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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kcdc 유료 새벽 설교 자료|요약설교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필립 켈러는 『목자가 본 시편 23편』이란 책에서 자기 아내의 질병과 죽음을 통해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신실하신 은혜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필립은 아내가 낫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종종 혼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오, 하나님! 지금은 이것이 제게 너무도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것이 제가 더 좋은 위치에 이르는 가장 쉽고도 평탄한 길이었다는 것이 입증될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어려운 일들과 불행했던 날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마다 그분께서 나와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신 것을 발견한다. 그 순간 나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는 평안과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굳은 확신으로 바뀐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더욱 높은 영적 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새롭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의 삶에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인내심을 가져다준다. 아내가 병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계속적으로 회복되고 새롭게 되었다.” 하나님은 도움을 구하는 필립의 기도에도 그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평강으로 응답하셨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베드로 사도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말로 편지를 시합니다. 은혜와 평강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온다고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지금의 힘든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불안하고 초조한 현실에서 짐짓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으면 새로운 힘을 얻고 재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어려울수록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믿음의 터를 굳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되면 삶의 낙오자가 될 수 있고 주님의 선하심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가 우리의 구상이나 계획에 잘 들어맞지 않을 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도 바울도 그가 여러 교회에 보낸 여러 편지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인사말을 썼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이런 인사말은 평화를 비는 유대인의 인사(삼상 25 6)에 은혜를 비는 말을 덧붙여서 확대한 것입니다(롬 5:1~2). 여기서 평강(평화)이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보호벽 같은 것입니다(빌4: 7).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은혜와 평강은,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부여해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기도하는 성도가 더 많이 기도하고, 은혜 받는 성도가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믿음이 견고한 성도는 더 큰 믿음을 소유하고, 찬양을 잘하는 성도가 더 뜨겁게 열심히 찬양합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교인은 기도하지 않고, 은혜를 못 받은 교인은 죽어도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교인은 믿음을 소유하지 못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교인은 예배시간에 입도 벙긋하지 않습니다. 이러니 신앙의 세계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형상을 목회자의 눈으로 볼 때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성도들에게는 영감이 있어야 합니다. 영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기도로 찾아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늙어 병석에서 죽으려 할 때 요아스 왕이 찾아와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때 엘리사 선지자는 임종 병석에서 몸을 일으켜 왕의 손으로 활을 잡게 하여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여니 활을 “쏘소서.” 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왕과 백성들에게 튼튼한 성벽 같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사자로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 선지자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할 때에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 2:9) 하였고,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한 그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똑같이 갈망했습니다. 이 모든 영적 권위 있는 엘리사의 역사는 엘리야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아 이방인에게 까지 하나님을 알리고, 이스라엘을 지킨 병거와 마병의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스승, 우리의 구원의 주 예수님께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모든 성도가 바라는 분깃입니다. “은혜”는 그 안에 하나님의 분깃이 있고, “평강”은 그 안에 사람의 분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는 은혜를 누립니다. 은혜의 목적은 우리의 평강을 위한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더욱 많아지게” 하는 축복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런 욕심은 괜찮습니다. 영적인 욕심은 죄를 낳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탄력을 갖게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더 많아지고 풍성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물과 같습니다. 고이기도 하고 흐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보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저축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축복은 이론이 아니고 체험인즉 주님을 체험하여 은혜와 평강이 더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소속감은 자신의 긍지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지를 가슴에 붙이고 다니거나 소속을 적은 명함을 내밉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있음으로 배지를 달거나 명함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2015년 새해에 하나님께 속한 성도라는 신망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의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한 농부가 윗도리는 북군의 군복을, 바지는 남군의 군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는 상황에 따라 한쪽 편으로 가장하면 안전하리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의 격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가운데에서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못하고 양쪽 군의 사격을 받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의 시신조차 아무도 수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소속이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이요 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기다라고 있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잠시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랑스러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의 진짜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사회 공동체에서 살고 있습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삽시다. 그리스도인의 색깔을 분명히 합시다. 우리는 진짜 기독교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모습이 분명하고 생활이 진실하면 그들은 우정 그 너머에 ‘존경의 시선’을 보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솔직히 말해서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생활로 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이 말씀은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단의 영, 거짓 선지자의 영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기는 해도 육체로 오심을 믿지 않는 이단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이적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구원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세상을 이깁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4).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믿음의 확신은 구원의 표징입니다. 교회는 다녀도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늘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고백은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승리로 이끕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세상을 이겼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세상을 이겼습니다.’ ‘나는 사단을 이기었습니다.’ 이런 확신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6).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늘 생각하면서 내가 사단의 유혹에 빠져 곁길로 가고 있지나 않는지 내 자신을 점검 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변화와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해드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슈바이처 박사는 나이 30이 되기까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음악과 문학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멀리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아프리카로 달려가 90평생을 흑인들의 고름을 만져 주면서 인도주의적인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미개한 흑인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내게 유익이 있을 때뿐 아니라 내게 아무런 보상이 따라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실천할 때, 진실한 삶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창조적인 삶은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시내 중심가 빈민촌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는 전도사님으로부터 한 십대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빈민가 출신으로 전도사님이 인솔했던 교회 수련회에 일주일간 참석을 했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섬기는 사람들의 사랑에 마음이 녹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그에게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걱정해 주고 돌봐주던 그 모습 때문이었죠.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보여주었어요. 지금까지는 아무도 날 그렇게 사랑해주지 않았어요.” 자신이 사랑 받고 있음을 보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의 복음에 응답할 것입니다. 그 소년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전에도 복음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수련회에 참석하기 전에는 한 번도 하나님의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1998년 4월 10일 오전, 서울삼성병원에서는 1주일 전에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15살의 이창희 군의 간, 심장, 신장 등 4개의 장기와 각막을 우모 씨 등 5명에게 옮기는 수술이 이뤄졌습니다. 수술을 맡았던 담당의사는 “한창 나이인 이 군의 장기를 이식받아 환자들의 상태가 매우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 군의 아버지 이상설 씨는 “창희가 뭔가 좋은 일을 남기고 떠나도록 모든 장기를 기증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군은 부모가 딸 셋을 낳은 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외아들인데, 학교 앞에서 친구가 철없이 몰고 온 차에 탔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씨 부부는 뇌사판정이 난 7일부터 이틀 동안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머니 윤연화 씨는 “이식을 받은 환자들이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군의 아버지는 교회의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제대로 남을 돕고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하지만 죽어가면서까지 남을 돕고 자기를 나누어 주는 것을 볼 때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그 속에서 보게 됩니다. 뇌사상태의 이 군의 장기는 가만 놔두면 썩어 땅에 묻히거나 태워질 육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식이 되었을 때 바로 5명의 사람에게 세상을 보게 하고 세상을 깊이 숨 쉬게 하고 뜨거운 사랑을 담은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힘과 용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베풀어질 때 그 가치가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신비한 순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돌고 도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나에게 전수되면서 나는 변하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던 내가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인간화(humanization) 합니다. 이렇게 따듯한 사랑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신비하기에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리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따로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무신론자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신론자는 공산주의지만 아닙니다. 사랑을 하지 않는 자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공산당이 두렵고 무섭지요? 아닙니다. 공산당보다 사랑을 하지 않은 자가 더 무섭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진실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16세기 유럽의 한 수도원에 로렌스라는 수사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모습으로 수도원 안과 밖에서 봉사를 하는 로렌스 수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머 않아 곧 그의 사랑이 시들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는 언제나 그대로였습니다. 마치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이 언제나 거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수도원의 다른 사람들은 로렌스 수사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가 밝힌 진리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늙은 로렌스 원로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 사랑을 담아서 하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계란을 부칠 때도, 길가에 쓰레기를 주을 때도, 예배당 청소할 때도 언제나 사랑을 담아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로 사랑으로 사랑 가운데서 만납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랑을 담는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랑을 담아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맡은 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나의 마음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도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말씀은 성경 66권의 요절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성경을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두 선(ㅣ, ㅡ), 즉 수직과 수평 중의 수직선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뜻이고, 수평선은 이웃이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또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옆에 있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랑 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서 사랑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사랑〓0>입니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와 인간 사이에서 사랑만이 최고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고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허물이 하나님을 가리지만, 서로 사랑하면 두려움과 허물이 사라져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움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결국 미음과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을 내쫓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어느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을 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이루십니다. 우리는 항상 미완의 아쉬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가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의 그랜트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한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 참모장 맥펄슨은 첫날부터 막대한 손실을 입은 까닭으로 용기가 저하 되어 있는 군사들을 돌아보고 그랜트 장군을 찾아왔습니다. “장군님! 큰일입니다. 군사들은 모두 힘과 용기를 잃었습니다. 더구나 보병은 1/3이나 잃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랜트 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맥펄슨 참모는 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장군님! 오늘 밤을 틈타서 후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랜트 장군은 여전히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군님! 무어라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참모장이 다시 재촉하자 그랜트 장군은 조용히 일어나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다급한 참모가 그랜트 장군을 뒤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랜트 장군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한참 읽더니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습니다. 