐니? 어떤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뛸 수 있겠니?”
한 번의 질문으로 답이 나올 리 없지만, 수없이 이런 질문을 아이 스스로 하도록 했으면 한다. 질문은 아이 인생의 소중한 날개 짓이 되어 언젠가는 힘차게 고치를 깨고 나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35살 청년들의 고민이 영영 날지 못하는 날개 짓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울림을 준 김난도 교수도 말하지 않았던가? 일생을 80으로 친다면 25살은 아침 7시 30분에 해당된다고...... 우린 좀 더 현실적으로 다시 계산해 보았으면 한다. 기대수명이 길어졌으니 100살로 잡아 보자. 그렇다면 35살은 이제 아침 8시경밖에 되지 않았다. 충분히 길 위에서 물어보고 또 물어봐도 늦지 않은 나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