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만 힘든 것일까?
#나를 사라지게 한 엄마라는 이름
이제 3개월 된 아들을 키우느라 초보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서만 지내는 일이 많다. 아이가 잘 놀며 방긋 방긋 웃을 때면 온 세상을 얻은 것 같다가도 때로는 감옥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든다. 아기 배변 색깔만 이상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결혼 초기의 아내, 엄마역할도 힘들지만 시댁, 친정도 결혼 전과는 달리 신경을 써야 한다.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 했는데 더 큰 외로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다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환상적인 결혼 생활을 꿈 꾼 것은 아니지만 현실은 이것저것 요구사항만 늘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유치원생, 초등생의 두 아이를 둔 엄마의 하루는 고달프다.
“이제는 진짜 일어나야 된단다. 제발!!”
연년생인 두 아이를 깨우면서부터 아침이 시작된다. 겨우 아침을 먹이고 둘째 유치원 등원을 시키기까지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오늘은 유달리 둘째가 보채는 통에 다른 때보다 맥이 빠진다. 두 아이를 보내고 후다닥 식탁 위의 널브러진 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식구들이 벗어 놓은 옷을 주섬주섬 주워서 세탁기에 집어넣고, 청소기를 돌리려다 문득 베란다 창문을 쳐다보았다. 멍하니 꾀죄죄한 아줌마가 서 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한다.
‘나도 정말 예뻤을 때가 있었는데..... 떡 하니 서 있는 저 아줌마는 누구란 말인가?’
낯설지만 엄연히 자신인 모습. 사회로부터 밀려난 느낌마저 와락 밀려온다.
#엄마의 아침은 여전히 전쟁이다.
엄마의 아침은 전쟁의 시작이다. 유치원 때부터 깨워야 일어나던 아들 녀석은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아침기상 알람은 엄마의 고함소리 뿐 인줄 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먹여 보내려고 전전긍긍 하며 아이 비위를 맞춰 준다. 눈 돌릴 틈도 없이 대학생이 된 딸의 방문을 와락 열어젖힌다. 딸은 더 가관이다. 언제 집에 들어 왔는지 아직도 드르렁 코를 골며 한밤중이다. 수강 시간표를 미리 알고 있는 엄마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첫 교시부터 수업인데..... 급히 흔들어 깨운다. 미동도 하지 않는 딸에게 마지막 협박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안 일어나면 또 지각이다. 엄마는 모른다. 학점 낮으면 죽는 줄 알아!”
마지못해 일어난 딸은 후다닥 나가려 한다. 밥 먹고 가라는 소리에 볼멘소리로 화를 버럭 내는 딸.
“조금만 더 일찍 깨워 주던가? 밥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건지...... 가족이 모두 나가 버린 집안은 정적이 맴돈다. 잠시 소파에 앉으니 갑자기 힘이 쫙 빠진다. 한숨을 내 쉬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중얼 거린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끔찍한 짓을 계속해야 되나?”
#빈 둥지 증후군
“아니 당신이 어쩐 일로 화분을 사오는 거야?”
“그냥 나도 한번 키워 보려고.....”
대학까지 16년을 학교만 다니다, 바로 발령을 받아서 학교에서만 22년을 교사로 보낸 나는 살림에는 젬병이다. 원래부터 정리정돈에는 재주가 없는 관계로 화분을 키우는 취미 따위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은 다른 집 아이들보다 빨리 독립을 했다. 3명의 아이들이 복작복작 대던 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남편과 둘만 남은 집에서 말없는 남편에게 앵무새처럼 떠들고 싶지도 않았다. 반찬도 만들고 싶지가 않고, 안 그래도 못하는 살림은 더 시들해졌다.