한 30분인가 지나서야 집무실에 돌아와서 장군은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다시 생각해보게. 우리가 오늘밤 후퇴하는 것이 좋겠나, 아니면 내일 새벽 적군이 방심할 때에 공격하는 것이 좋겠나?”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적군은 때 아닌 공격에 당황하여 참패하고 그랜트 장군의 부대는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전쟁 상황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빅토르 위고는 그의 소설 『Ninety-Three』에서 바다에서 위험한 폭풍에 휘말린 어떤 배에 대해서 썼습니다. 폭풍 속에서 선원들은 경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갑판 아래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해적을 만났을 때 사용할 대포 때문이었습니다. 폭풍으로 대포를 묶어 둔 밧줄이 풀려 그런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배의 요동에 따라서 그 대포는 이리 저리 움직이며 배의 측면을 쾅쾅 쳐댔던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배를 가라앉힐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포를 바다에 던져버려야 했습니다. 그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 대포로 인한 배의 난파가 폭풍의 격렬함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인생이란 바로 그런 거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폭풍이 불어오지만, 그런 외부의 폭풍이 우리를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죄와 타락입니다. 외부에서 밀려오는 격렬한 폭풍이 위세를 떨칠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우리 내부에서 진행되는 죄 된 욕망이 우리의 삶을 더욱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소망은 내부의 적을 정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내부의 적인 죄란 우리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에 안정을 주고 불안하게 하는 그런 내부의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모태로부터 한번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제는 거듭나야(重生 born again) 합니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먼저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거듭난 삶을 통해서 자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적은 항상 내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이겨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거듭나서 자신을 이겨야 사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성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찬351장).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세상과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는 성도가 믿음으로 무장하고 세상과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과 사탄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를 우습게봅니다. 그러나 담대한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대항하면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탄은 도망갑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성도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핵무기와 같습니다. 기도를 터트리면 세상은 두려워하고 사탄은 도망갑니다. 기도 없이는 자신과 세상과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만이 승리의 보도(寶刀)입니다. 기도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해드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올 때 한 학생이 바짝 따라오며 물었습니다. “당신이 많은 책을 쓰고 많은 연구로 한 평생을 사시고 가르쳤는데 당신이 그 동안 배운 심오한 진리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씀해주십시오.” 칼 발트는 잠시 후 “내가 어렸을 때 부르던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 일세’ 예수님의 사랑은 거룩한 말이고, 예수님의 사랑이 내가 생각한 진리입니다. 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자주 암송하는 요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다(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라고 말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는 사랑해 줄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랑 받겠다고, 사랑 받으려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사랑만이 아닙니다. 사랑 받겠다고, 사랑 받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찾아가서 사랑하는 것이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사랑 받겠다고, 사랑 받으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이 진리입니다. 받는 사랑이 소극적이라며 주는 사랑은 적극적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래 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네. 있어요. 열 살짜리 여자아인데 매우 흉한 꼽추예요. 이름은 머시 굿 페이스(Mercy Good-faith:훌륭한 믿음의 은혜)이지요.” “네, 저는 바로 그런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 아이와 함께 떠났습니다. 그 후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고아원 감사실의 실장은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가정은 매우 특별한 곳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풍부한 사랑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보질 못했었다. 그들은 내가 그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꼽추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데에 놀라워했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 페이스이다.”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추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보살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머시 굿 페이스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또 그 사랑을 백배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남다른 사랑을 받아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가 쓴 요한복음이나 요한 1.2.3서는 모두 사랑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한 요절로 요약한다면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은 혼자로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함께했을 때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진리와 사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은혜는 심플하고 좋은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무 대가가 없이 그냥 주어집니다. 은혜 받겠다고 몸부림치지 마세요. 먼저 회개해서 마음을 비우고 은혜 받을 준비를 하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당신의 정결한 영혼과 깨끗한 마음속에 하나님은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긍휼을 받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측은히 여기듯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자비가 있고 용서가 있고 돌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실수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용서를 받고 치유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평강이 있습니다. 평강이란 말은 영적으로 영혼이 평화롭고 평안함입니다. 영혼의 갈등이 사라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깊은 형화를 느끼게 됩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고 말씀의 참 뜻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적으로 건강해집니다. 생활이 유쾌하고 살맛을 가지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됩니다. 영원히 평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 시카고의 교회 주일학교에 불량기가 가득한 한 소년이 들어섰습니다. 허름한 복장과 적의에 가득 찬 표정…. 소년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로 인해 심신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거지처럼 남루한 차림의 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교회학교 교사인 파라 선생은 소년을 꼭 껴안으며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파라 선생은 소년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극진히 대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 내렸습니다. 그리고 적의에 찬 얼굴에 잔잔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소년의 이름은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 세계적인 부흥사로서 수십만 명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한 하나님의 큰 종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학교 한 교사의 진실한 사랑이 불량소년을 부흥사로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고장 난 인생을 정상의 인생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사랑은 비극적인 인생을 희망적인 인생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인간은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시로 표현하고 사랑을 모든 예술로 찬미하지만 세상은 갈수록 사랑에 굶주립니다. 마치 장마에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하여도 마실 식수가 많은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현대인은 분명히 사랑에 대하여 병이 걸렸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함으로써 오는 병, 변질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 인한 죄악, 사랑이라는 전제하에 저질러지는 이기주의, 그릇된 사랑 문화로 인간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그저 평범하고 쉬운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일 네가 어떤 일을 한 다면,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만일’(if)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나 또는 외모나 지식, 그리고 우리의 성공이나 인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죽고 난후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존재하며 시간이나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또는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관심 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시며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 주를 바라고 계십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더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하나님이 바라십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영혼이 잘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사람에게 영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육신도 잘 됩니다. 영혼이 잘 풀려야 육신도 잘 풀립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육신도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의 영혼에 임재하십니다. 모든 예배는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가 잘 되어야 가정도 잘 되고 자식도 잘 되고 사업도 잘 됩니다. 그래서 영혼을 위한 기도는 모든 기도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고로 영혼이 잘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범사에 잘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범사’ 자고 깨고 먹고 싸고 만나고 헤어지고 돈 버는 일까지, 심지어는 죽은 일까지 모든 일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기도하야 형통한 일이 생깁니다. 주님은 이 가정의 범사가 잘 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잊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가정의 범사가 잘 되기를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이 부족한 종도 같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강건하시기를 기도하십니다. ‘강건’이란 말은 일본어에서 온 말인데, 본래는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말합니다. 몸이 부실하면 만사가 귀찮습니다. 피로가 쌓이면 기도도 안 됩니다. 건강이 나쁘면 하는 일도 잘 안됩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혼만을 위한 분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건강까지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건강하고 생활도 건강하고 몸도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 시골의 한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성도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꿈에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 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여덟 달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 했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지난 여덟 달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냐?”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난 여덟 달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 하셨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다.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아라.” 그는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허약하지 않은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어졌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고, 잠도 잘 잤었지…’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하나님 계획은 그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바위를 밀고 있는 그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목적 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충성함으로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문제들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은 감사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문제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변화되기도 하고 변화되지 않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순종이고 충성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죽도록 충성을 다하면 문제가 변화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소아시아의 서머나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중심도시였으며, 로마의 여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로마 통치권의 지리적인 여건상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에베소, 버가모와 함께 경쟁하는 부요한 상업도시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로마와 이방신도의 박해로 환난과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머니 교인들은 궁핍한 생활을 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적으로는 가난했으나 믿음의 부자였다는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았으며,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서머나 교회를 본받아 충성되기 주님을 섬겨 칭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는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 서머나 교인들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과 합세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고 잔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폴리캅은 “나는 86년간 주님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장렬하게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처럼 어떠한 고난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해드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충성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한시적이고 축복은 영원합니다. 성도는 고난을 받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여기서 ‘십일 동안’은 일정한 기간을 표시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잠시 고난을 받으면 주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잠시 고난을 하나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에게 생명의 관을 주시며,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무꾼들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나무를 해서 해가 저물자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다가 깊은 함정에 사람들이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한 사람은 살아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은 것 같았습니다. 착한 나무꾼이 동료들에게 “우리 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저 사람을 구하자.”고 했으나 동료들은 “우리도 힘들고 바쁜데…”하면서 산을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착한 나무꾼은 목숨을 걸고 살아있는 한 사람을 구출해주었습니다. 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살아 있는 사람은 왕자님이었습니다. 왕자가 신하들과 산에 사냥을 나왔다가 그 함정에 빠졌던 것입니다. 왕은 왕자를 구해준 착한 나무꾼에게 큰 상과 넓은 농토를 하사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걸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킬리만자로의 눈』『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노인과 바다』등의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그가 추구한 직업과 다양한 활동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운전기사, 투우사, 사냥꾼, 낚시꾼, 종군기자, 특파원, 권투선수, 사업가, 군인, 작가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비행기에서 두 번씩이나 떨어졌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고 네 번이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스스로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 채 쓰러져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비참하게 마감했습니다.