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부모는 왜 이렇게 미안해할까요?
#완벽하지 않은 부모
누구나 부모가 되면 가슴 벅찬 환희를 느낀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으로 키우는 부모가 될 거야.’라고 다짐한다.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꿈도 간절해진다.
‘아이한테 무식하게 윽박지르지 않고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친구처럼 지내는 부모가 될 거야.’
현실은 어떨까?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고 주변을 탐색하는 시기부터 부모 역할이 만만치 않다. 컵을 깨트리고, 물을 엎지르고, 아무거나 입에 가져가 버리는 통에 엄마는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낙서를 하고 고집을 부리며 땅바닥에 드러누울 때면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다. 자애롭게만 감당하기에는 현실이 벅차다. 마치 “너의 한계가 어디인고?”라고 시험하는 듯하다. 자괴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다. 도대체 정해진 공식도 없고 갈수록 문제의 난이도는 깊어지고 종류는 많아지고..... 어느 날부터는 덤벼들기까지 한다. 아이 방에 들어가서 한마디 했더니 이방인을 대하듯 쏘아붙이는 아들.
“아 됐다고요..... 자기도 별수 없으면서.....”
중학생 아들의 험악한 말투와 표정으로 인해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며 상담 시간 내내 울기만 하는 엄마. 이런 상황들을 겪으면 양육에 대한 자신감은 사라지고 점점 당황스러워진다.
당황한 부모들의 특징은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의 처방전을 쓸 수밖에 없다. 컵을 깨트린 아이에게 “그러니까 엄마가 조심하라고 했잖아!”라며 야단침으로써 각성시키려 한다. 낙서를 하면 “두 팔 들고 서서 반성해! 잘했어? 잘못했어?”라고 벌을 세운다. 말을 안 들을 때는 “경찰 아저씨한테 일러 줄 거야.”라는 협박도 서슴지 않게 된다. 말로 하는 협박이 소용이 없게 되면 휴대폰을 압수했다 돌려주기를 반복한다. 외출금지, 용돈 감하기 등등, 연령에 따라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치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다. 조금은 효과가 있어 보이고, 생각나는 방법은 이런 것뿐이니 어쩔 수가 없다.
부모의 양육방식이 아이와의 관계보다는 문제해결에 초점을 두게 되고 아이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통제의 결과로 아이가 변화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히려 반대일 경우가 많다. 부모는 다시 좌절감을 겪으면서 자책하기 시작한다. 맞벌이를 해야 하고 제대로 못 챙겨주는 상황이면 자책을 넘어 죄책감까지 갖게 된다.
“나는 좋은 부모가 아니야. 도저히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나봐.”
완벽하게 잘 하고 싶었는데,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온다.
#완벽한 엄마, 충분히 좋은 엄마
“아이를 뿌리부터 휘 저어 놓은 것 같아요. 멀쩡한 아이를 내가 망쳐 놓다니.....”
“새근새근 자는 얼굴을 보면 너무도 예쁜데.....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돌아서면 마음이 안쓰러운데 아이를 쳐다보면 버럭 화를 내게 됩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자책을 한다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부모가 있기는 한 걸까? 이제부터는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고 자책하지도 말고 너무 미안해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대상관계 이론가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utt)은 100퍼센트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보다, 충분히 좋은 엄마(good-enough mother)가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충분히 좋은 엄마(good-enough mother)는 어떤 엄마일까? 이 정도면 괜찮은(good-enough) 엄마를 의미한다.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부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상으로 인정하는 엄마이다. 나의 에너지도 한계가 있음을 아는 엄마이다. 그래서 아이나 주변을 돌보기도 하지만 자신을 지나치게 희생하지도 않는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잘해주기도 하지만 안 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너무 미안해하지 않는다. 즉, 아이가 겪는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엄마이다. 좌절을 경험하는 아이에게 공감하며 함께 해 주지만 무조건 본인이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이렇게 엄마의 공감 아래 최적의 좌절을 경험한 아이는 이다음의 더 큰 좌절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는 아이의 필요를 다 채워 주는 엄마, 절대 화 내지 않고 최고로 해 주려는 엄마를 꿈꾼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 버리면 결국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박탈당하게 된다. 아이를 위한다는 것이 결국 아이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이에게 완벽하게 채워 주려는 것에는 아이 역시 나의 기대를 채워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결국 아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설계하려는 마녀가 될 수 있다. 마녀라고 하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나?”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일리가 있어 보인다. 완벽하려는 엄마는 이런 소리를 듣기도 한다.
“누가 해 달라고 했냐고요? 자기가 난리를 떨어 놓고는....”
이런 아이의 반응에 섭섭함과 우울함을 느낀다. 자신에 대한 돌봄은 뒤로 미루면서 타인을 챙겼기 때문에 원망을 쏟아 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자신도 모르게 한탄을 하게 된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지...”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도 완벽하려는 엄마는 자주 격노하는 경향이 있다. 에너지를 아이를 위해 소진하기 때문에 결국은 마지막에 화를 냄으로써 관계를 깨트리는 경향이 있다. 엄마는 에너지가 없어서 화를 내는 것이지만, 아이는 격노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의 존재를 해석하게 된다.
‘내가 나쁜 아이라서 엄마가 나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거야.’
아이에게도 죄책감을 주어 부정적 자아상을 갖게 할 수 있다. 완벽한 엄마처럼 보였는데 결국은 마녀처럼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완벽한 엄마는 마녀라는 말이 억울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이만하면 좋은 엄마(good-enough mother)로 거듭나기
부모의 자책은 아이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실제는 자신에게 ‘자책’이라는 벌을 줌으로써 내 마음의 불편을 덜기 위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위한 행동이지 아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행동은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책하는 틈을 알고 자신의 요구를 해 오기도 한다. 그러면 부모는 무장해제 된 마음상태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자책은 결국 아이에게도 부모를 이용하도록 하는 기회를 엿보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신기하게 부모의 마음을 미묘하게 읽어 내려가는 능력이 있다. 미안해하는 부모마음을 노려서 자기 것을 성취하지만 아이 역시 죄책감을 갖게 될 뿐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책하는 마음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상담을 하면서 엄마들께 종종 이런 요청을 한다.
“너무 진수성찬으로, 영양식으로만 음식을 차리려고 하지 마세요. 라면을 먹이더라도 엄마가 건강하게 있어 주는 것이 더 좋은 엄마입니다.”
밥하기가 죽기보다 싫다는 엄마에게는 시켜주어도 된다고 한다. 설거지가 꼴도 보기 싫다는 엄마에게는 하루정도 그냥 밀쳐두라고 권한다. 잠시 쌀을 씻어서 전기밥솥에 올리면 되는 것이지만, 나에게 에너지가 없을 때는 태백산맥을 넘는 것보다 힘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에너지도 분명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굵고 짧게 가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오래도록 함께 가는 것이 부모역할의 원칙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유럽의 한 나라에서는 적군의 공격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유아 아이들만이라도 시골로 보내 지켜주려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시골로 보낸 아이들이, 도심에서 전쟁으로 죽은 아이들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왜일까? 시골로 보내진 아이들은 음식과 환경은 좋았지만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정서적인 불안으로 면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완벽해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부족한 부모라도 간절히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다. 그런 귀중한 존재가 바로 엄마, 아빠이다. 너무 미안해하지도 말고, 너무 잘하려고 끙끙대지 않았으면 한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꾸려 갈수록 아이는 자신의 인생도 낙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