문득 꽃집을 지나다가 예쁜 화분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올망졸망 피어 있는 꽃, 하늘하늘 거리는 연초록 새싹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주섬주섬 화분을 골라서 낑낑대며 집으로 가져 왔다. 화분은 빨강, 노랑, 파랑 등 총천연색이다. 결국 화분에 물을 주고 관리하는 것은 남편 몫이 되어 버렸지만.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아이들이 나가버린 자리가 너무도 허전하다는 것을. 화분의 꽃을 보면서 새 생명을 보듯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아이들을 사랑한 것보다 아이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훨씬 컸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가족주기
4살, 3살, 1살의 아이를 키우면서 맞벌이를 해야 했을 때 소망은 딱 한가지였다.
“하루만이라도 나 혼자 있고 싶다.”
남의 이야기로만 여겼는데 어느 새 혼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상담실에서 상담을 하다보면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경우도 있다. 세월이 이렇게 쏜살같이 흘러 갈 줄은 몰랐다.
우리 인생에서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누구나 지나야 할 터널이 있다. 가족주기가 바로 그것이다. 가족주기는 대략적으로 다음의 다섯 단계를 거치게 된다. 가정 형성기-자녀 양육기-자녀 교육기-자녀 독립기-노후기이다. 이 부분을 인식하는 것이 현재의 부모역할에 대한 통찰과 인내심을 갖게 한다. 다른 사람과 괜히 비교하여 마음을 힘들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첫 번째, 가정형성기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같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점을 말한다. 결혼을 하게 되고 자녀의 출산을 앞 둔 시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모든 것의 중심으로 보인다. 꿈꾸어 왔던 결혼에 대한 이상이 조금은 유지되는 시기라 할 것이다.
두 번째, 자녀 양육기는 첫아기 출생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양육이 익숙하지 않아 당황하기도 하지만 자녀가 주는 기쁨이 반짝반짝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식구가 늘어남으로써 청소, 세탁, 육아 등 가사 노동이 급증하므로, 부모에게는 신체적으로도 힘들고 시간과 노력 소모가 큰 때이다.
세 번째, 자녀 교육기는 맏이가 초등학교 입학 후 막내의 대학 졸업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이 부모로서는 자녀양육 문제로 좌절감을 겪기도 하고 부부간의 교육관의 의견차이로 힘들어지기도 한다. 이때 부부가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그 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자녀문제로 부부관계가 더 나빠지기도 하고, 오히려 자녀문제를 해결하면서 부부관계가 돈독해 지기도 한다.
네 번째, 자녀 독립기는 첫 자녀가 군 입대나 취업·결혼 등으로 가정을 떠날 때부터 마지막 자녀가 독립하게 될 때까지의 기간이다.
마지막, 노후기는 자녀가 독립하여 가정을 떠나거나 결혼한 자녀와 동거하는 시기이다. 자녀수가 적어지고 평균 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노후기가 점차 길어지고 있다. 직업에서 은퇴하는 시기, 신체 기능의 쇠퇴나 가정 또는 사회에서의 위치상실·고독·소외감 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심리적 변화에 잘 적응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항상 도전적인 가정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대부분 가족주기를 거쳐야 한다. 완벽하게 준비하여 주기마다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부모역할은 아이가 어릴 때는 초등 수학을 푸는 것 같지만, 점점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대수학을 푸는 것처럼 어려워진다. 당혹감을 자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정은 항상 도전적이다. 모두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평탄하게 잘 꾸려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문을 닫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낑낑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우리가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 졌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행복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는데 한분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문득 그때의 질문이 떠오른다. 이렇게 답변을 드렸던 것 같다.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말씀도 옳습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동안의 내 삶의 흔적이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가 되었고, 힘이 되어 주었다면 죽음 뒤에도 그 누군가로 인해 나의 존재가 가치 있게 연결되지 않을까요?”
명쾌한 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오늘을 포기하지 않듯이, 가정이 항상 도전적이라서 겁부터 내어 버린다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나와 아이에게는 의미가 되어 남는다. 누구나 처음이기에 서투른 것이 당연하다. 서툴지만 내 삶의 흔적이 아이의 인생에 의미가 되고 밑거름이 되면 충분한 것이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기에 서로 위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