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 설립자 에드워즈 요나단의 가문은 갈수록 복을 받아서 그의 5대손까지 조사해보니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요나단 목사님의 후손은 896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선교사와 목사가 116명, 교사가 86명(그 중에 총장3명, 학장66명), 문학가와 문필가 75명, 상하의원 4명, 부통령이 1명 ,실업가 73명, 발명가 21명, 장로, 집사가 286명이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반면에 미국 뉴욕의 고급 술집의 사장 마르크스 슐츠의 집안을 5대손까지 조사해 보았더니 갈수록 집안이 몰락해 갔습니다. 그의 후손은 1,062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교도소에서 5년 이상 살고 나온 사람이 96명, 정신병자 알코올중독자가 58명, 창녀 65명, 정부보조극빈자 286명, 불학 무식자 460명, 사고로 연방정부 돈을 낭비한 금액이 1억 5천만 불이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인생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욥은 처음보다 갑절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었지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결국 그의 인생의 나중은 처음보다 더 많은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욥 42:12). 욥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았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주님은 포도원의 지혜로운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야 합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고 칭찬하셨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끝까지 사랑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과 성도들에게 대한 “처음 사랑”(계 2:4)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사랑을 지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좋은 믿음’ ‘진실한 믿음’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지켜서 주님이 오실 때에 구원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끝까지 섬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섬기러 오셨고, 십자가에서 섬김을 다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섬김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넷째, 끝까지 인내하기기 바랍니다. 주님은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5:11). 성숙한 신앙을 위하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드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중학생들이 백두산에 등산을 갔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그만 길을 잃고 어디로 갈지 몰라서 한참 숲 속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어떻게 해야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중학생은 저만치 골짝에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을 보고, 이 시냇물만 따라 내려가면 큰 강이 될 것이고 그 강가에는 분명히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학생은 그 강물만 따라 가면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중학생은 일단 시냇물로 목을 축이고 풀뿌리를 먹으면서 바위 밑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강물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드디어 그 중학생은 일주일 만에 사람이 사는 동네로 내려와서 살아났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기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는데, 그 생기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영혼의 샘물입니다. 이 영혼의 샘물에서 물을 마시면서 살 동안에는 삶의 의미가 있고 가치고 있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으면 이 샘물은 말라버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 통계를 보니까 한국인의 삶에 대한 불만족도가 76%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보다 열악한 생화를 하고 있는 네팔 사람들은 삶의 만족도가 92%로 나왔습니다. 한국인들이 왜 불만족한가 하면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생명의 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생명의 샘을 잃어버린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30대 후반의 51%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경제적으로 아무리 부유해도 자신의 욕망대로 안 되니 행복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샘물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요 4:13-14). 주님은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성령의 샘물을 마시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주님이 오실 때에 살아 있는 성도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생하는 생명 수 샘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수 샘물은 갈급하게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서 믿음으로 이기는 성도에게 베풀어주십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5).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성도가 은혜 받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갈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목마른 사슴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갈급해 하며 기도하여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기도와 말씀으로 이기는 성도에게 생명수 샘물을 상속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상속‘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속은 대물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당대에만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상속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와 마름으로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겨 생명수 샘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오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종말에 주님은 천군과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십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 때까지 말씀으로 믿음을 지킨 성도에게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주시는 생명 수 샘물로 은혜와 축복, 구원을 받아 자손대대로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해드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집은 비록 작지만, 미국의 역사를 새로 만들어 낸 위대한 집이다.” 이 글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한 오두막집 현관에 적혀있는 글입니다. 200년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과 사모님인 사라가 12명의 자녀를 낳고 키우며 살았던 집입니다. 200년 동안 에드워드 목사님과 사라 사모님의 자손 1.394명이 태어나 1명은 미국의 부통령. 13명은 대학총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3명의 주지사와 3명의 시장, 116명의 목사, 149명은 변호사, 48명은 검사와 판사로, 75명의 사업가, 25명의 발명가, 66명의 대학교수, 82명의 차관급 공무원, 68명의 의사를 배출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와 복의 통로가 되는 조상이 되는 비결을 배우고 간다고 합니다. 2016년 새해를 어떻게 살아야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아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하는 ‘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나로부터 복이 시작되어 자녀대로 흘러가 자자손손 복을 받게 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습니다. 나로 인하여 친척과 이웃이 복을 받게 하는바 복의 출발점이 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늘 축복의 통로자입니다. 반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화의 통로’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화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화를 전달하고 다닙니다. 언제나 불평과 불만을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남이 고난을 겪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축복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브라함은 ‘복(福 blessing)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시작해서 자손들에게 축복이 전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눈덩어리가 굴러갈수록 커지는 것처럼 그가 가는 곳마다 축복이 전해졌습니다. 그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하나님은 우리를 복 있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가문의 축복의 근원으로 당신을 불러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모든 이웃의 축복의 통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축복의 조상과 통로 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근원으로서, 축복의 통로자로서 엄청난 축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조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축복의 조상은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당시 고향산천을 떠나 낯선 땅으로 이사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입니다. 생계가 보장되지 못하는 절망과도 같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축복의 근원과 통로 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자로서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만물은 모두 다 독특한 목적을 각지고 만들어졌습니다. 자기의 살아가는 사명이 있습니다. 특별히 비인격적인 것도 목적과 의미를 위해 살아가고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가문과 친척과 세상을 위해서 ‘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생각과 말과 행실로 축복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축복의 통로가 된 아브라함은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성경에 그가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나, 집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세겜과 벧엘에서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헤브론과 브엘세마와 모리아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모리아산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드리는 제단을 쌓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축복의 씨를 뿌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자손의 축복을 위해 거룩한 씨를 뿌릴 줄 아는 성도가 되는 것은 참으로 멋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축복의 통로자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우선순위로 실천하여 2016년은 나 때문에 온 가족과 친척까지도 하늘 복을 받는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을 작심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믿음의 귀한 약속을 지킴으로 인해 인류역사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계위에 기독교의 세계 속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중에서 아브라함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의 이름과 명성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후로부터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영원토록 길이 남을 위대한 이름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은 복을 받습니다. 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처럼, 땅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역사와 믿음과 축복을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로 대대로 이어갔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으로 사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1864년 덴마크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기름진 남부의 두 주를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고 잘못하면 덴마크는 이제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국민들에게 소망의 나팔을 불고 나온 사람이 그룬트비히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혼란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 라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농민학교를 세워 성경을 기초로 한 정신적인 자원을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마음에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 땅에 들어가서 늪지대의 물을 퍼내고 온갖 어려움과 싸우면서 개척해 나갔습니다. 덴마크는 그 후 백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낙농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한 자원을 개발해서 공업국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많은 나라로 성장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2016년에 우리도 그런 축복이 임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큰 꿈을 품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꿈이 없는 사람은 목표도 없고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확실한 꿈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어떠한 역경도 이겨 나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꿈과 희망을 갖고 함께 고생을 나누며 서로 손을 잡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믿음으로 나가면 어떠한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갈보리 십자가를 힘차게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의 능력으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그 꿈을 이루아가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큰 믿음을 품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시인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입으로 “아멘”하면 됩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은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현실로 인해 안타깝고 슬픔에 빠질지라도 이곳에서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꿈으로 가득 찬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 된다, 승리한다, 이긴다.”는 큰 믿음의 확신을 가지면 그 믿음에 해당되는 하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사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큰 인내를 품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것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해서 반역하기도 하고 이방족속을 따라 타락하고 뒤로 물러가려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불과 일주일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을 40년이나 방황했습니다. 올 해 우리에게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이 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약 5:10). “항상 함께 하리다”라는 말씀을 믿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해결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 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마음에 인내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그 교훈과 훈련을 다 하신 후 에 대지 위에 우뚝 서게 만들어 주십니다. 대망의 새 해 2016년 참으로 큰 희망과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오는 희망찬 꿈을 가슴속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을 함께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참 좋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 같은 하늘 복을 받는 기회가 주어지는 2016년이 될 줄 믿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신앙인이었던 전 유엔사무총장 대그 함마슐드는 그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일기는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사랑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아멘’하며 살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위하여 몸을 바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는 자신의 꾸준한 신앙생활의 연마에서도 기인되었으나, 그의 일기집인 Markings에 의하면 부모님의 영향도 컸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일기에 쓴 일이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여러 번 나에게 가장 만족한 인생은 조국과 인류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생애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되풀이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인간을 섬기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다시 말하면 그의 부모님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 하고 대답하라는 교훈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브라함은 신앙과 축복의 조상이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축복을 계승하고, 그에게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축복은 당대에 대한 축복만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 축복이 임하는 엄청난 복이었습니다. 수천 대까지 받을 하늘 복이 자자손손 이어지는 약속이 있는 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축복이요, 이삭이 받은 축복을 야곱이 받고, 계속해서 축복이 계승되어지는 것이 성서의 약속입니다. 모든 부모님의 소원은 자신들만 축복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축복은 눈에 보이는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 같은 축복이 아닙니다. 이 축복은 보이지 않는 신앙의 유산을 남겨줌으로 계속해서 그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는 복입니다. 2016년 새해에 그런 축복을 우리도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비결을 얻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 사람을 향해서 축복을 기원하면 도리어 그 사람이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 복 받은 백성을 향해서 저주하던 자기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예배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앞에 형식이나, 외식이나, 의례적인 예배가 아니라 중심에서 나오는 충성심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여호와께 드리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찬송가에 “독생자를 주셨도다”(찬 319장 1절)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아낌없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영역에는 반이나 사분의 삼 정도의 헌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적인 믿음을 드릴 때 그 믿음에 해당되는 전적인 복을 받습니다. 전적으로 아낌없이 헌신하고, 아낌없이 헌신할 때에 아낌없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아낌없는 신앙,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 지금 여러분과 여러분 후손들에게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여호와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말씀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무조건 갔습니다. 그는 상식이나, 세상 지식이나 지혜나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통해서 만민이 복을 받고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계셔서,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죄를 짓게 되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이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이 번성하는 복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복입니다. 부모들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까지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이삭과 야곱과 수천 대에 이르도록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믿음으로 씨앗을 뿌려 놓으면 우리 자손들이 할아버지 때문에, 증조할아버지 때문에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축복의 씨앗을 많이 뿌리시기 바랍니다. 내 당대만 하늘 축복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로를 통해서 열린 하늘 축복의 문이 영원히 닫히지 않고 내 자손들이 축복을 계속에서 받을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이 순간이 바로 그 축복의 농장에 후손들을 위해서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자식과 손자들, 자자손손이 내가 축복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그들이 축복을 받는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아낌없이 헌신하는 신앙, 말씀을 준행하는 신앙을 통해서 받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과 후손들이 번성하는 축복이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형통이란 ‘처음보다 끝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처음 포로생활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남들보다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끝은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인해 범사가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בוט(tub)’입니다. 이 말은 ‘잘 된다(go well, prosperity)’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형통이란 말을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입니다. 2016년 새해에 그런 만사형통의 복을 받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주고받는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축복은 다릅니다. 복은 복 받을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특히 100배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100배의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고받는 원리’입니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야-호’하고 외치면 공기의 진동을 거쳐서 ‘야-호’하고 메아리쳐서 내게 다시 돌아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하면 산울림도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저주한다.’하고 외치면 산울림도 그대로 내게 응답해 옵니다. ‘이놈’ 하면 저쪽에서도 ‘이놈’합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가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시 109:17~18). 이 말씀처럼 주고받는 원리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 가정이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 하늘의 문, 축복이 문이 열리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심고 거두는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심지 아니하고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콩 심는데서 콩 나고, 팥을 심었으면 팥이 납니다. 콩을 심고 팥을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이 천리의 원칙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말씀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15년 전에 미국에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육자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한 아다요크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요정업자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후손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에드워드 자손들은 대학교 총장 13명, 국가의 고급 관리가 83명, 문학자가 60명, 의사가 60명, 육해공군 장교가 75명, 대학교 교수가 86명, 목사. 선교사가 100명이나 되었지만, 아다요크의 자손들은 거지가 310명, 전과자가 130명, 절도범이 7명, 성병환자가 440명,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이 20명(10명은 감옥에서 직업을 배운 자)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의인 에드워드는 의의 씨를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었고, 요다요크는 불의와 죄의 씨를 심어서 그대로 열매를 거두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롭게 살면 형통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의롭게 사는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의인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의인으로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시 92:12). 아무리 사람이 노력해도 그것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더하시는 복이 그 위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영적 교제를 통하여 불신자들을 영적, 정신적인 면에서 압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위력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삶에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현실적으로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아왔는지를 점검하고 날마다 말씀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날마다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마치 바둑을 둔 사람들이 ‘복기’하면서 ‘폐착’을 찾아서 다음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슬프게 한 만남과 장소와 말과 행실을 점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이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절).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시면서 최후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이 되게 노력하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바로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면서 사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100배의 복은 먼저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불타는 욕망과 위대한 신앙으로 만사형통의 2016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옛날 어느 동네에 우물 파는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몇 번이고 우물을 파다가 실패하고서야 겨우 우물 하나를 팔까 말까 할 뿐이었으나, 그 사람은 땅을 팔 때마다 아주 훌륭한 우물을 파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그 비결이 무엇인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 100발 100중으로 우물을 파서 성공하는 특별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야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저는 한 번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파 내려갑니다. 그러니 파는 곳마다 우물이 만들어지지요.” 기도가 그렇습니다. 한두 번 기도하여 보고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계속해야 100발 100중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8). 기도를 하다가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축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받기만 하면 반드시 그 축복이 자신에게 임할 것 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의 제안에 따라 형처럼 꾸며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 받기를 원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늙고 병들고 눈까지 멀었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줄 사람은 이 아버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종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이 세상에 유일한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부모가 늙고 병들었다고 할지라도 무시하지 말고 잘 대접하여 부모들로 하여금 자식에게 복을 빌어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야곱의 축복이 임하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을 이어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주님의 성품을 품어야 합니다. 꼬리처럼 살 생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꼬리가 되는 성품이 있어야 하지만, 머리가 되고자하면 머리다운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복으로 만족하는 사람보다는 큰 복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똑같은 큰 성품을 품어야 합니다. 그 성품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 성품의 특징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도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서가 작은 자에게는 그의 축복과 지위도 작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가 큰 자에게는 그 축복과 지위도 크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가 적은 자! 하나님은 그에게 주시는 사람도 적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가 많은 자! 하나님은 그에게 주시는 사람도 많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의 성품대로 큰 용서를 실천함으로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주님의 겸손을 품어야 합니다. 닫힌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교제 없이 혼자 고독에 빠져 삽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늘 절망감과 두려움에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남한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응답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를 받습니다(대하 7:14). 또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시고(시 10:17), 겸손한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시 147:6).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잠 3:34), 지혜를 주십니다(잠 11:2).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존귀하게 됩니다(잠 15:33).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 납니다(사 29:19).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마 23:12). 교만한 사람은 멸망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계속해서 번창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함은 먼저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고, 또한 세상의 모든 사람까지 감동시킵니다. 이 겸손의 신앙을 실천하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인의 부족한 삶을 더 많이 목격하기 때문에 비판거리가 많아질 수 있습니다. 아마 상처도 많았고 실망거리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인됨을 소중히 여긴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교회와 교인을 더 훌륭히 여길 줄 아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족한 모습이 보여도 세상 사람들보다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비판주의자는 하나님의 복된 머리가 되는 축복을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연히 머리가 되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머리가 되는 순간부터 그 자신도 필연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판주의자가 정당하지 못하게 비판한 만큼 다른 비판자에게도 비판을 받게 하십니다. 남을 비판할 그 기준으로 먼저 나를 비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하늘 복을 이어가는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롬 8:28).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복 받은 자가 된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2016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오 놀라운 구세 주 예수 내 주>,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등, 약 2천여 편의 찬송가를 쓴 화비 크로스비라는 찬송가 작사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시력을 잃고 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사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는 항상 활기차고, 희망적이고, 밝았습니다. 그의 시를 읽은 사람은 누구도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몰랐습니다. 저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캄캄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밝은 노래가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비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즉 축복을 하는 인사가 그의 인사였다는 것입니다. 92세까지 살다간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사함으로 복을 받은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축복을 하면 그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국은 내가 복을 받는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하고 복 받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순례의 길을 떠나도록 종용합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피난을 종용하는 동시에 그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도 빌어줍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장본인입니다. 이로 인해 형 에서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야곱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도피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비록 저주를 받고 혼이 날 짓을 했지만, 용서가 앞서 있었기 때문에 저주 대신에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복을 주사”(:4).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지금도 우리를 행해 똑같은 축복의 말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후손에게 주실 축복을 예비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해 볼 때 야곱은 형의 축복을 가로챈 욕심쟁이 아우입니다. 좀 심한 말을 하면 야곱은 전형적인 사기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경륜을 보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하십니다. 이해가 잘 안 되지요? 하나님의 축복은 그의 계획과 경륜 속에 이루어지는 축복이며 선택된 백성 안에 주어지는 축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는 어떤 잘못도 용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김익두와 같은 폭력배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역대에 이름을 날리는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 때문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인간적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텁고 진한 사랑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보다 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순수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헌신적 사랑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야곱과 결별을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과 믿음이 더욱 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고생문이 열려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끈이 감사의 끈과 찬송의 끈이 끊어지게 하면 안 됩니다. 끊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입니다. 편협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광대한 사랑을 헤아려 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하늘의 별과같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넘치도록 많은 후손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복은 이어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복,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과 그가 거했던 땅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어렵고 힘든 순례의 길을 떠났듯이 이제 우리들도 순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신앙을 간직한 채 불신앙적인 세상 속을 걸어가고, 하나님을 위해 세상 욕심을 포기하고, 세상의 자랑과 이익을 포기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순례의 길에는 선택된 축복의 자녀만이 온전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 계속 보호하심이 이어질 줄로 믿고 당당하고 기쁘게 그 길을 동행할 수 있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과 기업,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약속가운데 땅과 기업에 대한 약속이 많았습니다. 땅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 세상가운데 모든 선물의 중요한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땅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큰 약속을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6년 한 해 동안 주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땅의 축복, 자녀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세계 제 2차 대전 때,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치열했던지 급기야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한 영국군 병사가 독일 병사를 총검으로 찔렀습니다. 칼에 찔린 병사가 죽어갑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성경책 한 권을 꺼내어 자기를 찌른 병사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이것을 주노니 읽고 구원을 받으시오”하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물론 흔치 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독일 병사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죽이는 원수를 향하여 미움과 분노의 저주를 퍼부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읽고 구원을 받으라고 축복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해치고 괴롭히는 사람을 향하여 바락바락 대들면서 욕하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의 사람이라도 누구나 잘되고 형통하고 일이 평범하고 순탄한 삶이 진행 될 때에는 믿음 생활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진행이 가파르고 때로는 벼랑 끝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좌절 가운데 있게 되면, 자신의 신앙생활의 형통함도 큰 풍랑을 만나 시련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든 집을 떠나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꿈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꿈은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동행과 축복을 확신하게 할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가정이 2016년에 야곱의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야곱은 돌을 베개 삼아 외롭고 슬픈 잠을 자는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야곱은 생각지 않은 놀랍고도 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보여주신 비전 즉 계시의 내용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에 하나님의 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자신의 누운 곳으로부터 하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는 성경 중 이곳에 한 번만 나타나는 낱말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부단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특히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죄 중에 있는 사람 사이의 영적 친교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여기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는 하나님의 보호의 표징인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통의 길인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요 1:51). 이 사닥다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사다리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때 우리의 좌절과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보다 더 강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과 언약하셨고(창 12:3), 이삭과 언약하셨으며(창 26:4), 이제 야곱과 언약하시기 위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이 곳 벧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개인적 접촉을 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하나님은 그 땅을 주시며, 자손의 번성을 축복하셨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기업의 축복을 야곱에게 다시 약속하였고, 후손을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는 자손 번성도 축복하셨습니다. 이 축복은 야곱에게 있어서 일신의 안전도 기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큰 보장이요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고 메시야를 통해 세계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갱신하셨고, 축복의 땅과 후손에 대해서도 재확인하셨습니다. 야곱은 언약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확실히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 야곱의 축복은 신약 성도들에게도 계승되었습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의 약속을 고유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떠나지 아겠다는 축복을 하셨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25).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과 친히 함께 하심을 확증하셨고, 지속적인 보호와 완전한 신뢰의 관계를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을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이 당장 필요로 하는 현실적 큰 보장이었습니다. 이 축복은 모든 성도에게 반복되고 성취되는,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귀한 약속인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이 꿈에 대한 확신을 갖고 기념의 돌을 세우고 하나님의 전을 약속했습니다. 십일조를 약속했습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복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서약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드린 서약대로 살아서 복 받는 2016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어느 부부가 이혼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결별을 선언하고 실의에 차 있는 그들이 아들의 양육권을 결정짓기 위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랜 논쟁 끝에 재판관이 엄마 곁에 쓸쓸히 앉아 있는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넌 누구와 함께 살고 싶니?” 잠시 침묵이 흘렀는데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소년이 한참 울먹이다가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 나…, 나는 엄마랑 아빠랑 함께 살고 싶어요!” 그 순간에 이혼하려던 부부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윽고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오랫동안 포옹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재판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재결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법정에서 행복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야곱은 쓸쓸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다 하나 아버지가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고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물론 나이 많은 아버지와 동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모든 것을 미리 챙겨 주시던 어머니가 동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외롭고 지치는 여행길에서 벧엘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꿈속에서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늘로부터 땅으로 사닥다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18:13). 야곱은 이 음성대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너와 함께 있어 사방에 충만하리라오늘 주신 말씀은 야곱이 잠이 든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여 그에게 자손이 티끌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티끌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람에 날려 먼 곳까지 날아갑니다. 야곱의 후손도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입니다. 동서남북 사방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야곱이 꿈속에 들은 말씀이라도 그 말씀은 희망의 말씀입니다. 지금 야곱은 혼자입니다. 혼자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축복은 희망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지금은 맨 몸이지만 많은 후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사방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야곱의 후손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우리도 간직하고 사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너와 함께 있어 모든 족속과 관련 있으리라야곱의 후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지면 필연코 이방인들을 만나고 섞여 살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환영받을 수도 있고, 미움이나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배척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야곱은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섞여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배척받을 수 있습니다. 공연히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삽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기 어렵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세상 속에 살지만 말씀과 함께하시는 주님과 함께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너와 함께 있어 너로 인해 복을 얻으리라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배척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배척받은 것이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행 16:19).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결과적으로 유익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예수님을 소개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복을 얻습니다. 야곱에게 이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야곱과 야곱의 자손으로 인해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습니다. 땅의 모든 백성에게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복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통해 직장과 학교, 이웃과 우리나라, 전 세계가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복을 전달하고 나누어주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201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병기라는 청년이 전쟁터에서 전사를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어머니는 창가에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애처로운 질문을 하였습니다. “왜 그 애가 탄 차는 이렇게 더디 옵니까?” 이것이 그의 어머니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과거의 자랑도 없고 미래의 소망도 없이 그는 생의 어떤 기쁨이 소생되기를 헛되이 기다리며 늙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인생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도 무익한 때를 만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새로운 축복을 하여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최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준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약속을 믿고 실천에 옮기는 자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느 날 꿈속에서 보았던 일들이 바로 자기 앞에 펼쳐지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2016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현실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보는 아름다운 영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옛날 소련 경찰은 독일 히틀러의 학정을 피하여 소련으로 넘어온 유대인들을 붙잡아 독일로 넘겨 짭짤한 수입을 얻었습니다. 소련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과 도망쳐온 유대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경찰에 들켰습니다. 잡히면 독일로 끌려가 죽을 판입니다.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이 힘껏 달아났습니다. 경찰도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쫓았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이 섰습니다.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고 유대인은 여유 있게 신분증을 내밀었습니다. 경찰은 왜 신분증을 갖고 있으면서 도망쳤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의사가 약을 먹고 달리라고 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경찰이 재차 도망쳤다고 다그치자 유대인은 “경찰관님도 나와 같은 의사의 처방을 받은 줄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덕분에 독일에서 도망쳐온 유대인은 감쪽같이 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순간적으로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안전한 피난처를 주십니다. 순간의 지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오직 구름기둥과 불기둥만이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입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말씀의 불기둥을 따라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119:105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불기둥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갈 길을 인도해주는 이정표가 됩니다. 아프리카에 모펫 선교사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어린아이 하나가 모펫 선교사의 옷자락을 부둥켜 잡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선교사님, 동네 개가 내 성경책을 찢어 먹었어요.” “그래. 하나님께서 새 성경책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려보자.” “아니에요. 선교사님. 저는 친구들 가운데서 아주 나쁜 아이였어요. 그런데 성경책을 읽고 좋은 아이가 되었단 말이에요. 그 성경책은 보물가운데 보물이어요. 어쩌면 좋아요.” 모펫 선교사님은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성경책이 너를 좋은 아이로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그 성경책을 찢어 먹은 그 개도 좋은 개가 될 거야.” 이 아이는 밝게 웃으며 선교사 곁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내서입니다. 최고의 매뉴얼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만 살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성령의 구름기둥을 따라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갈 때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현대의 성령님은 특별한 모습으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때 오셔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이미 성령님이 오셔서 도와주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성령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령님은 사역은 무대 위에서 대사를 잊어버리고 당황하고 있을 때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 같은 역할입니다. 내가 다른 길로 가고자 할 때 내 옷소매 자락을 살짝 잡아 당겨주는 것처럼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절대로 말씀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매사를 소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픈 심령이 치료를 받습니다. 어두운 세상가운데 비전을 갖게 합니다. 절망과 좌절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가까이에 있는 구름기둥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많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은 분들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부모입니다. 좋은 목회자입니다. 좋은 친구입니다. 주변의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소중한 구름기둥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구역 안에, 많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은 분들을 세워놓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그 분들을 찾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에서 어떤 선교사님께서 주일 설교를 하시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안내하는 사공이 그만 길을 잘못알고 엉뚱한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날 설교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목적했던 곳에 갔더라면 죽임을 당할 뻔했던 것입니다. 선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선교사가 도착한 다는 것을 미리 알고 숲 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몽둥이와 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내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 길을 못 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길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사람들을 통하여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2016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의 워싱턴 링컨기념관에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는 링컨의 손때에 눌려 짓이겨진 손가락 자국이 있습니다. 이 자국은 링컨이 수없이 같은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읽어서 생긴 흔적입니다. 그 곳은 시편 34편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숱한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두려움과 역경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링컨 대통영이 어렵고 두려울 때마다 이 말씀을 펴서 읽었기에 그렇게 눌린 자국이 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 말씀으로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람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위기를 만납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고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국가적, 정치적 위기, 경제적 위기, 관계의 위기, 질병의 위기 등 수 없이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때나 질병이나 우울증, 외로움 이런 문제를 만나면 낙망하고 원망하며 신앙을 버리고 타락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위기를 겪습니다. 하나님께서 진퇴양난의 위기상황을 주시는 이유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믿을 때 일하시는 하늘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위기가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 중에 하나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일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말에 “걱정도 팔자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두려워서 동산 뒤에 숨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한 번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그것에 묶여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사람은 삶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안절부절 한다고 일이 됩니까? 내가 나서고 설치면 오히려 하나님은 잠잠하시고 침묵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우리의 나가던 바대로 나아갈 때에, 우리 앞에 있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믿고 따라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라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기병대, 절박한 위기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본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말씀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역사를 눈으로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봅니다. 모세는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만났습니까? 환난을 만났습니까? 문제가 있으십니까? 모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 위기 속에서 일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두려움은 금물입니다. 가끔 우리도 이해 할 수없는 것은 우리는 어떤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데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을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출 14:15). 이 말씀은 모세에게 이젠 두려워 떨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어찌할 줄 몰라 할 때에 손을 내밀어 홍해를 가르고 그 안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뒤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는 사람은 애굽의 포로가 되거나 물속에서 장례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전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가라 하시니 그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진하니까 바로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전진하면 반드시 홍해가 갈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홍해가 많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경영하는 사업장에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있습니다.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홍해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잠잠하게 기도할 때가 있고 앞으로 진격하여 나가면 장애를 넘을 대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 어느 교회에서 전 교인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기도의 제목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성도들이 비 오도록 기도하자고 모인 기도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비가 쫘 악 하고 내렸습니다. 모두 비가 온다고 현관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고 갈 수가 없어서 모두가 서 있었습니다. 그때 주일학교 학생인 존이 우산을 착 펴서 쓰고 가는 것입니다. 그때 장로님이 “야 존 너는 어찌 우산을 다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어린 존이 뒤를 돌아보면서 “아니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도록 기도하려 모였으면 하나님이 비를 내려 줄줄 믿고 우산을 가지고 와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우산을 쓰고 총총히 걸어갔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작을 믿음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전진했습니다. 모세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우리도 믿고 전진하는 신앙을 살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믿음의 손을 높이 들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출 14:1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는 왜 아직까지 나를 믿지 못하고 있느냐. 열 가지 재앙을 볼 때마다 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지 않았느냐 그러면 바다도 나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염려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면 되지 왜 염려하여 물어보느냐.”하는 뜻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곳 광야의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곳 광야에서 죽게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이 언제나 열려져 있는 홍해의 삶이 아니라, 열려져 가는 홍해를 보는 삶입니다. 믿음이 없이 나가면 결코 열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를 향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물로 들어가는 성도를 너무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으로 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승리는 언제나 우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것도 홍해로 몰아넣어 믿음을 시험하고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것도 최종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전능하신 팔로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맛보는 순간 반드시 뇌리에 떠올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기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로되, 그 기적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기쁨과 감사가 자신이나 사람에게 돌려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을 만나면 금방 두려움과 자포자기에 빠집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가 뒤에서 따라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서 자포자기하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세상의 악한 힘이 엄습하면 두려움이 밀려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 때문에 그들은 홍해를 건너야 했습니다. 바로가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홍해를 건넜겠습니까? 세상의 악한 힘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세상의 악도 우리 신앙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나마 뒤에서 적이 쫓아오니까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의 추격도 때로는 우리의 신앙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이른지라”(축 14:10)고 했습니다. 뒤에 미친 애굽 사람을 볼 때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바로의 군사들이 쫓아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구원이란 가장 큰 은총에 대한 감사보다 작은 부족 때문에 큰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감사가 작아지면 불평은 커지고, 감사가 커지면 불평은 작아집니다. 내일을 위하여 과거를 벗어버리십시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했습니다. 이미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마침내 하늘나라에 다다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올 한 해를 위하여 많은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장애물 경기에서 우승하는 사람은 수많은 장애물을 잘 넘긴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고 보면 이미 과거입니다. 고통도 지나고 보면 기쁨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016년 새해에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과거에 집착하거나 돌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는 한 해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성 프란시스가 고향에서 하루는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물을 길을 때마다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프란시스는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하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 물이 반통 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는 크게 깨닫고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지.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보게. 십자가는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치료해줄 걸세.” 이 편지는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는 병나면 병원에서 진찰 받고 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주는 처방전대로 약을 사서 먹습니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치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발급해 주시는 처방전대로만 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만병이 물러갑니다. 치유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처방전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말씀에 순종하며 사라는 처방전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삼상 15:22). 하나님 앞에 많은 소와 염소와 양을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불순종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진실한 믿음이 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 사무엘이 사무엘상 15장 22절로 23절에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엄중하신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늘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이렇게 오늘날 고생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말씀을 따라 의를 행하라는 처방전입니다. 의(義)라는 것은 착하고 좋은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착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조건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착한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착한 일을 했다고 칭찬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십니다. 이사야 1장 17절에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고 도와주고 협력해 주는 사람이 되고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일을 해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말씀 귀를 기울리라는 처방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친히 두 돌 판에 기록해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 10가지를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출애굽기 20장 1절로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주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은 우상을 싫어하십니다. 셋째는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장난으로 부르고 농담으로 하나님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넷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만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되면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듯이 멸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아홉째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송사가 생겼을 때 거짓증거해서 손해를 끼치게 하는 일은 하지 말고 정직하게 평론하고 살아야 합니다. 열 번째는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까 남이 잘되는 것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라는 계명대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러시아 교회에서 3명이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변증할 수 있느냐?” 하는 사안을 가지고 사흘 동안 토의를 하는데, 러시아 교회 3명은 전혀 아무 소리를 안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그들에게 소감을 얘기하라고 했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여러 분들이 사흘 동안 이 회의를 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다보면 오류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 텐데 그런 것 가지고 뭘 회의를 하고 앉아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너무나 숙연해졌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새겨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입니다.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의심 없이 먹고 소화를 시키면 그것으로 힘을 얻고 자기도 모르게 자라나는 것처럼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그것으로 인해 능력을 얻고 자신도 모르게 열매를 맺어나가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의 삶을 반성해 보면 말씀의 위력을 깨닫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고 이 세상을 운행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면 형통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6년 새해는 말씀으로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말씀 안에 살면 복을 받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님 없는 인생은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해답 없이 살아가는 인생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불안한 삶이요 고통의 삶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인생의 해답이 있음을 알고 깨닫고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며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그리고 어떻게 계획하고 계신지를 알면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든 살지 않던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항상 성령을 통해 간섭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면 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인데 그 소유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을 순종 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소유는 히브리어로 ‘קלח(세굴라)’입니다. 이 단어는 ‘진귀한 보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귀한 보물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말씀 안에 살면 제사장이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사장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남들이 흘리는 눈물과 고뇌와 아픈 사연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는 자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주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그렇게 대단한 능력자도 아닌데 말씀대로 살아가면 이 시대의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9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 제사장의 직위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말씀 안에 살면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구별 된다’ ‘깨끗하다’는 뜻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귀한 유산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은 경우는 국민의 정서가 기독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인에게 폐단도 없지 않아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는 친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험에 빠지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구해주는 그런 사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민족의 정서를 보려면 장애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를 보면 알게 됩니다. 미국은 장애인 천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애인 한 사람을 위해 의사 4명이 직접 와서 상태를 점검하고 장애급수에 따라 그에 맞는 학교를 다니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도 장애인들을 위한 베려가 몸에 배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사도 장애인 한 명당 한명이 배정되어 수업을 합니다. 이런 것이 위대한 유산이며 거룩한 백성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붙들고 있는 민족을 쓰십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교회를 쓰십니다. 그런 나라를 제사장나라로 그런 사람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십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붙들므로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의 특권을 누리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국 보스턴 시에 사는 스트로사라는 청년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꿈을 이루기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부 바턴 씨를 찾아가서 2천불을 꾸어달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담보물은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비서는 경력도 없는 자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지만 바턴 씨는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그 청년은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일이 있은 지 10여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 대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 씨는 완전한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스트로사는 바턴 씨를 찾아가서 빚 7만 5천불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바턴 씨는 깜짝 놀라며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한 스트로사의 대답은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갚았지만 당신이 제게 베푼 은덕은 평생 갚지 못합니다. 나는 그때 2천불로 오늘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은혜와 사랑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빚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문의 연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잘해야 3대가 아니면 5대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가정에 주신 말씀은 천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년이 아닙니다. 한 대가 50년이라고 상상하면 5.000년이라는 세월입니다. 이렇게 천대에 이르는 복은 과연 어떤 복일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천대에 이르는 신앙의 출발점은 부모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부모는 신앙의 선구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닦아 놓은 신앙의 길을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유산입니다. 부모가 세운 신앙의 기념비는 자녀들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또한 좋은 부모란 신앙의 전수자입니다. 돈, 명예, 권세와 같은 유산은 자녀를 영원히 지켜주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지도층의 자녀들이 잘못된 유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까? 요즘 부모들은 다른 것 못 해주는 것 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제일 중요한 신앙전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김으로, 신앙이 전수되는 21세기의 명문가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유산이 있는 가정을 천 대까지 축복하십니다. 지금까지 조상 덕을 가장 많이 보는 민족은 이스라엘입니다. 풍부한 지하자원도 국토도 없는 이스라엘이 2천 년간이나 방황하면서도 지금까지 생존한 것은 신앙유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꿈을 품고 사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천대에 이르는 신앙의 전수자는 자손입니다.
자녀가 천 대까지 복 받기 원한다면, 자녀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귀한 자식일수록 교회에 열심히 보내어 하나님께서 키우시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은 학원과 과외 선생이, 잘 못된 친구들과 컴퓨터가 자녀를 키우게 합니다. 한나는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인 사무엘에게 젖을 먹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물질의 자녀’가 아니라, ‘언약의 자녀’가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자녀’들을 천 대까지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의 성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녀에게 투자하기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해야 합니다(시 37:26).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혈통이 계속되도록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들을 언약의 자손으로 인치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과 같은 존재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결국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천 대에 이르도록 자녀들을 책임지신다는 믿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천대에 이르는 신앙의 통로는 가정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좋은 부모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복을 주신다는 것은 이름다운 유산이고 위대한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가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천 대의 은혜와 복을 주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아브라함과 같은 부모인지 아니면 롯과 같은 부모인지 한번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롯은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로 갔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7-18). 아브라함에게 복된 땅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동행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시작은 같았으나, 그 끝은 전 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번성했으나, 롯의 자손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참된 축복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실천하는 가정을 천 대까지 복을 받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하나님의 은혜가 일, 이 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려 천 대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천 대까지 복 주시겠다는 것은 영원히 복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난도, 슬픔도, 질병도, 고통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 천 대까지 영원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좋은 부모, 좋은 조상이 되면, 우리의 자손들이 천 대까지 복을 받습니다. 2016년 새해에 이 가정이 신앙 천 대, 자손 천 대, 축복 천 대의 가문을 이루는 믿음의 부모, 믿음의 조상으로 살 것을 결심하고 실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어느 가정에 노름에 미쳐 지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 때문에 손가락까지 잘라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노름에 미친 아버지 때문에 장애를 입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성공한 후도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아들이 충분히 아버지를 원망할만한 상황임에도 극진히 효행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에게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었는데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참다운 부모공경의 차원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어떤 처지나 어떤 상황에서도 공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다운 신앙인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축복의 문인 것을 알고 실천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마음을 평안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성경이나 기독교사에서나 부모 순종 잘한 성도는 한 결 같이 복을 받았습니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은 소외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작은 불순종이라도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매사에 언행심사가 거역됨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종하여 공경하셨음을 거울삼아 말씀대로 부모님을 잘 공경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잠 17:1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말씀같이 부모님의 마음을 평안케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늙으면 어린 아이가 된다는 말같이 부모님은 작은 일에도 곡해하고 섭섭해 하기 쉽습니다. 기력이 쇠하여지고 경제력이 없어져 자식에게 의지하여 살게 되면 낙조의 서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진수성찬으로 대접을 하여도 마음의 평안을 못 가지게 된다면 그 대접도 효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불신 부모를 구원의 기로 인도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사회 개혁, 정의 구현, 개인 축복 등이 지상의 제 문제 해결만을 위한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도 물론 해야 되겠지만 더욱 귀하게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에게 진정한 효성은 영혼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이 됩니다. 불신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 영혼 구원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최대의 효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 부모님께 핍박받는 며느리가 흔히 하는 말은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다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부모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적극적인 전도를 해야 합니다. 최선의 효성은 부모님 영혼 구원임을 믿고 기도하여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생전에 효도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야단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잘못해 드린 것을 지금이라도 효로 갚아 보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보다는 생전에 효도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효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여자 성도는 시집와서 안 믿는 시아버지께 13년간이나 날마다 극진한 효성으로 전도하여 드디어는 시아버지로 하여금 감동을 받아 교회에 나오게 하였다고 합니다. 옛말에 ‘나뭇가지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지 않고, 부모님께 효성을 하고자 하나 부모님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단 한 번의 기회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루 동안 열심히 믿지 않는 부모님께 전도하여 부모님들로 하여금 하루속히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자녀가 되는 것이 축복을 받는 자녀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는 육적인 효도뿐 아니라 영적 효도에 있어서도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영혼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인한 기쁨이 넘치시도록 영혼에 유익을 드릴 수 있게 효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하나님을 더 잘 섬 기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위로해 드리고 물질도 드려야 합니다. 성도님들 부모님이 그 영혼에 상처받지 않으시도록 살펴드립시다. 내가 영적 생활에 전력하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배려하여 드립시다. 우리 성도님들 이런 효행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케 되면 우리 교회 모두가 믿음이 견고해지고 축복이 가득히 임하게 됩니다. 타인도 전도하여 영혼을 축복 받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면 어찌 내 부모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부모의 영혼을 위하여 효도하는 효도는 모든 효도의 근본입니다. 부모에게 잘하면 형통의 복을 받는 다는 말씀으로 하늘 복을 받는 2016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토마스 라 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몇 년 전인가…내가 거실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빈둥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눈을 치우고 들어오셨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쳐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네가 지금 라디오에서 무얼 듣고 있었는지 기억조차도 못할 것이다. 이제 20분 동안에 네가 앞으로 20년 동안 기억하게 될 일을 하면 어떻겠니? 내가 보장하지만 네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죠?' ’들어보아라. 브라운 부인의 집 보도에 눈이 많이 쌓여 있는데, 네가 치우고 네가 한 일인지 알지 못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가서 해보지 않겠니?’ 저는 15분 만에 보도에 있는 눈을 말끔히 치웠고 그녀는 누가 그 일을 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아버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즐겁게 그 추억을 되새겼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의 종 된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 해방의 기쁨을 소유한 백성들은 누구나 '생명의 속전'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을 요구하신 주님은 몇 가지 기준을 주셨는데 그 첫째는 만 20세 이상이 되는 사람은 누구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반 세겔의 속전입니다. 세겔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낮은 단위의 화폐입니다. 그러나 그 낮은 단위의 세겔의 절반을 내라고 하신 것은 부담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빈부에 관계없이 속전을 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0:15 말씀에 보면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외가 없이 모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생명의 속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 죄의 결과나 혹은 그분의 허물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생명의 속전을 반 세겔씩 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생명의 속전으로 보혈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반 세겔이 아닌 십자가로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생명의 속전이 되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죄악의 질고를 지고 여전히 고통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주님의 은혜를, 주님의 구원을 확인하고 그제야 비로소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몸과 마음이 생명의 속전이 되어야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온전한 헌신이 생명의 속전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이미 우리에게 죄악의 멍에를 끊어 해방의 은혜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그 구원의 사실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시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명의 속전을 드려야 한다는 이 말씀에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결단은 언제나 개별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는 부모의 후광이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서 온전한 헌신으로 생명의 속전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아름다운 봉사가 생명의 속전입니다. 백성들이 드린 속전은 16절에 보면, 회막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성전의 여러 부분에서 사용됩니다. 교회의 지상과제인 선교와 교육과 봉사와 친교를 위해서,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예물이 가장 먼저 써져야 할 곳은 회막입니다. 성전의 운영을 위한 지출의 근거를 분명히 해주신 이 말씀은, 예배의 원만한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봉사가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봉사를 하지 않으면서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설이 어떠니, 더운데 에어컨이 없느니, 추운데 온풍기가 없느니, 수양회에 가면 간식이 시원치 않으니 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용돈을 줄 때는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헌금할 때는 그보다 못한 교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는 서로 돈을 내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에는 방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의무를 제대로 감당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절약을 원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가 없는 곳에는 불평이나 원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회막에 봉사하는 일을 위해서 모든 백성들이 반 세겔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외자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봉사로 생명의 속전을 드리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지혜와 명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심오한 사상을 가르친 사람들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은 성경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을 성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헤겔(G. W. F. Hegel)의 「정반합(正反合)」이론도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참조했습니다.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을(S. Kierkegaard)이나 야스퍼스(K. Jaspers), 심지어 무신론자 니체도 직 간접적으로 성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교육가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도 성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모든 지혜의 소산이고 사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성경은 인간 삶의 교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누구시고, 사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으며 천국에 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성경은 우리의 삶의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2016년 새해에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시고 말씀대로 살아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단거리 달리기 운동경기를 할 때 선수들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미리 출발하려고 출발 신호가 나지 전에 움직이면 실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신 명령과 규례는 그 백성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신 30:11-14). 이 세상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땅에는 땅의 법이 있고, 하늘에는 하늘의 법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직분을 맡아 집사, 권사, 장로가 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자손까지도 번창케 해 주십니다. 어떤 복을 주실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자손에게 베푸시는 복입니다.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신 7:13a). 하나님께서는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창대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의 자손의 복을 주신다는 것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첫째는 자손의 수가 많아지고 번창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는 자손이 성공하고 부요하고 건강하고 장수하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손은 지금도 세계의 갑부가 많고 지혜로운 자가 많이 있습니다. 셋째는 자손이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해서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영적인 축복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기독교회가 생겨서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풍성하게 베푸시는 물질의 복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신 7:13b). 하나님은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의 가정에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직장과 사업장에도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풍성하게” 하시고, “번식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농사가 잘되게 하시고, 목축을 하면 목축이 잘되게 하십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같은 농작물을 풍족하게 하시고, 소와 양이 번식하게 하십니다. 정치도 성경 안에서, 사업도 성경 안에서, 직장 일도 성경 안에서, 우리의 인생도 성경 안에서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자손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는 놀라운 역사, 축복의 역사를 주십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뛰어나게 베푸시는 능력의 복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신 7:14). 하나님 말씀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는 인생에서 훨씬 더하여 우승하게 되고, 자녀가 학교에서 우승하며, 회사도 우승하게 됩니다. 유대민족은 경제, 기술, 두뇌 등 많은 것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민족도 탁월하게 하시고, 개인도 우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민보다 우수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작은 성공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큰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축복을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언제나 잘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법을 알게 해서 말씀대로 살게 하면 형통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자녀에게 가르치는 가정이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신 7:15).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에게서 모든 질병을 쫓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급사람이 10가지 재앙을 받을 때 당했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질'이란 악성 피부병, 장티푸스, 천연두, 안질, 흑사병과 같은 일종의 전염병입니다. 기독교는 건강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말씀은 치유의 약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고 말씀 안에서 치유되는 감격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규례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구별해 주십니다. 구별함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룩함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구별하다’는 뜻의 어원에서 파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다는 단어는 그 독특한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배타적으로 사용됩니다. 거룩하다는 개념은 항상 구별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럴지라도 이것은 훨씬 더 고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는 심령, 가정이 되어서 하늘 은혜가 넘치는 한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목사의 자녀 중에는 세상을 위해 공헌한 이들이 많습니다. ‘아프리카 흑인의 친구’로 불리는 슈바이처는, 독일(지금 프랑스)의 냥자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경건하게 자라나서 위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순교한 토머스 선교사는 영국 웨일스 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로 기도하는 그림 만종의 작자인 밀레의 아버지는 성가대지휘자였고, 증조부는 훌륭한 목사님이었습니다. 명작 ‘톰 아저씨의 집’을 써서 아메리카 흑인 노예해방에 크게 기여한 스토우 부인의 아버지 비쳐 목사님은 유명한 신학자였고, 그 남동생 비쳐 목사는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지는데, 이것은 스토우 부인이 목회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며, 섬기는 자의 자녀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축복의 대 선언입니다. 지금도 교회들 중에 축도할 때 이렇게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약속이입니다. 제사장은 주님의 복을 위임받아서,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 주님의 이름에 의존하여 축복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복을 주시기에 제사장은,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복의 전령이요, 복의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축복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הרב(barak) ‘무릎 꿇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을 송축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축복할 때 어린아이들을 가슴에 않고 머리를 꼭 붙들어 주는데 이것은 어린아이가 머리를 들어 축복하는 자의 손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말씀을 믿고 축복하는 자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머리를 통해 축복해 주십니다. 포도주 잔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았는데,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맨 위로 올라가 포도주를 부으면 맨 위에 잔에 차고 넘쳐흐르게 되고 그 다음 잔에 차고 또 차면 그 밑에 잔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렇게 차고 흘러 넘쳐는 복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그렇게 임하시기를 바라는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축복은 어떤 복일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하나님께서 지키시기는 복입니다.하나님의 축복은 언약의 자녀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부어주십니다. 여기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은 받은 복을 잘 간수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받은 것을 잘 지키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조금도 쉬지 않고, 우리 인생을 향해 공경해 올 때,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도, 우리를 찾아내시고 주목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잠시도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고 철저하게 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큼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다윗은 기도할 때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9-10)라고 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 주님의 영광이 내게 비추고 내 안에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은혜 베푼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ן(hanan)’이란 말입니다. 이는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상체를 굽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진짜 평안은 환란 중에서도 체험되는 복입니다. 분명히 외적으로는 고통과 시험이 심한데, 영혼 깊은 곳에서는 평안함이 솟아나는 평강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많은 우리에게 환희와 기쁨이 넘치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성도는 이런 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복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 지혜, 물질, 건강, 자녀의 복 등을 포함하여, 현세와 내세의 모든 복을 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마태복음 11장 12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오셔서 복 받기를 사모하여 그 복을 받아 누리셔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복을 비는 마음입니다. 복을 빌어주는 마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요, 베풀어주는 마음이며, 사랑의 마음이기에 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선한 마음입니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삭막해 지는 이유는 남을 축복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와 축복을 받고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성도들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의 강변교회는 매일 방문객들로 북적입니다. 이 교회에는 종이 68개나 달린 종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한번 종을 치면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 모두 발길을 멈춥니다. 이 교회는 130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는 9살 때부터 남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해야 했던 가난한 소년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지어졌습니다. 그 소년은 '정직'과 '절제'를 최고의 자산으로 삼고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 재산을 모았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 그는 선뜻 4억 달러를 헌금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감사와 은혜에 젖어 살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손들은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손자는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록펠러입니다. 록펠러는 자신의 사업성공의 비결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교회를 건축한 분은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복을 받는 사람은 자손들이었다.” 선한 일은 자손들에게 세습이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는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원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이다’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이 더 나으리라는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2016년 새해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작년보다 더 나은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립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가정은?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희망이 살아있는 가정입니다.희망이 있는 가정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는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때는 오늘이 암담하고 절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도우심을 믿는다면 절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현재보다” 내일은 더 나으리라는 약속 때문에 우리는 고단한 오늘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면 하루도 살아가기 힘듭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으리라는 미래의 축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안다고 해서 이루지는 것은 아닙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미래의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낫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천배나 많이 받는 가정입니다.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거나 공상이나 뜬구름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제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천배나 많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적 증가를 의미합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70여 명이 애굽에 갔고 요셉과 그 형제들은 다 죽었으나, 야곱의 후손들은 그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는 남자만 60만 명, 여자들과 나이들을 합하면 200만 명이 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가정이 영적으로 천배나 많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넘치는 재물을 받는 가정입니다.하나님의 축복은 재물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빈손 들고 가서 종살이 430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종의 굴레를 벗고 해방될 때에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비록 그들이 금붙이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많은 재화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밖에 살던 때는 우상을 숭배하고 헛된 것에 재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옛 생활에서보다 그리스도 주님 안에 있는 신앙생활에서 현재보다 미래에는 천배나 더 하는 축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적 가나안 복지는 축복의 세계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말씀의 축복과 성령의 은사를 천배나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제 1년 3월 15일에 호렙산에 도착하여 가나안 정복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는 막강한 조직점검이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조언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이끌고 갈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새 땅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이 천배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믿음의 부자가 되고, 건강의 부자가 되고, 재물의 부자가 되고, 사랑의 부자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으리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영국 선교 역사를 보면 ‘프레드릭 로버트슨’이라는 전설적인 선교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분은 부정과 맞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한 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점에 가서 로버트슨의 이야기를 꺼내자 상점 주인이 방에 데리고 가서 로버트슨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부정한 행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도저히 부정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녀는 로버트슨의 초상화에서 그의 자비스러운 눈과 잠깐 부딪친 후 눈물을 흘리며 더욱 선을 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저 자비로운 분이 계시는데,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이에게 부모가 있다는 것은 큰 힘입니다. 어떤 위기가 있으면 무조건 엄마, 혹은 아빠를 찾습니다. 형제들이 많던 시절에는 형님부터 찾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에게는 부모나 형님이 자기를 이해해 주고,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신뢰가 없다면 평생 가슴 속에 멍이 든 채 살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비하신 여호와임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책망과 심판보다는 자비와 사랑을 우선적으로 행하십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믿는 성도들입니다. 자비의 하나님은 비록 잘못이 있어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용서하시는 것보다 더 큰 용서입니다. 이 가정이 2016년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사랑과 이해, 용서와 화해의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째, 버리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녀가 못된 짓을 하고 도저히 고쳐지지 않으면 쓰라린 마음으로 자녀를 경찰에 고발하는 부모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자녀가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면회를 가고, 음식을 먹게 하고 옷을 넣어 줍니다. 여전히 자녀의 마음이 돌려지고 행동이 교정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부모의 모습은 자녀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키기만 하면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아집과 교만 그리고 불순종으로 인해 버림받을만한 일을 한 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버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는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더 순종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계획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둘째, 멸하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의 우상문화가 근절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이기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광야에서 위기를 당해도 이 약속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은 늘 언제까지나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잊고 살 때도 있습니다. 우리 계획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실패하면 완전히 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망하며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나 한번 실패가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버리지도 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일어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멸망은 없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셋째, 언약을 잊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영원토록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식언(食言)하지 않으십니다. 언약을 번복하지도 않으십니다. 언약을 파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사람 편에서 언약을 잊는 경우는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왕 노릇하는 언약을 주셨습니다(계 22:5).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에 의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이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벌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아직도 사랑으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억하시며 언약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축복의 언약을 가진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가정에서 자비의 손길로 서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작은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제하고 선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이제 전도는 전도지를 내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녀들과 함께 아웃에게 자비의 손길을 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